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VER HEALTH CHECK: OK
자동
ID/PW 찾기 회원가입

[차한잔]  북쪽의 관념 - 글렌 굴드

 
10
  826
Updated at 2021-08-29 11:04:44

 

 

더워도 너무 덥습니다. 

 

그래서 다른 글에 댓글 장난 치다 생각난 오디오/ 비디오 클립 몇개를 링크해볼까 해요. 

바로 캐나다의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가 캐나다 공영방송국(CBC) PD로 근무할 때, 만들었던 북쪽의 관념(Idea Of North)라는 라디오 다큐와 굴드 자신이 등장하는 영상을 입힌 것입니다. 

 

굴드는 눈부신 테크닉과과 독특한 해석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였지만 자신을 전문 연주가에 한정시키는 것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그는 작곡가였으며, 비평가였고 또한 자신의 음악 프로그램과 다른 교양물을 제작하는 라디오 방송국의 PD이기도 했습니다. 굴드는 현재로 따지면 저스틴 비버에 버금가는 캐나다의 국보급 존재였으므로, 캐나다 정부에서는 굴드를 정부 요인처럼 대우했습니다. 냉 전 후 러시아를 방문한 최초의 서방 연주자였고 캐나다 공영 방송국에서는 그를 사장을으로 내정할 계획을 세우기도 할 정도였죠. 50도 안된 나이에요.

 

그래서 굴드는 젊은 시절부터 방송국 특채피디로 자신이 감독하는 프로그램의 예산과 제작 전권을 가진, 매우 예외적인 대우를 받는 존재였습니다. 때문에 그는 프로그램도 자신의 영감에 따라 매우 자유분방하게 제작할 수 있었죠. 이 "북쪽 관념"이란 제목의 라디오 다큐는 약 한시간 남짓한 분량으로, 굴드의 캐나다의 추운 기후와 무채색 풍경에  대한 사랑이 응축되어있는, 구형 에어컨 느낌이 나는 작품입니다. 

 

 원래 이 작품은 약 40분 남짓한 분량으로 계획되었지만, 굴드가 늘 그랬듯이 그의 완벽주의적 성향 때문에 예산과 시간을 한참 초과하게 되었습니다. 굴드가 절대 버릴 수 없다고 고집을 피운 분량이 90분이 넘어갔으므로 방송국에서 굴드를 아무리 특별대우를 한다고 한들, 건조하고 난해한 다큐를 계획의 두배나 늘려 송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굴드는 여기서 또 자신의 괴짜적 면모를 한 껏 드러내는데요, 그걸 차례대로 내보낼 이유가 무엇인가.

 

 굴드는 애초에 선율 중심의 근대 음악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바흐까지의 다성 음악을 음악의 정수로 생각했습니다. 극히 화성 중심으로 발달한 유럽 고전음악전통을 생각해보면 자연스러운 생각이기도 했죠. 굴드가 특별히 좋아했던 형식은 그렇게 여러 성부가 교차하고 맞물리면서 조화를 이루는 푸가였습니다. 

 

그래서 굴드는 이 다큐를 일종의 푸가처럼 만들기로 합니다. 3명의 나레이터의 말을 카페에서 여러 사람의 말 소리가 섞이는 것처럼 동시간 믹싱으로 녹음을 하자는 것이었죠. 실제로 굴드는 극도로 사람을 피했지만, 가끔 혼자 커다란 외투에 몸을 숨긴 채로 어둑한 카페에 들어가 여러 사람들이 동시에 말하는 것을 엳든는 취미가 있었다고 합니다. 굴드는 인간이 소리가 섞여도 푸가를 듣는 것 처럼 그 낱낱을 전부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객했어요. (하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죠.)

 

사실 굴드는 현대 미디어연구의 최고봉이었던 캐나다의 학자 마셜 맥루한과도 친분을 가지고 서로 의견을 교환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래서 늘 새로운 미디어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연구했고, 미디어를 통한 적극적 변조 내지 왜곡을 음악에서나, 자신의 라디오프로그램에서나 모두 거부감 없이 즐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굴드는 굉장히 민감한 사람이어서, 원색 같은 강렬한 자극을 견딜 수 없었다고 합니다. 찰스 다윈에게는 브라질의 열대우림이 천국처럼 느겨졌겠지만, 아마 굴드가 그곳을 봤더라면, 가장 고통스러운 지옥처럼 느꼈을 것이 확실합니다. 

 

굴드가 가장 좋아했던  색은 "군함의 회색과 한 밤의 암청색"이었습니다.  이 다큐에는 이런 굴드의 취향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캐나다 북쪽의 단순하과 황량한 풍경, 진눈깨비와 찬 바람이 날리는 차가운 날씨. 그 속에서 결코 붐비지 않는 사람의 흔적, 빙하 같은 것들. 

 

 

아마 겹쳐서 들리는 나레이터들의 목소리는 현지인들도 명확하게 알아듣기는 힘들거에요. 우리는 그저 굴드가 좋아했던 날씨와 풍경을 귀로 스쳐지나듯 들으면 됩니다. 간단하게 소개하렸던 글이 대책 없이 길어졌네요. 이제 굴드의 겨울 풍경을 귀로 감상할 차례입니다. 규칙적인 기차의 진동과 함께 웅얼거리는 외국어 뭉치처럼 잠을 부르는 소리도 없을 거에요. 열대야로 잠이 안오시는 분들은 아꼈다가 들으면서 잠을 청하셔도 좋을 듯 싶습니다.  녹음 말미의 시벨리우스 교향곡 5번의 클라이맥스도 정말 시원해요.

 

https://youtu.be/ry5MUnZoeGI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OWmr2m_svcTYE8KI1XYPVqs3E2jpgvbq

 

7
Comments
WR
1
Updated at 2021-07-27 21:23:13

저스틴 비버를 슬쩍 끼워 개드립을 쳤는데 아무 반응이 없어 실망중입니다. 힝...ㅠ.ㅠ

1
2021-07-27 21:49:25

너무 잘 읽었습니다.
처음 산 음반이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라 제게는 첫키스와 같은 기억입니다. 북미나 유럽 출장때 sony가 아닌 그의 음반을 사오던 기억도 소중하구요 인류의 보물같습니다

WR
2021-07-27 22:12:08

그러시군요. 찰즈부르크 리사이틀 같은 음반 좋죠.

1
2021-07-27 22:59:23

토익 리스닝 테입 듣는거 같아요~

 

어디에서 읽었는지 기억이 잘 안나는데 음악(혹은 소리)에 고유의 '정보량'이 있다는 내용이었어요. 엠비언트 사운드는 정보량이 낮고 영험한 종교지도자의 메세지는 정보량이 높은? (=집중해서 들어야 하는) 그런 개념이었던거 같은데, 걸어주신 링크의 사운드는 최소 3명의 목소리 혹은 3가지 이상의 소리가 들리는 거 같으니 한 사람이 이야기 하는 사운드에 비해 정보량이 3배 이상이 될라나요? 

 

PS. 글렌 굴드가 추구하는 사운드와 이미지가 만프레드 아이허의 ECM 레이블과 교점이 있지 않나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듭니다.

WR
Updated at 2022-07-25 15:31:22

 굴드는 순수한 소리를 찾기 위해 프로듀싱 작업에서 왜곡을 많이 가하고 짜집기도 불사했습니다. 굴드가 특이했던게 음악적으로는 전형적인 플라톤 주의자로 현실의 음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무리 더럽고 잡음이 많아도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음을 상상하게 만들어줄 수 있으면 온갖 잡음을 괘념치 않았죠. 그런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파이노에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정도의 성능과 특징을 요구했지만요. 그는 그런 음을 상상하기 위해서 피아노가 최대한의 성능을 발휘해 자신이 상상한 것을 구현하길 바랐지만 그 음이 이상적인 음 그 자체라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단 상상에 빠져 만족스럽게 연주하고 나면 그 결과물이 실재로는 이상적인 것과 차이가 있어도 상관 안했어요. 굴드가 원한 것은 지상에서 아름답게 울리는 현실의 음이 아니라 자기 마음 속으로만 들을 수 있는 음이었으니까요. 자신의 상상속 음악을 감상자에게 들려주기 위해서 현실의 음을 기술적으로 비틀고 또 짜집기했습니다. 공연장의 1회성을 중시한 보통의 연주자들과는 정 반대였어요. 

 

아무래도 아이허가 이런 작업을 좋게 보진 않았을 것 같아요. 저는 ECM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뮤지션이 언드라시 쉬프이고, ECM에서 활동하진 않았지만 가장 비슷 한 느낌인 연주자는 켐프와 브렌델이 아니었을까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순수하고 엄격하며 소박한 음색을 지닌 연주자들요.

 

ECM의 음반들은 프로듀싱을 할 때, 최대한 현장의 분위기를 살리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압니다. 스튜디오 음반도 최대한 후반작업을 줄이고 원테이크로 갑니다. 훌륭한 라이브 음반들도 많죠. 

1
2021-07-28 08:49:06

 글렌 굴드의 찐 팬이신가봐요^^ 링크 걸어주신 전체를 듣기는 버거워서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5번만 잠깐 들었습니다. 가끔 종일 혼자 술마실 때면 시벨리우스 교향곡 5번을 3번 정도는 듣게 되더라고요! 늘 좋은 글 남겨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WR
1
2021-07-28 12:27:02

저는 여름에 시벨리우스를 많이 듣습니다. 정말 시원해요. ^^

 
글쓰기
SERVER HEALTH CHECK: 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