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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한잔]  (역사이야기) 동부전선 타이거이야기 - 타이거의 신화와 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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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7-28 14:57:32

 

(참고로 이 정도의 자료는 제가 시도도 할 수 없는 지식과 자료입니다. 외국 전문학자들의 자료를 인용한 것입니다. 정식 출간자료들이고 인터넷 카더라 자료는 아닙니다. )

 

타이거는 2차대전 수 많은 전차 중에 가장 유명하다동부전선 중반 그리고 서부전선 막판타이거 부대는 엄청난 활약을 했다타이거의 후속인 킹 타이거는 72년 전 당시의 공포가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88mm 포의 막강한 화력과 두터운 장갑 덕분에 무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대 전사학자는 치명적인 내구성을 지적하기도 한다.



미국 애버딘 전차박물관에서 88mm 포신 실물을 본 적이 있는데 대단했습니다.

아래 관통력은 철갑탄을 사용할 경우입니다. 88mm 포의 위력도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포탄의 위력도 있으니까 그냥 재미로만 보시길.


 

독일군은 타이거의 전력을 최대한 활용하고 정예 중전차부대를 선전에 이용하려고 중전차대대Panzer Abteilungen에 타이거를 집중시켰다중전차대대는 군이나 군단차원에 편성된 독립부대로 강력한 돌파력이나 위기를 봉합하는 소방수가 필요한 곳에 투입되었다.

중전차는 1938년 발터 폰 브루우지치Walter von Brauchitsch가 주장했는데 1939~1940년 공세에서 독일전차의 단점이 극명하게 노출되었다그렇지만 초반 공세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중전차개발은 뒷전으로 밀렸다.

그 덕분에 독일전차는 바르바로사Barbarossa 작전 초기부터 소련의 강력한 T-34 KV-1 전차를 상대할 수 없었다.



발터 폰 브루우지치는 육군 총사령관으로 히틀러와 나치에 협조했습니다. 히틀러가 영국점령에 성공했다면 영국총독이 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모스크바 공략에 실패하고 일선에서 물러났다가 전후 전범으로 처형되기 전에 죽었습니다. 

 

다급해진 독일은 중전차개발에 박차를 가해 1942년 봄부터 타이거를 투입했다원래는 전차연대마다 중전차중대(타이거 9)를 편성하려고 했지만 타이거는 속도와 기동성을 우선하는 전차사단의 전략전술과 맞지 않았다.

타이거를 한 부대에 집중시키고 독립시켜 해결책을 찾았다전차교도사단Panzer Lehr Division과 그로스도이칠란트Grossdeutschland장갑척탄사단, 2개 사단만 타이거 대대를 받았다.

원래 중전차대대에는 3호전차 N형도 편성하기로 되어 있었다타이거가 적의 전차나 진지를 격파하고 3호전차는 75mm 단포신으로 보병이나 대전차포를 상대하는 역할분담이었다. D 편성이라고 불렀다.

타이거 대대는 타이거 9대와 3호전차 10대의 타이거 중대 3개로 편성되었고 여기에 대대참모 타이거 2대와 경소대 3호전차 5대를 더해서 타이거 29대와 3호전차 35대를 갖추도록 되어 있었다그렇지만 생산과 보급한계 때문에 2대 중대타이거 20대와 3호전차 25대 편성으로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1943년에 신설된 전차교도사단은 국방군 중 최정예전차사단이었지만 제공권을 완전히 잃은 후에 투입된 전투에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재편되었습니다. 

결국 루르포위망에서 미군에게 항복했습니다. 

 


 

1943 3실제 전투에서 심각한 문제점이 드러났다소련의 포수가 3호전차부터 노렸기 때문에 3호전차의 손실이 막대했다그리고 타이거의 생산량도 급증했기 때문에 급히 편성 E로 변경했다중전차대대는 순수 타이거만으로 편성하는 안으로 각 중대는 14대로 편성하고 참모중대는 3대로 편성했다.

당시 전황이 심각했기 때문에 타이거 45대 편성이 불가능했지만 다른 종류의 전차를 혼합하는 것보다 전력과 보급 양면에서 훨씬 유리했다.

타이거 투입 초기에는 중전차 전술도 개발되지 않았고 전차병 훈련도 3~4호전차와 다를 바가 없었다그래서 극초기 중전차대대는 훈련과 전투경험을 모아 거꾸로 상부에 보고해 전술과 훈련개발을 도왔다.

훈련매뉴얼 타이거 입문서Tiger Fibel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1943 8월에 만들어진 이 매뉴얼은 어려운 기술내용을 재미있는 그림비유사진과 만화로 쉽게 설명하고 있다그리고 실전을 치르면서 타이거는 장거리 포격전이나 매복전에서 88mm로 적 전차를 원거리 격파하는데 최고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Tiger Fibel은 설마? 할 정도로 파격적인 구성입니다. 



독일어 버전은 여기에서 다운로드받을 수 있습니다. 


http://www.lexikon-der-wehrmacht.de/Waffen/Merkblatt/Die_Tigerfiebel_Handbuch_des_deutschen_Tiger_Panzers_.pdf

 

타이거의 첫 데뷔전은 의외로 참담했다. 1942 9러시아 북부전선의 라도가Ladoga호 남쪽에 처음으로 4대가 투입되었는데 지형을 무시한 황당한 결정이었다진흙과 습지에 투입된 4대는 모두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그 중 한대는 그대로 소련군의 손에 넘어갔다.

3개월 후라도가호미슈키노Mishkino와 크라스닐 보르Krasnyl Bor전투에 다시 중전차대대 502를 투입해 이번에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1943 3 19~31일 기간 동안타이거 4대와 3호전차 3대는 소련전차 48대를 격파하고 단 한대도 잃지 않았다.

1943 1 12~3 31중전차대대 502는 소련전차 160대를 격파하고 타이거는 9대를 잃었다이 기간 동안 중전차대대는 충분한 보급과 수리를 받았고 돌격포와 전차엽병 부대의 지원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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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대제가 습지를 메워 상페테르부르크를 건설했는데 혁명이후에 레닌그라드로 개칭되었습니다. 타이거의 데뷔무대로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1943 10 10중전차대대 503은 쿠르스크Kursk 일대에서 78일 연속으로 격전을 벌였고 소련전차 501대전차포 388야포 79항공기 7대를 격파했다타이거 18대를 잃었는데 6대는 122mm  57mm 포를 맞아한대는 보병의 화염병 근접공격으로 불탔다. 4대는 서스펜션과 트랙에 포탄을 맞았지만 회수해서 수리했다.

타이거의 내구성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 전투에서는 겨우 2대만 문제를 일으켰다두 대 모두 구동계의 문제로 자폭처리되었다중전차대대 503 78일의 격전 중에도 항상 10~12대의 타이거를 유지했다.

 

 

타이거는 원래 온갖 포화를 뒤집어쓰며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중세시대 기사역할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야기를 남겼는데, 이 전차는 쿠르스크전투에서 대전차총 227발, 52mm 14발, 76mm 11발을 맞고도 수리를 위해 60km 더 움직였습니다.  

 

타이거는 아프리카전선에도 투입되었다. 1942 11~1943 1중전차대대 501 타이거 29대가 투입된 후에 전선전체에서 활약했다그렇지만 최악의 환경과 무리한 가동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적은 타이거 숫자는 10대 정도로 줄어들었다.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와 쿠르스크에서 패전하면서 소련에 주도권을 완전히 넘겨주었고 대규모 공격과 방어작전은 이제 과거의 영광이 되었다소련은 독일군의 길고 얇게 형성된 방어선을 압도적인 무기병력과 보급으로 마음껏 공격할 수 있었다.

1944년 여름소련은 바그라티온Bagration작전으로 독일 중앙집단군을 궤멸시켰고 사분오열된 독일군은 소규모 반격으로 소련군의 진군을 잠시 막는 정도로 쇠락했다소련은 JS-2와 T-34/85와 같은 신형 중전차로 독일 주력전차인 4호전차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타이거와 킹타이거를 장거리 전투에서 우위를 점했다.

그렇지만 1944년 말 당시에는 타이거를 적절하게 사용한다면 승무원의 훈련과 경험 덕분에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바그라티온과 중앙집단군의 몰락에 대해서는 오래 전에 자세하게 정리해두었습니다. 물론 쿠르스크는 더 자세하게 연재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소련의 숫자는 독일의 전술을 압도했다물자부족으로 중전차대대의 비전투 손실도 급증했다.

쉼없는 기동. 9 26단 한대의 타이거도 움직이지 않는다모두가 타이거는 무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용되고 있다보병과 함께 투입되면 문제가 생긴다타이거는 돌격포가 아니다장전수 손실이 극심하다중상자 9! 13대여야 할 회수전차가 겨우 5대뿐이다부품은 갈수록 귀해지고 있다병력손실 때문에 정비창은 타이거 수리경험이 없는 신병들이다부품도 없고 용접기도 없다

중전차대대 506, 랑게Lange소령. 1944 1 15.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중전차대대 506은 3개월 동안 겨우 14대만으로 적전차 213대와 대전차포 194문을 격파한 반면에 타이거는 2대만 잃었다.

1 14랑게 부대의 타이거는 한대도 움직이지 않았다마지막 2대는 340km를 주파한 후에 주저 앉았다나머지 타이거는 250km를 달린 후에 고장났기 때문에 승무원이 자폭시킬 필요가 없었다.

패전이 확실해진 상황에서도 타이거는 그 지역의 전세를 뒤집거나 소련군의 진격을 지연시켰다. 1945 4 19소련군은 베를린 방어선을 돌파하려고 했다베를린 서쪽에는 중전차대대 503의 킹 타이거가 있었고 2차대전 최후의 전차전 중 하나가 벌어졌다

 

능숙한 승무원이 킹타이거를 적절하게 사용한다면 전장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전투였다. 클로슈테르도르프Klosterdorf (지도 참조) 북동쪽 고지를 선점한 킹타이거 314호는 접근하는 소련 T-34/85를 기다렸다가 15분 만에 모조리 격파했다. 314호도 교전 중에 손상을 입고 후퇴했지만 단 한대의 킹타이거로 소련의 진격을 막았다. 

비슷한 시간, 그루노프Grunow에서는 중전차대대 503의 킹타이거 5대가 압도적인 소련군과 교전을 벌였다. 탄약이 떨어지기 직전에 3대의 킹타이거가 증원되었다고 해도 약 105대의 소련전차를 격파하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제1 벨로루스 전선군이 베를린 작전 중에 입은 피해 중 14%는 킹타이거 8대때문이었다. 이 전투에서 독일군은 카츄샤 포격에 한대만 잃었다.  

 

 

  

 

당시 소련군의 작전계획이었는데 킹타이거 몇 대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워낙 전설적인 전투였기 때문에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아래 지도는 중전차대대 503의 이동경로입니다.  

전투 직후에, 킹타이거 소대 3대는 볼레르슈도르프Bollersdorf 반격에 나서 JS-2 30대와 T-34/85 100대가 집결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어진 격전에서 JS-2 전부와 상당수의 T-34를 격파했다. 소대장인 쾨르네르Korner 전차는 단독으로 39대를 격파했고 다른 동료 하레르Harrer는 25대를 격파했다. 

그날 늦은 오후에 다른 킹타이거 4대가 T-34 30대를 더 격파하고 소련보병의 공격까지 막아냈다. 킹타이거의 격전은 밤까지 이어졌다. 조명탄이 환하게 밝힌 전장에서 킹타이거는 공격해오는 소련군 전차를 정확하게 하나씩 격파했다.

4월 21일부터는 베를린 시가전에 투입되어 소련군의 파상공격을 막아내며 그날 하루에만 15대를 격파했다. 모두 초근접전의 전과였다. 

 

무장친위대 상급분대지도자SS-Oberscharführer(준군사 조직인 나치계급) 쾨르네르Körner는 증원전차를 이끌고 볼레르슈도르프 부근의 언덕으로 향했다. 그 부근에서 다음 공격을 준비 중인 JS-2와 T-34 전차를 발견했다. IS-2 중전차는 나무 부근에 밀집해 있었고 T-34/85 100대는 외곽에 긴 대형으로 늘어서 있었다. 

쾨르네르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JS-2 대열 중 선두와 후미부터 격파했다. 대형 중간의 전차는 나무에 걸려 포탑을 급히 선회할 수 없었다. 쾨르네르의 킹타이거 3대는 일방적으로 JS-2 전차를 격파했다. 쾨르네르는 최고분대지도자 하레르와 함께 63대를 격파했다. 만약 탄약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소련군 전차를 전멸시킬 수도 있었다.

 

참전하지 않은 나머지 킹타이거는 베르노이헨Werneuchen으로 후퇴했다. 쾨르네르 소대는 킹타이거 한대의 지원을 받아 다시 전투에 돌입했다. 소련군 T-34 30대를 격파한 후에 보병의 공격도 고폭탄과 기관총으로 막아냈다. 

밤에 JS-2 전차가 세번째 돌파를 시도하자 조명탄을 밝힌 후에 차례로 격파했다. 이튿날에도 베를린으로 진격하는 소련군을 막았다. 지연후퇴를 거듭하다가 21일에는 중전차대대 503 전체가 베를린으로 후퇴했다. 

수리를 위해 자신의 전차를 갈아탄 쾨르네르는 다시 격전을 벌였다. 하급분대지도자 파이거Feige 전차와 함께 소련군의 파상공세를 시가전으로 막아내며 15대를 더 격파했다. 파이거의 전차는 포탑에 총류탄을 맞아 파괴되었고 파이거는 목이 잘려 전사했다.

 

 

 

 

소련군이 사용한 총류탄입니다. 이런 것으로 설마 전차가? 할텐데, 미군이 사용한 M9 총류탄은 100mm를 관통했고 시가전에서 치명적인 위협이었습니다.  

 

 

  

 

  

  

  

서부전선의 독일전차부대는 밤에나 움직일 수 있었다. 낮에 모습을 드러내면 연합군의 전폭기에 속수무책으로 전멸당했다. 독일이 고안해 1939~1941년에 대성공을 거뒀던 연합전술이 이제는 거꾸로 돌아왔다. 

연합군 목표가 된 지역은 엄청난 포격과 공중폭격으로 초토화가 되었고 반격에 나서는 독일군은 연합군을 제대로 만나기도 전에 다시 포격과 폭격세례를 받았다. 

아르덴느Ardennes기습에서는 험준한 지형이 오히려 킹타이거의 발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부드럽고 좁은 도로는 킹타이거와 같은 초중량전차를 버티지 못했다. 반격의 핵이 되어야 할 중전차대대는 벌지Bulge전투에서 유명무실했다. 중전차대대는 고장, 보급한계, 거친 지형 때문에 겨우 20대 정도의 연합군전차를 격파하는데 그쳤다. 

 

  

그렇지 않아도 궤멸상태인 동부전선에서 귀중한 전차와 항공전력을 긁어모아 시작한 벌지 반격전투의 한 장면입니다. 히틀러는 연합군을 기습해 항공전력을 궤멸시키고 안트워프에서 제2의 덩케르크를 만들고 싶어 했지만 내년 농사지을 종자까지 털어 잔치를 벌인 꼴이 되었습니다.  

 


미군이 버려진 킹타이거를 검사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폭격기에 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조건만 된다면 당연히 10대의 셔먼전차도 부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연합군은 11번째, 12번째 전차를 투입합니다. 우리 공군은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에 밤에만 움직여야 합니다. 그들은 탄약을 무한정으로 사용하는데 우리는 적을 신중하게 골라서 공격해야 합니다. 매번 탄약을 세야 합니다. 병력과 화력 모두 열세인데 보급도 없습니다.”

중전차대대 503 헤르만 베흐네만Hermann Wehnemann

 

타이거와 킹타이거는 대구경 포를 여러 발 맞고도 전투를 벌일 수 있는 우수한 전차였다. 직격탄에 맞아 파괴된 타이거는 많지 않았다. 그렇지만 생산비, 생산소요시간과 유지보수비용이 막대하게 들어서 늘 숫자가 부족했다. 

설상가상으로 연합군의 본국폭격으로 독일 특유의 정밀한 엔지니어링과 장인기술은 점차 무너져갔고 원자재부족은 불량부품으로 이어졌다. 과도하게 복잡한 구조의 타이거의 성능과 안정성은 더욱 악화되었다. 

타이거와 킹타이거는 20세기 최고의 걸작전차로 손꼽히지만 1942~1945년 기간 동안 겨우 2,000대만 생산되었다. 반면에 미국은 M4 셔먼Sherman을 50,000대, 소련은 T-34를 60,000대나 생산했다. 타이거가 전장을 지배했지만 이미 공장의 생산라인에서 승부가 결정되었다.  

 

 

  

 

  

타이거는 강력한 88mm 주포, 정확한 광학장치, 두터운 장갑, 파워 스티어링과 반자동 트랜스미션  등으로 중전차의 새지평을 열었지만 심장은 타이거에 어울리지 않게 소심했다. 마이바흐Maybach 엔진은 야지에서 시속 20~25km에 불과한 출력이었고 그나마도 고장이 잦았다. 그리고 열악한 연비때문에 장거리 기동은 아예 생각할 수도 없었다.  

 

  

마이바흐 V-12 HL 230 P30 가솔린엔진은 690마력의 출력에 불과해 킹타이거의 가장 큰 약점이 되었습니다. 판터도 같은 엔진을 사용했습니다. 

 

킹타이거 한대의 생산시간은 300,000인시Man-Hour가 들었고 타이거 한대의 생산비용은 약 251,000 마르크로 4호전차의 2배 이상이었다. 그래서 많은 전사가는 타이거의 손익에 대해 부정적이며 전세를 뒤집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막판 수세에 몰려 한곳에 고정될 경우에도 제대로만 운용하면 적의 기갑부대에 대재앙을 안겨주었고 그 당시의 공포는 지금의 전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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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친위대 중전차대대 501

SS 전차사단 라이브슈탄다르테 아돌프 히틀러Leibstandarte Adolf Hitler의 핵심전력으로 1943년에 편성되어 이탈리아와 동부전선에 참전했다. 히틀러 유겐트사단으로 전속된 후에는 노르망디 부근에서 연합군을 상대했다. 

1944년 9월, 킹타이거로 재편성되어 벌지전투에 투입되었다가 소련군과의 전투에서 소멸되었다. 전설적인 전차 에이스 미하일 비트만 Michael Wittmann이 있던 대대였다. 

500대 격파. 107대 손실. 교환비 4.67

 

무장친위대 중전차대대 502

1943년 10월에 편성되어 1944년 6월부터 노르망디에 참전했고 1945년 3월 이후에는 동부전선에 투입되었다. 

600대 격파. 76대 손실. 교환비 7.89

 

무장친위대 중전차대대 503

1943년 11월에 편성되었지만 부대원은 유고슬라비아에서 보병으로 참전했다. 1944년 1월부터 네덜란드에 주둔하다가 1945년 1월에 동부전선으로 투입되었다.

500대 격파. 39대 손실. 교환비 12.82

 

국방군 중전차대대 501

북아프리카 지원을 위해 편성되어 1942년 11월에 투입되었다. 1943년 5월, 튀니지에서 항복했다. 1943년 11월에 재편성되어 동부전선에 참전했다. 

450대 격파. 120대 손실. 교환비 3.75

 

국방군 중전차대대 502

1942년 8월에 편성되어 8월 29일에 레닌그라드Leningrad 부근에 소수만 먼저 투입되었고 1943년 2월에 증편되어 다시 투입되었다. 동부전선에서만 활약했고 최고의 전과를 기록했다.

1,200대 격파. 107대 손실. 교환비 13.00

 

국방군 중전차대대 502

러시아 남부에 처음 투입되어 스탈린그라드Stalingrad 후퇴작전에 참전했다. 쿠르스크Kursk, 체르카시Cherkassy에도 참전했고 1944년 4월에 서부전선으로 이동했다. 

1,700대 격파. 252대 손실. 교환비 6.75 

 

  

참고로 영국 보빙턴 전차박물관의 타이거, 세계 한대뿐인 실가동 전차가 9월에 굴러갑니다. 저 혼자라면 이미 다녀왔을 곳인데... 아쉽지만 참아야죠.

그래도 회사출장 땡땡이치고 가족 버리고(?) 열심히 돌아다닌 덕분에 4호전차, 킹 타이거 등의 내부에도 들어가보고 88mm 포수석에도 앉아봤습니다. 

 

http://tankmuseum.org/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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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20-07-28 16:33:47

선추천 후, 천천히 읽습니당!

2020-07-28 18:16:49

재밌게 읽었습니다 ^^

2020-07-28 22:49:34

정성스런 글 너무 재밌게 잘 보고 있습니다 ~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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