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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한잔]  (역사이야기) 2차대전 최고의 전차는? (3부) - 최종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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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03 22:52:54

 

(1, 2부에서 미처 설명하지 못했던 선택기준 설명 후에 시기별 최고의 전차가 등장합니다. 보충자료는 4부에서 보충?하겠습니다.

그리고 최고의 전차는 1부에서 소개한 잘로가의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그가 서부전선 전사의 대가이지만 우리와 생각이 다를 수 있으니까 재미로만 보세요.)

 

전차병

전차병의 숙련도에 따라 전차의 성능도 달라진다. 1941년 여름의 T-34 전차가 가장 좋은 예다. T-34 전차는 모든 면에서 독일군 전차를 압도했지만 실전에서는 참패를 당했다. 전투보고서를 보면 훈련부족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다. 
1944년 프랑스에 투입된 미군전차부대는 2년 정도 훈련을 받았는데도 실전 투입 1개월 만에 전쟁기간 전체 손실 중 절반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훈련만으로는 절반의 완성이었고 전투경험이 나머지 절반이었다.

소련군은 전차병이 얼마나 결정적인지에 대해 조사했었다. 적을 먼저 발견해 식별한 후에 발사하고 적중시킬 수 있는 확률을 계산했다. 숙련된 전차병이 숙련된 적을 상대했을 때, 적 전차를 격파할 확률은 38%에 불과했다. 반대로 미숙한 전차병을 상대했을 때에는 확률이 63%까지 올라갔다. 



내구성과 신뢰성

전차의 내구성도 중요한 요소인데 간과하기 쉽다. 1차대전 전차는 전사에 있어서 혁명이었다. 중세 공성무기와 같이 적의 참호진지를 무너트렸지만 내구성이 너무 떨어졌고 손실 대부분은 고장이었다. 독일군 A7V 전차는 매일 정비를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었다. 프랑스와 영국군 전차도 16~32km를 주행하면 반드시 정비를 받아야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차의 내구성이 좋아졌다. 30년대에는 빅커스Vickers 6톤 전차가 가장 유명했고 소련은 파생전차 T-26(사진 참조)을 생산했다. T-26 경전차는 150시간 마다 엔진을 정비했고 600시간 후에는 엔진을 교체했다. 
트랙과 트랙핀은 800km를 주행한 후에 교체했고 파워트레인도 험지를 주행하면 얼라인먼트Alignment가 틀어졌다. 

 

 

 


1936년 10월, 스페인내전에서 처음으로 투입된 T-26 50대는 2개월 만에 대부분 노후화되었다. 1937년 12월~38년 2월, 테루엘Teruel전역에 투입된 T-26 104대는 작전 65일 동안 586번의 수리를 받았다. 그 중에서는 엔진은 58번, 트랜스미션은 6번, 메인 클러치는 15번, 사이드 클러치는 22번 교체되었다. 2대 중 한 대는 엔진을 교체했다. 
스페인군은 전차를 아끼기 위해 1차대전 당시 프랑스가 그랬던 것처럼 트럭으로 운반해 투입했다. 1939년 9월, 소련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T-26을 1,675대 투입했는데 폴란드군이 독일과의 전투에 전력을 다했기 때문에 무인지경으로 손쉽게 도로를 달렸다. 
그런데도 20%인 302대가 고장으로 이탈했고 전투손실은 15대가 고작이었다. 2차대전 초반까지 전차병은 엔진과 트랙 사용시간을 아주 상세하게 기록해야 했다.  
소련군 전차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1940년 프랑스전투에서, 영국군 전차손실 75%는 고장이었다. 프랑스 샤르Char B1(사진 참조)은 트랜스미션 문제로 절반의 전차가 고장났다. 

 

 

 


고질적인 결함에 부품까지 부족해지면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1941~42년, 영국군은 북아프리카 사막에서 부품부족으로 고통을 받았고 부품생산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1939년 3%에 불과했던 예비부품 생산은 1944년에 45%까지 늘어났다. 
독일군도 부품생산을 잊지 않았다. 1940년 10월, 전차부품 공급이 352톤이었다가 1942년 3월에는 1,190톤으로 늘어났다. 1941년, 독일군의 군수계약 중 30% 정도가 부품이었다. 독일군 전차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다가 격전과 정비병 손실 때문에 점차 악화되었다. 
1940년 6~7월, 프랑스전투에서 3과 4전차사단은 674대의 전차를 투입했는데 24%를 전투에서 잃었고 22%는 고장을 일으켰다. 1941년 늦여름, 러시아침공에서는 긴 도로주행 때문에 고장이 많이 발생했다. 전차사단은 겨우 절반 정도의 전차만 전투에 투입할 수 있었다. 
1941~42년 겨울에는 혹독한 추위 때문에 문제가 더 심각해졌다. 

 

 

 


전차비용


지휘관이라면 저렴하고 적당한 전차를 대량으로 보유할 것인지 아니면 비싸고 좋은 전차를 소량으로 보유할 것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보통은 둘 사이에 적당한 균형을 맞추려고 했다. 독일군은 1943년에 타이거 1 전차를 모든 전차사단에 배치하고 싶었지만 타이거 전차의 비용이 일반 전차의 3배가 넘어서 그럴 예산과 자원이 없었다. 
그리고 체코공장이 대형전차를 생산할 시설을 갖추지 못해 종전까지 경전차인 38t 차체를 생산해 활용했다. 소련군도 자동차공장이 T-34를 생산할 수 없어서 1943년 말까지 T-60과 T-70을 계속 생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초기 T-34의 구입비용은 430,000루블로 T-26의 56,000루블보다 8배 가까이 높았다. 
전차가격을 1:1로 비교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공장의 생산시설, 생산량과 국영여부에 따라 비용이 크게 달라졌다. 예를 들어 판터는 베를린과 하노버공장에서 대당 25,000마르크였지만 팔켄제Falkensee공장에서는 190,000마르크였다. 

다음은 빈센트 버나드Vincent Bernard의 전차생산Panzer Produktion 21012년 Blindées & Batailles, 6~7월호 자료를 인용한 독일전차 구입비용(제국마르크)이다. 

1호전차 B 38,000
2호전차 A 52,640
3호전차 M 103,163
3호돌격포 G 82,500
4호전차 103,462
4호전차 G 125,000
5호판터 176,100
6호타이거 299,800
6호타이거2 321,500

 

2차대전 최고의 전차

 

1930년대 최고의 전차

화력과 방어력 모두 취약한 경전차를 탈락시키면 남는 전차는 대부분 소련군 전차다. 소련은 유럽군대보다 3~4년 빠른 1931년에 전차 대량생산을 시작했고 1936년에는 T-27 경전차부터 T-26 보병전차와 BT-5 기병전차를 거쳐 T-35 대형전차까지 매우 다양한 전차를 보유했다. 
생산량을 보면 T-26과 BT-5가 많았고 둘 다 같은 45mm 포와 포탑을 사용해서 프랑스, 영국, 독일군의 기관총 경전차를 압도했다. 동축 기관총도 장착해 대인공격력이 높았다. 장갑은 서유럽전차와 비슷하거나 좋았다. BT-5는 T-26보다 전면장갑이 더 두텁고 엔진과 서스펜션이 정교해서 주행속도와 험지돌파 성능이 좋았다. 

 

 

 

격동의 30년대 최고의 전차에서 전차병의 선택은 T-28(그림 참조)이다. T-28이 BT-5보다 화력과 방어력이 높았다. BT 시리즈는 T-28보다 10배나 많이 생산되었고 소련군 기병을 기계화시킨 주역이어서 지휘관의 선택은 BT-5(사진 참조)다. 

 

 

 



전격전시대 1939~40년

전격전시대에는 전차전교리가 미완성이었고 서둘러 많은 전차를 쏟아냈기 때문에 무척 다양한 전차가 존재했다. 장갑은 15mm부터 75mm까지 있었고 화력은 기관총부터 37~40mm 그리고 75mm 포까지 있었다. 보병전차는 보통 시속 15km를, 기병전차는 시속 50km를 주행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는 기계신뢰성이 관건이었다. 이전에 비해 내구성이 많이 좋아졌어도 여전히 전차손실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독일군은 화력과 방어력 면에서 뒤떨어졌지만 설계와 마이바흐Maybach엔진덕분에 안정성이 높았다. 그리고 체코합병과 폴란드침공으로 초반에 정비경험을 쌓았고 가동률을 높였다. 
독일군 전차전교리도 프랑스나 영국교리보다 완성도가 높았다. 1939년 10월~1940년 5월, 독일은 경보병사단을 전차사단에 통합해 전술교리를 단순하게 만들었다. 

이 시기 최고의 전차 후보는 프랑스 소뮤아Somua S35와 독일 4호다. 소뮤아 S35는 장갑, 화력, 기동성 3박자를 모두 갖춰 세계최초의 전차전인 벨기에 정블루 갭Gembloux Gap에서 제 성능을 발휘했다. 4호 전차는 화력과 기동성에 탁월한 반면에 장갑방어력은 보통이었다. 
전차병의 관점에서, 소뮤아 S35가 최고의 전차다. 포탑설계 정도가 단점이다. 지휘관의 선택은 4호 전차다. 전차병 배치가 현대적이고 기계신뢰성이 높았다. 활용도가 높아서 독일군의 군마로 불릴 정도로 전쟁내내 주력전차로 투입되었다. 

 

 

 

4호 전차는 원래 보병지원전차로 투입되었기 때문에 75mm를 장착했어도 고폭탄용 단포신이었습니다. 



바르바로사Barbarossa 1941년

1941년 동부전선에서의 전차병과 지휘관 선택은 T-34 1941형의 독차지다. T-34는 전차기술의 혁신이며 독일과 소련의 기술경쟁을 일으켜 2차대전 전차의 표준이 되었다. 1941년 여름의 T-34 전과는 신통치 않았지만 이 전차가 없었다면 소련전차군은 부활하지 못했다. 소련군은 T-34 덕분에 모스크바로 다가오는 독일군을 막을 수 있었다. 
독일군은 전차병의 경험과 우월한 전투교리로 전차의 열세를 극복했다. 당시 독일군이 보유한 대전차전 최고의 전차였던 3호는 간신히 T-34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였고 대인공격력은 평범했다. 4호는 대인공격력은 우수했지만 보병지원용으로 개발되었기 때문에 대전차전 성능이 떨어졌다. 3호와 4호 모두 장갑은 평범했다. 
독일군 전차의 내구성은 소련군보다 나았지만 부품부족과 과도하게 늘어진 보급로 때문에 상당히 많은 전차가 움직이지 못했다. 1941~42년 겨울, 러시아 중앙에 닥친 혹한으로 독일전차군은 얼어붙어서 전장에 나타나지도 못했다. 
독일군 보고서를 보면 1942년 1월, 겨우 1,015대의 전차로 러시아 국경을 넘었던 전차 중 겨우 1/3만 남았다. 그리고 6개 전차사단의 전력 중 움직이는 전차는 겨우 60대에 불과했다. 

 

 

 

2차대전 전차는 T-34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독일군에게 큰 충격을 준 T-34 1941년 형입니다. 



동부전선, 1942년

1942년이 되자 T-34의 우위는 점차 사라져갔다. 급하게 옮긴 공장에서 결함이 많이 발생했고 다급한 생산때문에 개량을 미뤄 독일군 전차에 대한 우위가 상쇄되었다. 반대로 독일군은 4호의 화력과 방어력을 T-34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독일군 전차는 여전히 전차병의 경험, 전투교리와 내구성에서 우월했다. 
4호 전차가 전차병과 지휘관 모두에게 최고의 전차였다. 당시 최강이었던 타이거는 1942년 말 그것도 극소수만 투입되어 이 시기에서는 제외되었다. 

 

 

 

4호 전차도 소련군 전차에 대항하기 위해 F2형부터 75mm 장포신을 장착했습니다. 500m 거리에서 관통력이 단포신보다 3배 가까이 강력해졌습니다. 

 

 

 


북아프리카 1941~43년

북아프리카전선은 2년 반 동안 지속되었고 다양한 전차가 우위를 보였다. 1941년 초에는 마틸다Matilda, 1941년 말 3호, 1942년 그랜트Grant가 활약했는데 전차병의 선택으로는 4호 G형이다. 셔먼보다 화력이 약간 더 좋았고 전차장 큐폴라와 광학장치로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타이거는 역시 극소수만 투입되었기 때문에 제외되었다. 
지휘관의 선택으로는 셔먼이다. 화력과 방어력이 좋았고 대량으로 투입되었고 내구성도 좋았다. 

 

 

 

G형은 전면장갑을 30mm에서 80mm로 늘리고 포수의 전면 시야구멍을 없애 방어력을 크게 보강했습니다. 

 

타이거 충격 1943년

1943년, T-34는 더 이상 무서운 존재가 아니었다. 타이거와 판터는 물론이고 개량을 거듭한 4호에게도 밀렸다. 독일군 신형전차 중 타이거가 압도적이었다. 88mm 철갑탄과 고폭탄 모두 위력적이었다. 판터의 75mm 철갑탄의 관통력이 더 좋았지만 고폭탄은 위력이 떨어졌다. 두 전차의 장갑이 모두 우수했는데 타이거의 측면장갑은 판터보다 훨씬 두터웠다. 
두 전차는 안정성에서 크게 부족했다. 1943년 하반기 평균 가동률은 서로 비슷했다. 판터는 36%, 타이거는 37%였다. 타이거가 전차병의 선택이다. 
1943년 당시 타이거와 판터의 진정한 경쟁자는 4호 H형과 3호 돌격포 G형이었다. 장갑방어력에서는 비교가 안되었지만 두 전차 모두 장거리에서 적당한 방어력을 갖췄다. 두 전차의 75mm L/48포는 판터의 75mm L/70이나 타이거의 88MM 포 정도는 아니어도 그 당시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1943년 소련군이 잃은 전차 중 15% 정도가 1km 포격전이었고 60%는 2~600m, 10%가 200m 근접전이었다. 이 정도 거리에서는 75mm L/48 포도 T-34 전면장갑을 관통할 수 있었다. 

 

 

 


두 전차의 장점은 가용성이었다. 훨씬 저렴하고 생산하기 쉬워서 많은 수량이 생산되었다. 안정성도 높았다. 1943년 하반기, 4호 가동률이 48%였고 3호 돌격포는 65%로 타이거와 판터의 2배였다. 그만큼 많은 전투에서 활약했다는 뜻이다. 
1943년 7얼 5일 쿠르스크Kursk전투에서 1,870대의 전차와 860대의 돌격포가 투입되었다. 8월 말, 돌격포 524대와 전차 484대로 줄어들면서 역할이 뒤바뀌었다. 그동안 동부전선에서 전차의 수가 돌격포를 압도했는데 1944년 말에는 더 많은 돌격포가 전투를 맡았다. 
타이거와 판터가 너무 비쌌고 부족해서 전차감 하인츠 구데리안Heinz Guderian은 1943년 10월에 돌격포중대 편성을 허가했다. 1943년 말, 돌격포 중 54%만이 돌격포 대대에 편성되었다. 25%는 전차사단에 편성되고 나머지는 육군과 공군에 편성되었다. 

3호 돌격포 전차병은 포격훈련을 받았고 조준장치도 일반 전차보다 우수했다. 전차장은 사거리측정이 더 정확한 쌍잠망경Binocular periscope를 사용했다. 1943년 9월 보고서를 보면, 돌격포 부대의 격파율이 판터의 격파율보다 높았다. 쿠르스크전투 보고서에서도 돌격포가 4호보다 전투력이 좋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1941년 6월, 러시아침공 개시부터 1944년 8월까지, 돌격포부대는 소련군 전투차량 18,261대를 격파했다. 이 시기 총 격파 수는 100,748대로 돌격포가 18%를 차지했다. 3호 돌격포는 원래 보병지원 전차였고 소비한 탄약의 85%가 고폭탄인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전과였다. 
타이거가 모든 면에서 3호 돌격포를 압도했지만 당시 독일군은 타이거 3대 가격으로 3호 돌격포 10대를 구입할 수 있었다. 가동률까지 계산하면 타이거 한 대를 투입할 때에 3호 돌격포 7대를 투입할 수 있었다. 전차가 부족했던 독일군에게는 3호 돌격포가 더 적합했다. 

 

 

 


전차전성시대 1944년 

전차병의 선택은 당연히 판터다. 1944년 여름, 판터는 여전히 우수한 전차병이 탑승하고 있었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신병으로 대체되었고 성능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연합군에게는 셔먼 파이어플라이Firefly 17파운더Ponder가 있었지만 판터에 비해 방어력이 떨어졌다. 
지휘관의 선택은 T-34 85다. T-34를 제대로 업그레이드했고 소련의 승전을 함께 했다. 미군에게는 M4A3(75mm)가 있었지만 T-34 85에 비해 기동성이나 화력이 부족했다. 

 

 

 



마지막 전투 1944년 12월~1945년 5월

종전 직전까지 다양한 전차가 실전테스트용으로 투입되거나 개발 중이었기 때문에 1945년 최고의 전차를 선택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T-44가 실전에 투입되었다면 강력한 후보가 되었을 텐데 영국의 강력한 후보 센츄리온Centurion처럼 실전을 겪지 못했다. 판터는 아르덴느Ardennes전투에서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전차병의 선택은 M26 퍼싱Pershing이다. 대전차와 대인 모두 강력한 화력을 갖췄고 디자인도 아주 훌륭해서 M46, M47, M48, M60 시리즈로 이어졌다. 방어력도 좋았다. 영국군 코멧Comet은 대전차 화력은 좋았지만 대인 화력이 떨어졌다. 소련군 IS-2M은 탄약탑재량과 연발속도가 심각하게 떨어졌다. 
지휘관의 선택은 M4A3E8이다. T-34 85도 우수했지만 M4A3E8은 경심철갑탄HVAP를 사용했고 내구성도 우수했고 대량으로 전투에 투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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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2020-09-03 23:11:06

추천과 함께 언제나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1
2020-09-03 23:29:29

추천합니다~

항상 정독하고 있습니다 ^^

2020-09-04 00:5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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