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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한잔]  (역사이야기) 2차대전 최고의 전차는? (2부) - 전차병의 선택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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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9-03 22:48:34

 

전차 한 대 격파에 얼마나 많은 탄을 썼을까? 

PC 게임과 달리 2차대전 당시에는 전차 한 대에 많은 포탄을 사용했다. 예를 들어, 1944년 6월 24~30일 기간 동안, 중전차대대Panzer-Abteilung 502의 타이거전차는 소련군 전차와 장갑차를 27대 격파하면서 88mm 철갑탄을 무려 1,079발이나 사용했다. 소련군 차량 한 대에 40발을 사용한 셈이다. 
7월 4~27일 전투에서는 소련군차량 85대를 격파하면서 555발을 사용해 대당 6.5발로 크게 낮아졌다. 앞의 전투는 2km 이상의 장거리 포격전이었고 이 전투는 근거리 접전이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포탄소비는 보통이었다. 1943년 12월 1일~1944년 5월 31일, 3호 돌격포 23대는 동부전선에서 총 51,595발의 철갑탄을 사용했다. 소련군차량 1,899대를 격파하고 132대에 손상을 입혀서 대당 25발 이상을 사용했다. 
1942년 88mm 대공포는 포대가 안정적이고 조준간이 정확했고 포탄도 강력하고 빨라 서부사막에서 더 없이 좋은 대전차포였다. 시야가 탁 트인 사막에서도 전차 한 대에 평균 11발을 사용했다. 

기록에는 당연히 과장이나 오류가 있다. 항공기를 격추시키면 확실한 격추이지만 전차전에서는 그렇지 않다. 대전차포에 트랙을 맞아 주저 앉았거나 관통되더라도 전차병 일부만 죽었다면 전차를 회수해서 수리한 후에 다시 전투에 투입했다. 적에게 전장을 내주어서 전차를 회수할 수 없거나 내부화재가 일어나 장갑이 약해진 경우에만 손실로 기록해야 했다. 
전차전에서는 공중전보다 과장과 오류가 훨씬 심각하다. 혼전에서 여러 대의 전차가 한 대의 전차를 노리면 전과는 몇배로 늘어날 수 있다. 그리고 선전목적으로 기록을 일부러 과장했다. 
그리고 1943년 여름의 쿠르스크Kursk전투(사진참조)처럼 대규모 전차전을 생각하는데 실전에서는 보병과 대전차포를 상대한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서부전선을 예로 들면, 미군이 사용한 75mm 전차포탄 71%와 76mm 73%는 대인 고폭탄이었고 나머지가 연막탄과 철갑탄이었다. 목표물 중 전차나 장갑차는 20%도 안되었다.
독일군의 경우 동부전선의 3호 돌격포 23대가 1943년 12월 1일~1944년 5월 31일 사이에 총 315,280발을 사용했는데 그 중 84%는 보병, 건물과 차량 등이었고 전차와 장갑차는 겨우 16%에 불과했다.  

 

1942~45년, 미군전차의 목표물

 

목표물                        지역평균 

요새                           21.2%

건물                           17.3%

보병                           15.5%

전차                           14.2%

대전차포와 야포         12.8%

기타                           10.8%

트럭                            8.2%

 

 

 

 

교전거리

2차대전 전차포는 교전거리에 따라 성능이 크게 달라졌다. 장거리에서는 포속이 낮아지고 궤도차이로 정확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나중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조준경도 정확하지 않았다. 전격전Blitzkrieg 시기에는 37mm 전차포와 대전차포가 고작이라 근접전이었고 대전 말기에는 지형에 따라 교전거리가 결정되었다. 우크라이나 평원과 북아프리카 사막은 장거리교전이었고 산이 많은 이탈리아와 유럽북서부는 교전거리가 상당히 짧았다. 

미군전차의 평균 교전거리 
북아프리카, 1941~43년 823m
시실리와 이탈리아, 1943~45년 320m
유럽전선, 1944~45년 732m


기동성

전쟁초기의 보병전차와 기병전차는 기동성 차이가 있었다. 보병전차는 속도보다 장갑보호력이 우선이었고 기병전차는 속도가 우선이었다. 대전중반이 되자 이런 차이는 사라졌고 모든 전차가 도로주행 시속 40~48km와 험지주행 시속 25km를 달렸다. 
기동성 차이는 엔진출력에서부터 시작된다. 대부분의 전차는 가솔린엔진을 사용한 반면에, 소련군 전차는 중전차에 디젤엔진을 사용했다. 가솔린엔진 전차가 화재에 취약하다는 오해가 있는데 통계자료가 없고 실제로는 탄약에 불이 붙는 내폭으로 화재가 발생했다. 

 

 

 


대부분의 국가가 전차 전용엔진을 개발하지 않고 기존 엔진을 활용했기 때문에 가솔린엔진이 대세였다. 전쟁초기 미군은 비행기엔진을 사용하다가 항공기수요 때문에 엔진을 받을 수 없게 되자 다양한 엔진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 가장 많이 사용된 엔진은 1차대전 리버티Liberty 항공기엔진(사진참조)이었다. 소련군은 BT전차에 사용했고 영국군도 초기 전차에 사용했다. 프랑스군은 다양한 엔진을 사용했는데 보병전차에는 버스와 트럭엔진을 사용했다. 
일부 국가는 전차 전용엔진을 개발했고 그 경우에는 디젤엔진이 대세였다. 일본군이 최초로 디젤엔진을 사용했고 소련군은 1939~40년 T-34와 KV에 V-2 디젤엔진을 장착했다. 

 

 

 


엔진 다음으로 변속기와 파워트레인Power-Train이 중요했다. 전차변속기는 트랙터나 자동차변속기를 변형해 사용했는데 전차 특유의 심한 진동 때문에 많은 부품을 변형해서 사용했다. 파워트레인이 전차의 안정성을 크게 떨어트렸다. 
2차대전초기 전차는 무게가 가벼웠기 때문에 리프Leaf스프링 서스펜션을 사용해 험지주행 성능을 높였다. 크리스티Christie 스프링 서스펜션(그림참조)은 고속전차용으로 험지에서도 상당한 속도를 낼 수 있었지만 차체의 공간을 많이 차지했다. 
미군은 리프 스프링 대신에 원뿔압축Volute 스프링을 사용했다. 원뿔압축 스프링은 30톤급 전차도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토션Torsion바 서스펜션은 1930년대 말에 사용되기 시작했고 독일군 3호 F형이 대표적이었다. 내부공간을 많이 차지 않으면서도 도로주행 성능이 좋아서 대전말까지 많은 국가에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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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동억제와 지압Ground Pressure도 기동성에 영향을 주었다. 대부분 핀으로 좁은 철제트랙을 연결시켰다. 미군은 도로주행 성능을 높이기 위해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궤도에 고무패드를 댔다. 
트랙을 넓히면 지압과 안정성을 높일 수 있었다. 도로나 마른 땅 위에서는 트랙 너비가 별 상관이 없지만 진흙과 눈에서는 너비가 상당히 중요했다. 독일군은 러시아에서 진흙과 눈에 고생한 후에 겨울용 트랙이나 연장트랙을 사용했다. 
미군전차는 흔들림이 적어서 1944년까지 좁은 트랙을 사용하다가 1944년 가을에 유럽전선의 진흙과 눈을 겪고는 급하게 연장트랙을 사용했고 1945년 초에 새 서스펜을 도입했다. 

 

 

 

 

 

 

소련군 T-34는 독일군전차보다 훨씬 넓은 트랙을 사용해서 험지돌파 능력이 좋았고 본토환경을 잘 알기 때문에 이런 통나무를 가지고 다니며 진흙탕 등을 지나갔습니다. 

 

 

지휘와 통제

최소한 4~5대가 같이 움직이는 전차전술교리였기 때문에 전장에서 서로 교신할 수단이 필요했다. 1차대전에서는 깃발이나 수신호를 주고받았고 2차대전 초반까지 깃발이 주요 통신수단이었다. 장거리 전투 또는 혼전에서는 깃발신호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리고 전차장이 전차 밖으로 상반신을 내밀고 신호를 보내야 해서 무척 위험했다. 
무선교신이 개발되었지만 초기 AM 무전기는 진공관을 사용해 내구성에 큰 문제가 있었다. 최초의 전차무전기는 모스Morse부호를 사용해서 무전병의 역할이 컸다. 1930년대 말에 음성무전기가 도입되었지만 비용과 내부공간 문제로 소대장 전차만 수발신이 가능했고 소대전차는 수신만 했다. 
그나마도 제대로 갖춘 군대는 독일과 영국이 처음이었다. 독일은 전격전을 위해 실시간 통신이 필요했고 영국군은 순항전차와 정찰전차에 장착했다. 프랑스는 모든 기병전차와 Char B1과 같은 전투전차에 무전기를 장착하려다가 비용과 무전병훈련 문제 때문에 포기했다. 소련군도 비용과 기술한계 때문에 소수만 장착했다. 1930년대 주력전차인 T-26에 50% 정도 장착했다가 1942~43년에는 생산부족으로 거의 장착하지 못했다. 

 

 

 

 

 

 

미군전차의 깃발신호입니다.

무선기술은 전쟁 중 크게 발전했다. 프리셋Preset 주파수를 사용해서 약간의 교육만으로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초기 독일군은 2개의 프리셋 주파수를 가졌고 미군은 1941년에 FM 무전기를 사용하면서 훨씬 자유로웠다. FM은 잡신호를 줄일 수 있기 때문에 AM 무전기보다 성능이 좋았다. AM 무전기는 전차 자체의 잡신호, 트랙과 기어의 금속 접촉 등으로 교란에 취약했다. 
무전기는 전차를 지원하는 보병과의 통신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전차소대나 중대장이 보병 중대나 대대 이상의 본부와 통신했는데 전차는 보통 중대 이하의 보병부대와 협동했기 때문에 실시간 교신이 되지 않았다. 
보병소대가 아군 전차를 노리는 대전차포를 발견하면 중대본부에 먼저 알리고 중대본부는 다시 전차소대장에게 무전교신해야 했다. 전투에서는 치명적인 지연이 되었다. 

그리고 작은 보병부대까지 무전기가 지급되지 않았다. 독일군 보병대대는 1943년까지 무전기가 대부분 없었고 미군과 영국군은 비교적 여유있게 지급했다. 미군은 1941년에 소대수준까지 휴대용 무전기를 지급했지만 1944년 프랑스전선에서 전차-보병 교신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1944년 9월, 미군은 전차중대의 특정 전차에 SCR-300 무전기와 대보병 교신전용 VRC-3를 장착했다. 소규모 보병은 전차 뒤에 달린 야전전화기로 전차병과 긴급한 내용을 교신했다. 

 

 

 


독일군은 1944년 초에 전차연대와 장갑척탄병연대를 중대수준에서 실시간 통신할 수 있게 했지만 충분히 보급되지 않았다.
전차에 무전기를 장착하면서 내부 전차병 간의 통신도 훨씬 수월해 졌다. 초기의 전차는 소리를 지르거나 음성관으로 교신했다. 일부 전차장은 운전병의 어깨를 밟아 방향을 지시했다. 무전기를 사용하면서 내부통신시스템도 등장했고 전차병은 헤드폰을 착용했다. 덕분에 엄청난 소음의 전장에서도 서로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전차병 숫자가 늘어나면서 지휘와 통제가 쉬워졌다. 1917년 르노Renault FT(그림참조)와 같은 초기 전차는 운전병과 전차장겸 포수 두 사람이 전부였다. 느리게 움직이며 보병을 지원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전차전술이 복잡해지고 기동성이 중요해지면서 더 많은 전차병이 탑승하기 시작했다. 
전차병은 세 명으로 늘어났지만 여전히 전차장이 포수나 장전수 역할을 했기 때문에 효과적이지 못했다. 1930년대 초반, 독일군은 2인용 포탑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신형 크룹Krupp 포탑을 개발해 전차장, 포수와 장전수 3명을 수용하면서 전차는 한 단계 더 발전했다. 전차장은 이제 내부와 소대전차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독일군은 1939~41년 전격전에서 3인 포탑으로 전과를 높인 반면에 프랑스와 소련군 전차는 1~2인 포탑으로 우왕좌왕했다. 
3호와 4호전차의 크룹포탑은 전차장용 큐폴라Cupola를 장착해 사방을 보고 상황에 더 빨리 대처할 수 있었다. 연합군 전차는 잠망경이나 반사경을 장착해 시야가 크게 좁았다. 전차장 큐폴라는 1942~43년에 표준장비가 되었다. 

 

 

 


 
전차의 시야 시스템은 범용 시야장비와 전차 조준경이 있다. 초기 전차는 그냥 구멍을 뚫은 관측구멍이 있었고 소구경 총탄에도 부상을 당할 수 있었다. 1920년대, 반사경을 장착해 운전병이 반사경 렌즈로 외부를 봤다. 부상을 막고 파손되어도 렌즈를 교체하면 되었다. 
반사경은 여전히 장갑에 구멍을 내야 했기 때문에 대전차포탄에는 취약했다. 잠망경은 장갑상판에 구멍을 내서 훨씬 안전했다. 폴란드 7TP 경전차가 최초로 도입했고 영국, 소련과 미군전차가 뒤를 따랐다. 잠망경은 회전시킬 수 있어서 훨씬 넓은 시야를 확보했다. 
독일군은 3호전차부터 전차장용 큐폴라를 사용했고 미군은 1944년에 전방위 큐폴라를 장착해서 매번 잠망경이나 시야장비를 열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지만 2차대전 전차의 시야장비는 절대로 만족스럽지 않았고 대부분의 전차장은 포탑 해치를 열고 머리를 내밀어 상황을 지켜봐야 했다. 
전차포 조준은 망원조준기를 사용했는데 포탑정면에 조준경 구멍을 내야 했기 때문에 미군은 초기 M4 셔먼에 잠망조준기를 사용했다. 잠망경 조준기와 포 연결에 문제가 발생했고 영국군은 미군에게 망원조준기 교체를 요청해서 1942년 말부터 M55 망원조준기를 표준으로 장착했다.  

 

 

 



전차포대도 중요했다. 1930년대 말, 일부 전차는 어깨 패드를 대서 각도를 맞추는 고각 자유조정식 포대를 사용했다. 근접전에서는 괜찮았지만 장거리 포격전에서는 첫발을 쏘고 탄착점을 바로 수정할 수 없었다. 
미군은 M3와 M3A1 사이에 개선했고 영국군은 마틸다Matilda 보병전차와 크루세이더Crusader순항전차에 고각 자유조정식Free-Elevation 포대를 그대로 사용했다. 1942년에 들어서면서 대부분의 전차가 고각 기어조정식 포대를 사용했다. 
1944~45년, 야간전투장비가 등장했다. 영국군은 마틸다와 그랜트Grant전차에 강력한 탐조등CDL(Canal Defense Light)을 장착했다. 전투용이 아니라 야간이동용이었기 때문에 몇 번 사용하지 않고 폐기했다. 
독일, 영국과 미국은 모두 적외선 야간시야 장비를 개발했다. 독일군은 1945년에 우후Uhu 장비를 반궤도 장갑차와 전차에 장착했지만 기술문제가 너무 심각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1945년에 실전투입되었다는 이야기도 근거가 없다. 

 

 

 


2차대전 중에 포신 안정화장치Gun Stabilization도 개발 중이었는데 미군만 대규모로 시도했다. 저속으로 움직이면서 포를 발사하거나 일단 적을 조준한 후에 멈춰 세밀조준을 할 수 있게 하는 장치였다. 
당시에는 유지보수와 훈련부담 때문에 반론이 많았다. 능숙한 포수는 이 장치를 원했지만 1944년 격전으로 전차병 소모가 너무 심해서 이 장치를 다룰 포수가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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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2020-09-04 00:41:39

기다렸던 글이 올라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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