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한잔] 미국의 고등학교에서 학생들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방법 하나
DP 회원님들 중에도 학부형 분들이 많이 계시겠지만 저의 친구들을 통해 듣는 한국의 학업에 관한 스트레스는 학생들 뿐만이 아니라 부모들에게도 적지 않다고 들었으며 이러한 스트레스를 해소할 어떤 제도적 장치에 관하여서는 특별히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는 이곳 미국에서 오늘 겪은 일 하나가 있어 한번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저의 딸아이는 미국식 학제로 12학년까지 있는 공공교육 시스템에서 현재 11학년이라 한국으로 치면 고2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딸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수업료가 없는 공립학교임에도 불구하고 사는 곳에 따라 배정되는 일반 공립학교와 달리 시험을 치고 들어가는 학교인지라 나름 교과과정도 빠듯한 편이고 각종 숙제들이 많은데다가 선택활동으로 시즌에 따라 축구와 농구를 하고 있는 탓에 매일 연습이 있거나 홈 또는 원정 경기가 있어서 집에 귀가 시간이 늦고 그 후로부터 각종 숙제와 프로젝트를 하느라 때로는 새벽 4-5시까지도 깨어 있을 때가 많아 가끔은 안스러운 생각이 듭니다. 지 오빠는 맨날 축구하고 와서 잠만 자는 것만 봤는데 말이죠.
그런데 이번 주는 딸아이가 좀 이상합니다. 일단 학교에 등교를 평소보다 1시간 늦게 하는데 이건 뭐 가끔씩 선생님들 연수가 있다거나 그럴 때면 있을 수 있는 일이라 그렇다 쳐도 저녁 9시에 친구를 만나러 나가지를 않나, 밤늦게 자기 방에서 음악이나 동영상을 보고 있지 않나 좀 이상합니다. 평소에는 절대로 저녁식사 후에 집 밖에 나가지를 않고 그럴 시간도 없거든요.
"요즘 제 왜 저래? 무슨 일 있어?"
빵점짜리 아빠로 집안에서 내놓은 저의 질문에 아내는 오히려 왠일이냐는 듯이 설명을 시작합니다. 이번주가 딸아이 학교 Agora Day (아고라 데이)라고 얘기를 시작합니다.
아고라?? 그건 다음에서 시국관련 글 올라오던 곳 아닌가? 하는 생각을 속으로만 했습니다. 입 밖으로 냈다가는 가뜩이나 아재인 제가 더 아재티를 낸다고 아내에게 쿠사리를 받을까 해서요.
차근 차근 설명을 들어보니 매년 있었던 일이라고 하는데 바로 학기 중에 한 주를 정해서 그 일주일간은 일체 학업에 관련된 것을 없애버리고 그야말로 학교를 즐거운 곳으로 만드는 이벤트랍니다. 학생이나 선생님, 혹은 학부형들이 미리 갖가지 다양한 주제로 자기가 수업을 하고 싶다고 신청을 하면 학생들이 그 중 맘에 드는 것을 찾아서 듣고 또한 활동이 학내에만 한정되는게 아니라 필요에 따라 맘껏 외부활동도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주일간 학업이 중단되고 같은 반 친구, 선배, 후배 혹은 친구 부모가 진행하는 fun event 만 학교에서 계속되는 것입니다. 축제와는 달리 주제는 완전히 다르지만 수업은 여전히 진행되고 등하교만 좀 더 널널하게 되는 것이랍니다.
오호라, 이거 신박한 아이디어일세!!
2층에 있는 딸아이를 소리쳐 불러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양 물어봅니다.
"얘야, 너 아고라 데이지? 너는 어떤 클라스를 신청해서 듣고 있니?"
조금전까지 밖에서 친구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온 딸아이는 약간은 시큰둥하게 '밀크 쉐이크' 와 '비욘세' 그리고 '자원봉사' 등등을 듣고 있다고 대답해 줍니다.
"비욘세?? 그럼 그 수업은 비욘세에 관한 것만 다루는 거냐?"
그렇답니다. 수업내내 비욘세에 대하여 잘 아는 아이가 비욘세에 관련된 것만 이야기 하는 모양입니다. 밀크 쉐이크 클라스는 밀크 쉐이크 만들고 거기에 대한 얘기를 할거라는 짐작이 자연스럽게 가고 아내의 도움으로 '자원봉사' 클라스 덕분에 학교 밖의 다른 초등학교에 가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딸아이는 이번 주 매일 학교에 가서 평소에는 상상도 못하는 황당한 과목들을 듣고 있으며 숙제나 프로젝트 부담없이 저녁이면 이런저런 이벤트를 만들어서 놀고 있으며 그간 쌓인 학업의 스트레스를 마음껏 풀고 있습니다. 물론 다음주 부터는 다시 빡빡한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봄방학이나 추수감사절 휴가와는 또 다른 학교에는 다니고 있으나 매우 엉뚱한 일을 하는 이런 획기적인 이벤트가 여러가지로 나름 스트레스가 쌓여있을 학생들에게는 매우 좋은 스트레스 발산의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일이면 좀 미리 알려주지' 하고 툴툴거리며 이메일을 열어보니 벌써 몇주전부터 학교에서 보내온 아고라 데이 관련 이메일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습니다 학부형으로 성의가 없으니 그간 보이지 않았었나 봅니다.
물론 한국에서도 이러한 멋진 이벤트들이 이미 있는지도 모를 일이고 어쩌면 미국의 많은 학교에서도 이미 시행하고 있을 수 있는 일이나 막상 나름 오랫동안 미국에서 자녀들을 키우고 교육시켰음에도 그동안 무지했던 저를 반성하기도 하고 나름 신기한 마음에 몇자 적어보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암울하기만 했던 중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라 살짝 딸아이에게도 질투가 나기도 합니다.
내일은 또 어떤 황당한 수업을 듣고 오는지 꼭 물어봐야겠습니다. 은근 기대가 됩니다. ^^
글쓰기 |
먼 나라 교육제도에 듣기만해도 힐링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