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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역사 다시 돌아보기] 1950년 6월 28일 한강다리 폭파 : 국가 부재라는 폭력 @문화과학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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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4-02-23 00:06:06

이승만 이라는 인물이 요즘 다시 뜨겁습니다. 왜죠? 그렇게 인물이 없나요? 

 

(한국전쟁) 침략을 당한 것 까지야 침략자에게 이유를 물을 수 있다 쳐도...

전쟁에서 이기고 있으니 파난 가지말고 기다리고 있으라 하면서...

피난 가기위해 건너야 할 다리를 끊어버리고...

그런 사람을 건국의 아버지니 애국자니 추켜세우고... 

 

전쟁 시작 하자마자 일찌감치 피난 갔던 일도,

정작 방송으로는 우리가 이기고 있다는 '가짜 뉴스' 퍼뜨린 것도,

또 피난 갈 수 있는 몇 안되는 길목인 한강대교를 폭파 시킨 것도,

심지어 수복 후  그 짧은 기간 동안 침략자에게 부역했던 시민들을 강제 색출했다던 그 일 까지도...

기성세대 라면 대체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남았습니다.

"한강대교 폭파하라는 명령 내린 것이 '이승만' 이 아니라면서요?" 라는 질문을 받을 날이...

어쩌면 이곳 DP 프차에서도 받게 될 날 올 겁니다. 

 

그래~~서!

다시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그렇다고 사료를 모으고 분석하고 요약하는 그런 정도의 활동을 하지는 못하고, 다만 '논문' 수준의 객관적인 글 속에서 '사실'과 '진실'을 착아보는 소소한 작업을 말이죠...

 

발췌 : 문화과학 113 / 특집 : 애도와 책임. 10.29 이태원 참사

 

"사회적 참사가 일깨워준 감각 : 건국신화 없는 나라의 반복되는 국가폭력"

최성용 / 성공회대 동아시아 부설 냉전평화연구센터 연구원

 

 

(중략)

4. 건국신화 없는 나라의 건국신화

 

  1) ‘국가 부재’라는 폭력의 원체험

 

  세월호 참사 직후, 많은 이들이 국가에 의해 버림받고 배신당한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그 기억들은 현대사 내내 반복되었던 대한민국의 국가폭력이라는 그림자가 의식 위로 떠오른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해방 전후와 한국 전쟁기, 즉 국가 건설(nation-building) 시기의 역사적 경험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원형적 체험으로서 중요하다. 익히 알려진 서사를 언급하자면,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6월 27일 밤 9시경 이승만 라디오 특별방송이 있었다.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십시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국군의 총반격으로 적은 퇴각 중입니다. 우리 국군은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할 것입니다” 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당시 북한군은 의정부를 점령하고 서울로 진출하고 있었으며, 이승만은 이미 대피하여 대구에 다다랐다가 다시 대전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서울에서도 포격 소리가 들리는 와중에 육군본보가 시흥으로 남하하면서 서울에 있던 시민들은 불안에 떨었다. 하지만 이승만의 특별방송은 불안과 의심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이 서울에 잔류하도록 만들었고, 28일 새벽 2시 30분경한강대교가 폭파되면서 피란길이 막혀버렸다.

 

  이 서사는 여러 자료와 연구에 따르면 확실치 않은 사설이나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당시 특별방송의 대본이나 녹음자료 원본이 존재하지 않아, 주로 방송국 관계자의 회고에 근거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미국 CIA 해외방송정보국에서 이승만의 특별방송을 청취해 기록한 자료가 발굴되었고, 거기에는 의정부 전투에서 북한군을 막지 못했지만 곧 미군의 지원이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다만 27일 오후 1시 및 4시 라디오 방송은 국군의 의정부 탈환과 정부의 수도 사수‘가짜 뉴스’를 보도했으며 이 역시 반복 방송되었는데, 따라서 서울시민들이 이 방송을 당일 이승만의 특별방송 내용이라고 혼동했을 가능성이 높다(10) 또한 한강대교 폭파를 지시한 결정권자가 누구인지는 여전히 논란이 있지만, 이승만에 의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중론이다.

  하지만, 이 서사가 정확하지 않은 사실관계에도 불구하고 집단기억으로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당시의 사건은 대한민국이라는 신생국의 도덕적 파산에 대한 강렬한 원초적 체험이었을 것이다. 그 체험은 세월호 참사나 이태원 참사처럼 한 사회의 근본적 모순을 직관적으로 꿰뚫는 것이었다. 김성칠은 27일 당시 방송을 듣고 국가와 지배층의 몰도덕을 한탄했다. “이 어려운 시절 막다른 판국에 있어서 국가의 공식 발표를 믿지 못하는 내 마음이 슬펐다. 나라고 개인이고 간에 언제나 바른말을 해야 할 것이고 일시의 편익을 위하여 허위의 길을 밟는 것은 이 곧 자멸의 길과 통하는 것임을 새삼스레 느끼었다.(11)

  이러한 도덕적 무정부 상태에서 사회적 권력관계는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전쟁이 발발하자 정부의 고위 공직자를 비롯해 한국의 지배층 다수는 빠르게 피난했고, 일부는 일찌감치 미국에 유학을 보내는 식으로 자녀의 전쟁 참여를 피하기도 했다. 미국의 경우 6월 28일 재한미국인들을 일본으로 대피시켰다. 반면 남겨진 시미들은 사실상 국가의 기만과 가짜 뉴스에 의해 버림받았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전쟁 발발 직후의 피란은 매우 계급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12)

(중략)

 

(10) 장영민,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라디오 특별방송 관련 자료}, [한국근현대사연구] 67집, 2013, 980-1001

(11) 김성칠, [역사 앞에서: 한 사학자의 6.25일기], 창비, 2009, 77

(12) 김동춘, [전쟁과 사회: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돌베개. 2006, 163.


PS.

글의 일부를 제가 직접 타이핑 한 것으로, 내용의 사실여부의 책임은 저자에게 있습니다.

만약 윗 글의 내용에 문제가 있다면 언제든 지적 바랍니다. 그것은 환영합니다.

이승만과 그의 무개념적 지지자들을 비판하기 위해서 최소한 이 정도의 이해는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옮긴 것입니다.


님의 서명
진리는 우리를 자유하게 할 것이다.
Veritas liberabit vos.
ἡ ἀλήθεια ἐλευθερώσει ὑμᾶ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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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Updated at 2024-02-23 01:51:17

 

이승만은 송건호 선생의 '해방의 민족사적 인식'이라는 논문에 영원히 박제되어 있습니다. 

'현실인식의 논리(사계절)' 4부의 네 번째 꼭찌와 해방전후사의 인식(한길사) 1권 첫 꼭지로 실려 있습니다.

https://youtu.be/YJUi3kfE-M4?si=CAz9_bM-7gucY2AV

WR
Updated at 2024-02-23 08:08:25

는에 보이는 것만 읽고 끝내려했는더.. 딱 걸렸네요

2024-02-23 07:33:59

송건호 선생이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셨더군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은 정말 참입니다.

2024-02-23 07:26:55

저도 최근에 다시 읽고 있습니다.

2024-02-23 07:30:55

멋지십니다.

WR
2024-02-23 08: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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