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첫 경험에 대하여: 시네이드 오코너
1.
저는 재즈를 꽤 오래 들어왔지만 아직도 제대로 듣는 귀가 뚫리지 않아서 편식을 하는 편입니다. 특히 보컬 음악은 아직도 그다지 자발적인 흥미가 돋는 장르는 아니죠. 그냥 재즈사에 깊은 발자국을 남긴 유명한 음반들만 조금 들어봤을 정도입니다. 이런 저에게도 예외가 있으니 바로 엘라 피츠제럴드의 음악들입니다. 엘라의 송북 음반들을 듣고 처음부터 사랑에 빠졌고, 동시대나 후대의 디바들의 음악을 조금이나마 성의있게 들었던 것도 전부 엘라 덕이었습니다.(물론 빌리 할러데이는 그 중에서도 예외입니다. 재즈 팬이라면 빌리의 음악을 단순한 호기심이나 의무감으로 들을 수는 없죠.) 그 중에서도 저는 엘라의 발라드 송북을 특히 즐겨들었는데, 또 그중에서도 가장 사랑했던 곡은 "bewitched bothered and bewildered"였습니다. 이곡을 처음 듣는 순간부터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왠지 모르게 친숙하고 노스텔지어를 불러일으키는 노래였습니다.
https://youtu.be/dtnrPXxhynI
2.
얼마전 작고한 시네이드 오코너는 제가 고등학생 시절 처음으로 음반을 구입했던 여성뮤지션이었습니다. 처음 음악을 들을 때부터 보통의 락키드들처럼 헤비메틀과 프로그레시브에 푹 빠졌기 때문에 여성 뮤지션이 강세인 댄스음악이나 차분한 발라드 음악에 관심을 가지기 어려웠죠. 특히 헤비메틀이나 프로그레시브도 보컬이 없는 인스투르먼틀 곡들을 선호했기 때문에 더더욱 여성 뮤지션들에게 관심을 가질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신문에서 시네이드 오코너에 대한 기사 한자락을 읽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1992년 오코너가 SNL에서 아동 성추행 등 카톨릭 교계의 범죄 은폐에 항의하며 당시 교황인 요한-바오로 2세의 사진을 찢은 돌발행동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어마어마한 파장을 불러왔고 그녀는 이후 살해협박을 받기까지 했다고 합니다.신문 기사 몇 줄로 사건의 내막을 잘 알 수는 없었지만, 아일랜드가 카톨릭 전통이 강한 나라이고, 때문에 그 나라 출신 대중음악인으로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할 것이라는 추측을 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 시절 시네이드 오코너는 유명했습니다. 이미 2집 앨범이 워낙 히트를 쳐서 전세게적인 스타였고 당연히 저도 이름과 얼굴 정도는 알고 있었죠. 그러나 신문 기사를 읽고 갑자기 큰 관심이 생겼습니다. 특히 U2와 게리 무어 때문에 막연히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아일랜드 출신이라는 것이 어떤 환상을 가지기에 충분했죠. 저는 며칠 후 용돈을 받고 음반점에 가서 시네이드 오코너의 음반을 하나 구입했습니다. 사실 저는 2집인 "I Do Not Want What I Haven't Got"을 사려고 했었어요. 하지만 정확한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앨범 제목 조차 몰랐기 때문에 그냥 가게에 있는 유일한 시네이드 오코너의 음반을 사가지고 나왔습니다. 그게 바로 그 해에 발매되었던 "Am I Not Your Girl?"이었습니다. 앨범 재킷의 첫 인상은 강렬했습니다. 머리를 짧게 깎고 아무 장식이 없는 짙은 색의 꼭 달라붙는 운동복차림으로 쩍벌 자세로 허리를 굽히고 있는 모습은 도발적이었습니다. 저는 이 음반이 저항으로 똘똘 뭉친 여성 락커의 음악으로 가득채워져있길 기대했죠.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이 음반을 그렇게 많이 듣지는 않았습니다. 음반은 제 기대와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전혀 관심도 없고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던 빅밴드 스타일의 인트로 곡으로 시작해서 계속해서 재즈와 재즈 크로스오버 곡들이 이어졌습니다. 그래도 당시에는 음반 가격도 만만치 않아서 한 번 산 음반들은 최소한 열 번 이상은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음반을 다시 플레이어에 걸고 싶으면 꼭 듣고 싶은 곡이 최소한 한 곡은 있어야죠. 안타깝게도 그렇진 못했습니다. 점점 오코너는 제 뇌리 속에서 잊혀졌고 앨범의 곡들도 전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속삭이듯 마음을 위로하는 음색은 기억에 남았습니다.
3.
시네이드 오코너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그 뒤로 7년이 더 지나서였던 것 같습니다. 오코너의 음악을 더 들어볼 기회는 없었지만 꾸준하게 그녀의 개인사에 관한 소식은 어떤 경로로 전해들었던 것 같습니다. 개종을 했다고나 하는.... 그러다 우연히 닐 조던 감독의 "푸줏간 소년"이란 영화에서 그녀가 성모 마리아 역으로 출연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꼭 그 영화가 보고 싶었습니다. 특히 푸줏간 소년이 사회에서 소외되고 아직 어린 나이에 도살장에서 일하게 된 소년이 여러 명을 살해하게 되는 내용이라는 것을 알고 더욱 보고 싶었습니다. 아마도 소년의 구원에 관한 내용일텐데, 여기서 그녀가 맡은 역할은 그녀 자신에 대한 구원의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시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동한 그토록 격렬한 내적 갈등을 겪었던 오코너의 마음이 편한해진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 영화는 아주 훌륭했고 저는 영화 말미에서 그녀의 모습을 보고 기뻤습니다. 청소년 시절 느꼈던 어떤 안타까움이 해소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을까요?
4.
그 이후로도 시네이드 오코너의 음악은 제 관심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호감은 있었으나 더 알아갈 기회 없이 잠깐 스쳤던 옛 친구의 소식을 찾는 것 처럼, 그녀의 소식들은 우연하게 늘 제 귀와 눈에 와 닿았습니다. 하다하다 무슬림으로 개종했다는 이야기도 들은 것 같고, 이혼했다는 이야기, 아들이 자살했다는 이야기 등등.
저는 그 동안 모던 재즈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되었고, 빅밴드 재즈의 매력을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위에서 말한 대로 엘라의 매력에도 빠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bewitched bothered and bewildered"라는 곡을 너무도 좋아했기 때문에 유튜브로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고 나서는, 이 곡을 여러 버전으로 들어볼 수 있었죠. 그 때 알았습니다. 내가 고등학교 때 샀던 바로 그 앨범에서 오코너가 이 곡을 불렀다는 것을. 그래서 그 곡이 그렇게 친숙하게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는 것을. 그리고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바로 그 앨범이 내 첫 번째 재즈 앨범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앨범을,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은 그 앨범을 유튜브로 죽 들어보면서 아일랜드의 정서가 재즈와 너무도 잘 어울린다는 것도요. 이 앨범은 전문 재즈 싱어들과 비교해도 전혀 뒤질 것이 없는 아주 훌륭한 작업물이었습니다.
https://youtu.be/3BJ8SXlyxR0
그 음악의 진가를 알게 된 것은 아주 많은 세월이 흐른 뒤였지만, 아마도 그 알아채지도 못한 첫 경험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다시 자각되기를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겠죠. 그녀의 연약함과 우울감을 감춘, 사나운 척하는 눈동자에 건배를, 이제는 모든 신들의 품 안에서 안식을 찾았기를.
*
"bewitched bothered and bewildered"의 재즈 명연은 너무나 많습니다. 좀 한다하는 스탠더드 곡들이 다 그렇지만, 싱어들은 모두 이 곡을 녹음했고 전부 출중합니다. 그래서 그 곡들을 추천하기 보다는 오히려 이색적인 변주들을 소개해볼까 합니다. 첫 번째는 ELO의 제프 린의 노래입니다. 제프린 특유의 화성이 잘 녹아있어서 풍성한 느낌을 주면서도 컴팩트한 곡입니다.
https://youtu.be/MWT321SWgAE
또 한 곡은 재능이 넘치는 레이디 가가의 편곡입니다. 가가의 재즈에 대한 애정과 실력은 너무 깊숙하게 숨겨져 있습니다. 그녀가 공연의 비주얼적인 파격 측면때문에 일부러 곡을 대중적이고 쉽게 쓴다는 루머는 사실이겠죠.
https://youtu.be/f_IYAvaa8cU
재즈 연주는 여기서 소개하지 않으려 했지만 브래드 맬다우의 연주는 예외여야 할 것 같습니다.
https://youtu.be/cREkVI1M2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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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재즈 보컬은 사라 본으로 시작해서 엘라로 정착했습니다. 물론 말씀하신대로 빌리는 다른 차원이고요.
제가 페북에서 팔로우한 뮤지션 2명 중 하나가 엘라 피츠제럴드의 페이지입니다.
30분 전에 엘라 페이지에 올라온 곡은 Hard-Hearted Hannah네요.
이렇게 가끔 페북에 올라오면 소소히 즐기는 맛이 있습니다.
오늘 올려주신 글도 그렇고요.
오코너 음색이 참 잘 어울리네요. 잘 들었습니다.
https://youtu.be/kdb--NSa_k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