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한잔]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잘한 일...
우선 본론에 앞서 밝힐 점이 하나 있는데, 저는 남자입니다. (오래전에 DP 가입하고 처음으로 썼던 놀란 감독 관련글에서 이미 밝힌 적은 있었지만, 아무도 아는 분 없을거라 생각해서...) 어차피 눈팅 위주로 활동할거라 재미삼아 마눌님 닉넴을 만들었는데, 마눌님 닮은 사진 찾아 프사 만든 것도 아깝고해서 변경없이 계속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부산에서 태어나 지금까지도 경상도에서 생활터전을 벗어나지 못한 경상도 토박이이자, 태어날때부터 지금까지 노력해도 변함없는 흙수저입니다. 경상도사람에다 가진것없는 서민답게 말이 거칠고 O형이라 욱하는 성질도 있지만, 남한테 피해주는 일을 가장 싫어합니다. 그래서인지 남일에도 그다지 관심이 없고 잔정이 없습니다. 국민학교때 박정희 암살사건도 겪었고, 데모가 난무하던 전두환 시절에 대학도 다녔습니다만, 저하고는 별 상관없는 일들이었습니다.
'정치에 관심없다'라는 말을 하면 이곳 DP에선 비겁한 변명으로밖에 읽히지 않는다는것 잘 알지만, 저는 정말 정치에 관심없고 무지한 사람이었습니다. 국민학교때부터 신문이 오면 극장영화광고와 맨뒷장의 TV편성표에서 주말의명화와 토요명화에 무슨 영화가 방영되는지 확인하는게 전부였을 정도로 영화광이었고, 고등학교때는 클래식음악에 미쳐서 저녁내내 라디오 앞에 앉아 FM클래식 방송을 들었습니다. 제 관심사는 그저 영화와 음악, 그리고 추리소설 위주의 문학이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10년 넘게 알라딘 플래티넘 회원입니다. 술이나 다른 취미활동이 없기때문에 저의 용돈지출은 책구매가 대부분입니다.
부작용은 있었습니다. 사람들과 모이는 자리 등에서 정치얘기 나오면 저는 꿀먹은 벙어리가 됩니다. 정치인 이름을 거의 모르고 당시의 이슈도 모르니 도대체 무슨 얘긴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럴때 제외하면 딱히 불편함도 없었지요. 그런데 그 관심없는 와중에도 은연중에 제 뇌리에는 어떤 정치적인 시각이 저도 모르게 서서히 스며들었던 것 같습니다. 예를들면 이런 것이었지요. 우리나라가 이렇게 비약적으로 경제발전한 것은 어쨌거나 박정희 덕이었잖아... 전두환 시절이 그나마 살기 좋았어... 하여튼 조선놈들은 풀어놓으면 안돼... 물태우같으니라고... 저 전라도띠기들 때문에 나라가 안돼... 김대중이 정권잡으면 빨갱이세상된다니까... 영삼아, 영삼아... 쯧쯧... 노무혀이가 무신 대통령감이라고...
어른들의 이런 지나가는 말들이 저도 모르는 사이 저를 꼰대로 만들어버렸습니다. 89학번인 제가 대학입학했을 당시에는 데모가 거의 막바지단계였습니다. 등교길에 보도블록 깨던 선배들도 심심찮게 보았고, 최루탄 가스냄새도 몇번 맡았죠. 학생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에라이... 저는 그런 생각을 하며 한심하게 쳐다만 봤습니다. 광주학생운동? 그런거 몰랐습니다. 민중가요만 나오면 짜증이 치밀었습니다. 오히려 존 콜트레인이나 마일즈 데이비스의 재즈세계에 새롭게 심취했죠. 여전히 신문과 뉴스에 담쌓고 지냈으며, 문화, 예술분야에만 관심을 쏟았습니다.
투표는 마지못해 대통령 선거때만 했습니다. 지역총선같은건 당연히 패스였습니다. 누가 나오는지도 몰랐고, 어차피 그놈이 그놈일뿐... 지금도 저는 제 지역구 의원이 누군지 모릅니다. 노태우 때는 투표를 했는지조차 기억이 없습니다. 김영삼 나올때는 김영삼 찍고, 김대중 나올때는 김대중 찍고... 그냥 될것같은 사람 아무 생각없이 찍었습니다. 한표차이로 당락이 결정될 것도 아닌데 무슨 대수란 말인가... 노무현 때는 이회창 찍은것 같습니다. 이회창이 더 정치인다운 외모라서... 그 전에 전두환 청문회가 전국민적인 화제가 되었을때, 노무현이 청문회 스타로 각광받은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작 그런 후광으로 대통령 후보까지 나오는걸 보고, 얼마나 인물이 없으면 저런 사람을 내보내나 싶었죠.
대통령 한번 해먹을라고 평생을 정치판에 바쳤던 김영삼이나 김대중도 결국 별거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식들때문에 똑같이 말년에 비난받으며 퇴장하고... 역시 그놈이 그놈이었습니다. 노무현이 대통령되었을때 한가지 기분나빴던 점은 당선후 첫 국회연설때 국회의원들이 기립박수를 안하고 띠꺼운 표정으로 앉아서 쳐다만 봤다는 거였죠. 어찌됐든 국민이 선택했으면 존중하고 예의를 갖춰야지, 저 호로새끼들은 도대체 뭐야? 저는 정치는 몰라도 기본적인 예의가 없는 놈들은 인간취급 안합니다. 어쨌든 역시나 노무현 시절도 대통령이 있기나 한건지 싶을 정도로 아무 변화 없더군요. 제 삶은 여전히 하루 15시간을 일하고도 세금떼고 100만원도 안되는 월급명세서를 받아쥐고 서러움에 북받혀 뜨거운 눈물을 쏟아야만 했던 흙수저 인생일 뿐이었습니다.
이명박이 나올때는 또 이명박 찍었습니다. 뭐 서울시장때 청계천공사도 하고 나름 추진력이 있어보여서 였습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이노무 정치판은 윗대가리 바뀐다고 달라질게 아니었던거죠. 그밑에 있는 떨거지들이 여전히 그나물에 그밥이니 변화가 없을수밖에... 어느날 아침 난데없이 노무현 서거소식... 아니 고향 내려가서 잘 살고계셨던 분이 갑자기 왜... 저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고 안타까운 마음만 들었습니다. 재임시절 탄핵이니 뭐니 국회의원들에게 늘상 공격만 받고, 못해먹겠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피곤한 시절 보내다가, 퇴임후에 오히려 인기가 올라가서 행복한 전원생활 보내는 모습이 좋아보였는데...
박근혜... 네, 또 박근혜 찍었습니다. 상대후보로 나온 문재인과 지금은 이름도 기억안나는 여자후보는 제겐 그냥 듣보잡일 뿐이었습니다. 아는 사람이 박근혜 뿐이었습니다. 결정적으로 TV토론때 그 여자후보가 당신 떨어뜨리러 나왔다느니 하는 어이없는 깐족 개소리를 듣고 곧바로 욕이 튀어나왔습니다. 어디서 굴러먹던 개뼉다구가 예의도 없이... 그때 제가 느낀 감정은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이곳 DP에는 정치관련글을 한번도 올린적이 없었는데, 그날따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뚜껑이 열릴 정도로 화가 나서 프차에 제발 박근혜 당선되서 저 여자 좀 박살냈으면 좋겠다는 글을 올려버렸죠. 저랑 같은 느낌을 받은 회원분들이 있을거란 기대와 달리, 이제 커밍아웃하느냐 따위의 수구꼴통으로 몰아가는 댓글들로 순식간에 도배가 되더군요. 어라, 이게 아닌데... 기본적인 예의에 대한 문제가 정치성향으로 변질되는 모습에 짜증이 났습니다. 이 또라이새끼들은 사람 글을 제대로 읽기나하고 댓글을 다는건가? 바로 글삭제해버리고 한동안 DP 끊어버렸습니다.
본의아니게 제가 썼던 글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박근혜 당선후 그 여자는 바로 찌그러지더군요. 속으로 꼬시다 했습니다. 어쨌든 박정희 딸이니까 그래도 뭐 아버지한테 배운거는 있지않겠어? 이런 부질없는 기대와 함께 그렇게 또 세월은 흘렀습니다. 여전히 변함없는 나라, 여전히 변함없는 흙수저 인생... 에라이...
그러던 어느날 제 인생에 작은 폭탄이 떨어졌습니다. 최순실게이트... 이게 무슨 말인가... 이 나라를 박근혜가 아닌 개듣보잡 여편네가 꾸려갔다는 믿을수없는 사건... 저는 정말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속속 드러나는 소설보다 더 황당한 사건들... 이후 이곳 DP에서도 수많은 정치관련글들을 읽으면서 그동안 제가 관심없다는 핑계로 외면했던 진실들을 하나씩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문재인이 누군지도, 노무현이 어떠했는지도... 한나라당을 필두로 한 정치 개새끼들... 그리고 가장 악질 중의 악질인 언론 X새끼들...
저는 지금까지 그냥 세뇌당한 병신같은 인간일 뿐이었습니다. 정치 개새끼들이 이용하기 딱 좋은 그런 부류의 인간일 뿐이었던 거죠. 천성이 착해서 자신의 비루한 삶에 대해 국가나 사회를 원망하지도 않고 그저 내탓이오 하기만 할 뿐, 물에 물탄듯 술에 술탄듯 좋은게 좋은거라며 애써 자위하며 꾸역구역 살아가는 먹이사슬 최하층 인간... 나이만 어른이고 머리속은 어린애에 불과한 한심한 인간...
제 나이 곧 50을 바라보면서 처음으로, 정말 처음으로 제 스스로 선택해서 찍은 대통령이 문재인입니다. 선거날 아침 집사람 깨워서 설레는 마음으로 투표장에 갔더랬죠. 그리고 지금은 제가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가끔식 열이 뻗쳐서 자한당 개새끼들 욕할라치면, 집사람이 당신은 그럴 자격없다고 핀잔줍니다. 당신은 박근혜 찍은 양반이잖아... 라고...
어제 문통이 김정은과 같이 있을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질더러운 사고뭉치 동생이 가출해서 폭력이나 일삼다가 자기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뒤늦게 깨닫고 외로움에 홀로 서성일때, 아무 말없이 손잡아주는 형의 모습같다는...
집사람에게 날 따뜻해지면 언제 한번 봉하마을 가보자고 했습니다. 흔쾌히 그러자더군요. 불과 1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을 왜 이제서야... 참으로 먼 길을 돌아왔군요... 아마도 가까운 시일 내에 가보게 될 것 같습니다... 가면 눈물이 나올것 같지만...
[블로그] https://blog.naver.com/joonjoo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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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드립니다.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르다고 하죠.
잘 오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