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
비밀번호 찾기 회원가입

[차한잔]  [역사S] 선덕왕, 여자로서 지존의 자리에 오르다.

중혼후
9
  1241
Updated at 2020-08-04 10:28:58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나라에는 세 명의 여왕이 있었습니다. 이 세 분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중 적어도 한 여왕에 관해서 만큼은 모르는 이가 없을 겁니다. 왜냐고요? 그녀가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임금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얼마 전에는 TV 드라마에 출연하여 세간의 이목을 사로잡은 바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그녀는 선덕여왕입니다. (당대의 신라 사람들은 자기들의 임금이 여자라고 하여 특별히 왕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이하 선덕왕으로 칭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주인공은 신라의 제 27대 임금인 선덕왕(善德王, 재위 632647)으로 정해보았습니다.

 

선덕왕에 대하여 가장 궁금한 것을 꼽으라면 아마도 어떻게 여자로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일 것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단 한 명의 여왕도 출현한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후대의 고려나 조선 시대에도 역시 여왕이 탄생한 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신라에서만 여왕이 배출되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신라의 후진성에 있었습니다. 혹자는 개명했다는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여성 지도자에 대한 편견이 적지 않은데 그 옛날에 이미 여성 임금을 만들어냈던 신라가 후진적이었다니, 그 무슨 말인가?’ 하고 의문을 표시할지 모릅니다.

 

전통 시대에 있어서 최고의 문화 선진국은 단연 중국이었습니다. 고구려는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고 백제 역시 바다만 건너면 중국과 통호(通好)할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이러한 나라들은 일찍부터 중국 문화, 특히 당시의 시대적 조류라고 할 수 있었던 유교사상을 이른 시기부터 수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라의 경우에는 조금 달랐습니다.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중국과 교류하기 위해서는 육로로 고구려의 영토를 통과하거나 해로로 백제의 영해를 거쳐서 가야만 하였습니다. (고대에는 항해술이 발달하지 못하였으므로 대개의 경우 해안선에 인접하여 배를 모는 연안 항로를 이용하였습니다. 때문에 신라인이 뱃길로 중국에 가기 위해서는 백제의 연안을 따라 항해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고구려나 백제가 남 좋은 일 시켜주자고 제 나라 영토나 영해를 내어줄 리는 만무했기 때문에 신라는 상당 기간 고립된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만 하였고 결국 유교 문물도 뒤늦게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유교의 가르침에는 여자를 천시하는 내용도 들어 있었습니다. 즉 신라는 그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유교 문화의 전래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한참이나 늦었고, 그로 인해 여성을 천하게 여기는 사상으로부터의 영향도 상대적으로 적게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교 문화가 수용되기 전, 우리의 고대 국가들에서 여성들은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東明聖王) 14년조에는 왕의 어머니 유화가 동부여에서 사망했다. 그곳의 왕 금와(金蛙)가 그를 태후의 예로 장례지내고 그의 신묘를 세웠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화부인(柳花夫人)의 신묘(神廟)가 세워졌다는 것은 곧 그녀가 여신(女神)으로서, 숭상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을 증언해 줍니다. 이와 같은 전통은 동부여뿐만 아니라 고구려에서도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또한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溫祚王) 17년조에는 사당을 세우고 왕의 어머니에게 제사지냈다.”라는 내용이 보이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백제에서도 온조왕의 어머니인 소서노(召西奴)가 하나의 신()으로서 추앙받았다는 사실을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신라의 경우에는 어떠하였을까요? 이 점은 <삼국사기> 잡지 제사조를 통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라의 종묘 제도에 의하면 제 2대 남해왕 3년 봄에 처음으로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사당을 세우고 사계절에 제사를 지냈다. 이 제사는 (왕의) 친 누이동생인 아로(阿老)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였다.”

 

이 기사는 나라의 중대 행사라고 할 수 있는 종묘의 제례(祭禮)에서 여성인 아로(阿老)가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점을 알려줍니다. 이처럼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에서 여성이 신으로 숭배 받고 심지어 국가의 제사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봤을 때 우리 고대 국가 사회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결코 낮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만 고구려나 백제에서는 유교 문화가 들어오면서 이와 같은 전통들이 점점 희미해진 반면 신라에서는 외래문화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던 탓에 고유의 관습이 오래도록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신라에서는 임금의 사위로서 왕위를 이어나간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테면 제 13대 미추이사금(味鄒泥師今), 17대 내물이사금(奈勿泥師今), 48대 경문왕(景文王) 등의 예를 들 수 있는데 이와 같은 경우는 신라 역사를 통틀어 무려 8번에 이릅니다. 이것은 신라 사회에서 여자 쪽 계통도 일정한 정통성과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선덕왕의 아버지인 진평왕(眞平王)에게 있어서도 딸에게로의 왕위 승계는 불가피한 면이 있었습니다. <삼국유사> 왕력편 선덕여왕조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골 남자가 없어졌으므로 여왕이 즉위하였다.”

 

즉 진평왕 대에 이르러서는 왕위를 이어나가야 할 존귀한 성골(聖骨) 남자가 더는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성골 여자인 덕만(德曼, 선덕왕의 이름)공주가 다음 임금으로 즉위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진평왕의 이름은 백정(白淨)이었습니다. 또 그의 왕후는 마야부인(麻耶夫人)이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백정마야가 석가모니 부모의 이름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평왕은 자신과 자신의 아내를 부처의 부모와 동일시할 정도로 왕실의 혈통을 신성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아마 진평왕은 자신과 마야부인의 사이에서 석가모니와 같은 성스러운 덕을 지닌 왕자가 태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과는 다르게 그에게는 덕만, 천명(天明), 그리고 선화(善化)라는 세 명의 딸들만 태어났습니다.

 

마침내 진평왕에게는 신성한 혈통을 이어받은 자신의 딸들 중 하나를 차기 계승자로 내세워야 할 것인지, 아니면 진골 귀족 중에서 한 남자를 선택하여 다음 왕위를 잇게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할 때가 왔고 결국 그는 맏딸인 덕만공주에게 왕권을 넘기기로 결심하였던 것입니다.

 

, 이제는 또 다른 부면을 검토해보도록 합시다. 흔히들 선덕왕 하면 드라마에서 나왔던 것처럼 젊은 나이의 아리따운 여성으로 연상을 합니다. 과연 그녀는 왕으로 즉위했을 때 몇 살이었을까요?

 

역사서에는 선덕왕의 나이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자료가 실려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연령을 추정해 볼 수 있는 단서는 제공해 줍니다. <삼국유사> 기이편 태종춘추공조를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진덕왕이 죽자 영휘(永徽) 5년 갑인(甲寅, 654)에 춘추공은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린 지 8년만인 용삭(龍朔) 원년 신유(辛酉, 661)에 붕어하시니 나이 59세였다.”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金春秋)는 선덕왕의 동생인 천명공주의 아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선덕왕에게는 조카가 되는 셈입니다. 선덕왕이 632년에 즉위하였으니 곧 김춘추가 30세 되던 해였습니다. 만일 천명공주가 20세 때 김춘추를 낳았다면 공주의 나이는 이 해 50세 정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덕왕은 천명공주의 언니이니까 나이가 더 많았겠지요. 때문에 즉위 당시 선덕왕의 나이는 50세가 넘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통설입니다.

 

<삼국유사> 왕력편 선덕여왕조를 보면 그녀에게는 음 갈문왕(飮葛文王)이라는 남편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선덕왕은 왕위에 오를 당시 50대의 나이에, 이미 결혼을 한 적이 있었던 여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혼을 한 적이 있었다.’고 표현한 이유는 왕의 남편인 음 갈문왕이 일찍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시의 신라에서도 여왕이 출현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따라서 귀족들과 백성들에게 여자가 왕이 되어야만 했던 당위성을 납득시키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었습니다.

 

이제 <삼국유사> 선덕왕 지기삼사(知幾三事)조를 검토해 보겠습니다.

 

“(왕은) 나라를 다스린 16년 동안에 미리 안 일이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 당 태종(太宗)이 붉은빛, 자줏빛, 흰빛의 세 가지 빛으로 그린 모란과 그 씨 서 되를 보내 온 일이 있었다. 왕은 그림의 꽃을 보더니 말하기를 이 꽃은 필경 향기가 없을 것이다하고 씨를 뜰에 심도록 하였다. 거기에서 꽃이 피어 떨어질 때까지 과연 왕의 말과 같았다.

 

둘째,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 겨울인데도 개구리들이 많이 모여들어 3, 4일 동안 울어 댄 일이 있었다. 나라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왕에게 물었다. 그러자 왕은 급히 각간(角干) 알천(閼川), 필탄(弼呑) 등에게 명하여 정병 2천을 뽑아 가지고 속히 서교(西郊)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이 어딘지 찾아 가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것이니 엄습해서 모두 죽이라고 하였다. 두 각간이 명을 받고 각각 군사 1천을 거느리고 서교에 가 보니 부산(富山) 아래 과연 여근곡(女根谷)이 있고 백제 군사 5백 명이 와서 거기에 숨어 있었으므로 이들을 모두 죽였다. 백제의 장군 우소란 자가 남산 고개 바위 위에 숨어 있었으므로 포위하고 활을 쏘아 죽였다. 또 뒤에 군사 12백 명이 따라오고 있었는데, 모두 쳐 죽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않았다.

 

셋째, 왕이 아무 병도 없었을 때 여러 신하들에게 일렀다. ‘나는 아무 해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 속에 장사지내도록 하라.’ 여러 신하들이 그게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해서 물으니 왕이 말하였다. ‘낭산(狼山) 남쪽이니라.’ 그 날이 이르니 왕은 과연 죽었고 여러 신하들은 낭산 양지에 장사지냈다. 10여 년이 지난 뒤 문호대왕이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는데 불경(佛經)에 말하기를,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하였으니 그제야 대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 수가 있었다.”

 

지기삼사(知幾三事)라는 말은 세 가지를 미리 알고 있었다.’라는 뜻입니다. 즉 선덕왕은 신묘하게도 세 가지 일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의미가 되는 거죠. 선덕왕의 측근 세력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널리 퍼뜨림으로써 선덕은 이토록 신통하고 영명한 인물이므로 어지간한 남자들보다 뛰어날 뿐 아니라 군주로서의 자질도 충분히 갖추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파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참고로 첫 번째 이야기인 모란꽃 설화<삼국사기>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삼국사기>에는 그 시대가 선덕왕의 즉위 이후가 아닌 덕만공주 시절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이 다릅니다. 그리고 이 설화의 내용과는 달리 실제 모란꽃은 향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덕왕의 지근거리에서 그녀를 보필하면서 즉위 과정 및 재위 기간에 걸쳐서 왕의 든든한 힘이 되어준 친위 세력에는 누가 있었을까요? 이 점은 <삼국사기>를 통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겨울 10, 이찬 수품과 용수[용춘이라고도 한다.]를 보내 주와 현을 순무하게 하였다.” 선덕왕 4(635)

 

선덕왕은 재위 3년째에 이르러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고치는 등 사실상의 친정 체제를 구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듬해인 635년에는 김용춘(金龍春)을 각 주와 현에 보내어 왕을 대신하여 순행(巡幸)하게 합니다. 이 김용춘은 귀족들에 의해 폐위된 진지왕(眞智王)의 아들이자 진평왕의 사촌이었습니다. 또 왕의 여동생인 천명공주의 남편이기도 하였으므로 사사로이는 선덕왕의 제부였습니다.

 

왕은 재위 11(642)에 이르러 김용춘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김춘추를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냅니다. 이 때는 백제의 의자왕(義慈王)에 의해 신라의 대야성(大耶城, 합천)이 함락되고 김춘추의 딸인 고타소랑(古陀炤娘)과 사위 김품석(金品釋)이 백제군에게 살해당한 직후였습니다. 당시 신라는 수도인 서라벌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대야성의 함락과 지속적인 백제의 침공으로 인해 국가적 위기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에 선덕왕은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어 원병(援兵)을 요청하게 했던 것입니다. 김춘추가 급박한 상황에서 국왕을 대리하여 외국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그는 선덕왕의 근신(近臣)이었다고 할만 합니다.

 

한편 <삼국사기> 선덕왕 11년조에는 이런 기록도 있습니다.

 

“()유신을 압량주의 군주(軍主)로 임명하였다.”

 

압량주(押梁州, 경산)는 대야성이 무너진 상황에서 경주를 방어하는 마지막 저지선이었습니다. 이 곳이 함락된다면 그야말로 신라의 수도는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토록 중요한 지점을 방어할 책임자를 선택한다는 것은 전략이나 전술에 능하면서도 국왕의 절대적 신임을 받는, 실로 믿을만한 인물을 골라내어야 한다는 말과 같았습니다. 선덕왕은 여기에 김유신(金庾信)軍主로 임명합니다.

 

김춘추 부자나 김유신과 같은 사람들이 선덕왕의 측근에 들어왔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김춘추는 진골 귀족들에 의하여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였습니다. 진골 세력이 아니었다면 김춘추는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자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지왕이 강제로 퇴위됨으로써 김춘추와 김용춘의 기반도 무너지게 되었고 이렇게 하여 이들은 기존의 귀족 세력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품게 되었을 것입니다.

 

김유신 역시 금관 가야의 왕족 출신으로서 비록 신라의 진골 귀족으로 편입은 되었으나 외부에서 들어온 김유신 가문에 대한 기존 귀족들의 배타적인 태도와 텃세로 인하여 수많은 좌절을 맛보아야만 하였을 것입니다. 선덕왕은 재위 13(644)에 이러한 김유신을 신라의 관등 중 제 3위인 소판(蘇判)으로 임명하여 그에 대한 신임을 재확인합니다.

 

이처럼 선덕왕은 기존 진골 귀족 세력과는 차별되는 김춘추, 김유신 등 비주류 인사들을 측근에 끌어들임으로써 여성 군주라는 정치적 한계를 극복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왕에 대한 진골 귀족들의 반감은 매우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진평왕 53년에 이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여름 5,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이 반역을 도모하니 왕이 이를 알고 칠숙을 잡아 동쪽 시장에서 목을 베고 아울러 그의 구족을 처단하였다. 아찬 석품은 몰래 집에까지 왔다가 잡혀서 처형당하였다.”  <삼국사기> 진평왕 53(631)

 

이 기록에는 칠숙(柒宿)과 석품(石品)이 일으킨 반란의 사유가 무엇이었는지 나와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반역이 있었던 631년은 선덕왕이 즉위하게 되는 632년의 바로 전 해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때는 이미 진평왕이 차기 구도에 대한 고민을 끝내고 덕만공주에게 왕위를 넘기겠다는 결심을 굳힌 시기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칠숙과 석품이 일으킨 반란의 명분은 바로 ‘(부당하게도) 여자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하게 하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진골 귀족들의 여왕정서는 선덕왕 재위 기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특히 왕 12(643)에는 당 태종(太宗)이 신라에서 건너온 사신에게 너희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웃 나라로부터 경멸을 당하고 있으며 주인을 잃은 채 도적이 들끓고 있으니 편안한 세월이 없다. 내가 나의 친척 한 명을 보내서 너희 나라의 임금으로 삼겠다.”라는 말을 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백제와 고구려의 압력으로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던 신라로서는 당나라의 도움이 매우 절실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당나라의 황제가 너희 나라는 여자를 왕으로 삼아서 외국의 무시를 당하고 있으며 나라 사정도 평안치가 못하기 때문에 내가 너희 왕을 쫓아낸 뒤 나의 친척을 임금으로 삼겠다.’고 했으니 신라 조정에 일대 파란이 닥칠 수 밖에요.

 

고조되어오던 진골 귀족들의 동요는 결국 이렇게 폭발하고 맙니다.

 

“16년 봄 정월, 비담과 염종 등이 여왕은 정치를 잘못한다고 하여 군사를 동원하여 반역을 도모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정월) 8, 왕이 서거하였다.”   <삼국사기선덕왕 16(647)

 

역시 TV 드라마로 유명한 상대등 비담(毗曇)의 난이 이 때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용된 기사의 내용이 좀 분명치가 않습니다. 647년 정월에 반란사건이 터지기는 하는데 정확하게 어떤 날에 반역이 일어나는지가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선덕왕은 정월 8일에 승하하게 되는데 아마도 정부군과 반란군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상황에서 이제 70세를 바라보던 연로한 왕이 반란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절명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반역 사건은 김유신이 분전하여 곧 진압되며 주모자인 비담도 정월 17일에 처형됩니다.)

 

 

* 본 게시물은 2011년 5월에 프차에 업로드 되었던 것으로, 약간의 편집과 수정을 거쳐 다시 올렸다는 점을 알려드립니다. 참고 바랍니다.

https://dvdprime.com/g2/bbs/board.php?bo_table=comm&wr_id=21750992 

8
댓글
처키(Chucky)
2020-08-04 01:46:38

선덕왕이 재위에 오를 때가 거의 50세였군요. 드라마를 현실로 생각하는 거 절대 아니지만 드라마 선덕여왕은 거의 판타지였군요. 차라리 고현정이 선덕여왕을 하는 게...

어찌 보면 이성계같이 창업군주를 제외하면 역대 최고령 보위에 오른 왕이 아닐까요?

WR
중혼후
Updated at 2020-08-04 01:54:12

처키님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주 고대에 전설적인 왕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고이왕이 개루왕의 아들이라는 점입니다. 사서에는 백제의 제 4대 임금인 개루왕이 서기 166년에 붕어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이왕은 이 개루왕의 아들이니 그 출생연도는 아무리 늦게 잡아도 167년입니다. (개루왕이 사망하기 직전 고이왕을 갖게 되었다고 했을 때 임신 기간 10개월을 더하여 167년에 태어났다고 볼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이 분이 왕으로 즉위하게 되는 연도가 서기 234년입니다. 그러니 즉위 당시 나이가 이미 만 67세 정도 되었던 겁니다. 아시다시피 평균 수명이 짧았던 삼국 시대에 67살이면 오늘날의 나이로 80살은 훌쩍 넘는 셈일 겁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이왕은 장장 52년간이나 왕 노릇을 했습니다(234년 - 286년).

 

https://dvdprime.com/g2/bbs/board.php?bo_table=comm&wr_id=5826363

처키(Chucky)
2020-08-04 02:02:57

와우... 삼국시대야 기록의 정확함이 약간 문제는 있겠지만 60대에 왕으로 즉위한 경우도 있었군요. 어떻게 보면 저 당시는 60대라고 하면 육체적 건장함과 정신적 총기도 지금보다 떨어질 수 있었을 텐데요. 역사는 알면 알수록 재밌는 것 같습니다.

WR
중혼후
1
Updated at 2020-08-04 02:06:42

말씀하신것처럼 우리나라 기원 3~4세기 이전의 고대에는 역사기록의 체계가 틀잡히기 전이라 신화적, 혹은 설화적인 내용들이 많이 노출됩니다.

 

정말 고이왕이 70이 다 된 나이에 즉위해서 52년간 왕위에 있었다고 믿기는... 좀 어려울것 같습니다. 기록은 그렇게 되어 있지만 고대의 기록이란게 사료비판이 좀 필요한 부분이라서요. 

아서스
2020-08-04 05:29:50

고이왕이 족보조작을 했다는 설을 본 적이 있는데 그래서 그런거 아닐까 싶습니다.

WR
중혼후
1
Updated at 2020-08-04 05:32:20

의견 감사합니다.

참고 링크입니다.
 

https://dvdprime.com/g2/bbs/board.php?bo_table=comm&wr_id=20048533

세바스티아노
2020-08-04 04:15:49

유학이 들어오기 전에도 여성이 왕을 한다는 것은 녹록치 않은 현실이었군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링크 해주신 다른 글도 읽어봐야겠어요.

WR
중혼후
2020-08-04 04:16:48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댓글 남기기
로그인 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