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한잔] 구텐베르그 금속활자는 교황 사절단이 한국을 방문한 후 얻은 기술
엄청난 말이죠. 그런데 이 말의 출처가 국뽕 찌라시가 아니라 마국 부통령 앨 고어가 한 발언입니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는 한국에서 건너온 기술에서 비롯된 것이다.” 2005년 ‘서울디지털포럼’에 참석한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의 이 말은 국내·외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어는 “스위스 바젤 인쇄박물관에서 1377년 제작된 ‘직지심체요절’이 금속활자로 인쇄된 가장 오래된 서적이며, 한국이 구텐베르크의 1455년 인쇄술 발명을 78년 앞당겨 세계사를 다시 쓰게 되었음을 알게 됐다”고 했다.
그는 "독일의 구텐베르그가 인쇄술을 발명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서양의 교황사절단이 한국을 방문한뒤 얻어온 기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박병선박사님의 연구로 프랑스 국립도서관 구석에서 먼지를 맞고 있던 직지심체 요철이 구테베르그 금속활자보다 78년이나 앞선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라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죠. 직지는 한계는 분명했습니다.
고려시대 고활자 주조법은 대략 2가지로 구분됩니다. 그 하나는 고운 모래(뻘흙)를 이용한 주물사주조법이고 또 다른 방법은 밀랍을 이용한 밀랍주조법입니다. 이 방식은 완성도가 떨어지는 방식으로 알려져있씁니다. 주조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글자획의 굵기와 가늘기가 일정하지 않고, 어떤 글자는 기울어져 있고, 각 열이 곧지 못하고, 삐뚤빼뚤하고, 어떤 글자는 희미한데다가, 획수의 일부가 제대로 찍히지 않았으며, 어떤 데는 윗열의 글자와 아랫열의 글자의 획이 맞물려 있는 등 조잡한 오류가 많습니다. 이런 문제는 세종 때 갑인자가 조조되기 전까지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잉크 기술이 떨어졌고 활판과 종이를 조여주는 프레스 기술이 부족해서 대량 인쇄에는 비효율적인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직지를 최고 금속활자로 인정하지만 본격적인 금속활자인 프레스 방식은 구텐베르그 기술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직지심경에 대한 또다른 비판은 한국의 전근대 사회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기가 발명된 후 약 50여 년간 유럽 전역에서는 2천만권 이상의 책이 인쇄되었고, 1500년대 초반 50여 년간에는 독일에서만 6천만권 이상의 책이 인쇄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는 당대 유럽의 지성 세계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 사회에도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으며, 종교개혁과 대항종교개혁같은 급진적인 사상적 발전을 이끌어낸 배경이 되었다. 반면 한국에서 금속활자로는 하나의 책에 대해 적게는 10부, 많아야 80부 정도의 책을 인쇄하는데 그쳤으니 큰 반향을 이끌어 내었다고는 하기 어려울 것이다.
- 나무위키-
그런데 말입니다.
앨 고어가 구텐베르그 금속 활자가 교활사절단에서 한국을 방문한 다음 얻어낸 기술이라는 파격적인 발언을 한 것이죠. 한국에서 "직지코드"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당시 교황이 있었던 프랑스 아비뇽, 교활청들 다양한 장소를 방문하면서 직지와 구텐베르그 활자의 연관성을 조사합니다.
앨 고어의 발언인 "구텐베르크가 고려의 금속활자 설계도 및 아이디어를 전해 받았다"고 했다는 정보가 스위스 추딘 박사(전 스위스 바젤 종이박물관 관장)에게서 나왔음을 확인합니다.
구텐베르그 초상화를 보면 그는 동양풍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게다가 활자주조기가 고려의 주물사주조기구와 흡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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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베르그와 고려 금속활자와의 연결고리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는 다음 조사로 발견됩니다. 대구MBC 보도국 마승락 기자의 "구텐베르크, 고려를 훔치다."에서 나오는 내용을 인용해드립니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교의 활판인쇄전문연구원 올리비에 드로니용 박사를 만났고, 그의 연구 결과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드로니용 박사는 구텐베르크가 최초로 인쇄한 42행성서를 3D전자현미경을 이용하여 인쇄표면을 조사했으며, 그 결과 모래 알갱이 흔적을 발견했다. 이는 42행성서를 인쇄한 활자가 주물사주조법(鑄物砂鑄造法)으로 만든 활자를 이용했다는 증거이다. 또 42행성서 중 같은 페이지에 인쇄된 글자 ‘a’들을 조사해 본 결과, 그 모양과 형태가 각기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드로니용 박사는 이 결과 역시 주물사주조법으로 만든 활자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말한다. 즉 구텐베르크는 고려의 주물사주조법으로 만든 활자를 이용해 서양 최초의 인쇄물 42행 성서를 인쇄한 것이었다.
교황청 사료에서 또 하나의 재미있는 문서를 찾아냅니다. 로마 교황 요한 22세가 꼬레의 수케왕에게 보낸 편지에 베이징에 보내는 새 주교를 잘 부탁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꼬레의 수케왕이라면 고려의 충숙왕일 가능성이 높다는 가설이 등장힙니다. 하지만 편지의 내용으로는 꼬레가 로마와 베이징의 중간에 위치해있어 고려일 사능성은 낮은 것으로 결론이 납니다. (이 이야기는 김진명의 소설 직지에 나온 내용입니다.)
이상에서 상상력을 동원해보면 고려에서 발견한 금속활자 기술이 구텐베르그까지 전달이 되었고 이 기술이 중세 서양 세계의 변혁하는 기폭제로 사용되었다는 것이죠. 이것을 증명할 수는 없으나 가능성이 없다고는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중국도 어떻게 해서든 '직지심체요절' 이전의 금속활자본을 찾으려 눈에 불을 키고 있지만 발견 못하고 있죠. 1103년 발행된 '불설관무량수불경'(佛說觀無量壽佛經)을 금속활자본으로 주장했으나 금속활자가 아니라 찰흙활자가 사용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후 1341∼1345년 사이에 인쇄된 어시책(御試策)이 금속활자본이라 주장했으나 일본 정가당(靜嘉堂) 문고에 소장된 어시책의 원본을 확인한 결과 1341년 편찬된 목판본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중국으로서는 중국 금속활자 기술이 조선에 전파되었다고 주장하고 싶겠죠. 하지만 고려 활자의 구텐베르그와의 연관성이 높을 수록 중국이 끼어들 자리는 희박해지고 있습니다.
앨 고어는 금속활자에서 세계에 영향을 끼친 한국이 이제는 디지털에서 동일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문자와 기록에 미쳤던 조상님의 DNA가 내려왔기에 오늘날 한국의 위상이 있습니다.
PS. 저출산 문제만 어떻게 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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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김진명작가의 '직지' 재밌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