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책 소개)피아노 솔로라는 신화 - 『굴드의 피아노』, 케이티 해프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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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7wjqpCh7a4Y
*이 곡을 들으며 같이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이 곡이 포함된 브람스의 간주곡 연주들은 이 책에 나올 피아노와 굴드가 열렬하게 사랑에 빠졌을 때 녹음된 최고의 결과물 중 하나이기 때문이죠.
글렌 굴드가 세상을 떠난지 4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를 끈질기게 따라붙는 신화는 굴드가 철저히 혼자이기를 원했고, 혼자였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비 영어권에서 굴드에 대해 쓰여진 책 중 가장 인기가 많았던 책은 아마도 프랑스 작가인 미셸 슈나이더의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일 것인데, 이 책의 제목과 내용에서도 일관되게 그런 신화화를 부추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었을까요?
언뜻 그래 보입니다. 굴드는 사후 다수의 호사가들에게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았던 것이 아닐까 의심 받을 정도로 비사교적이었고, 타인과의 신체적 접촉을 혐오했으며, 은둔자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이러한 이미지는 그의 공적인 영역의 삶이라고 할 수 있는 음악가로서의 삶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직업 피아니스트로서 가장 중요한 일인 콘서트를, 관객과 한 공간에 있는 것을 견딜 수 없다는 이유로 혐오했고,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는 협주곡 장르가 솔리스트와 오케스트라 간의 경쟁적 요소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개인적으로 연주를 기피했습니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음악적 작업은, 어떤 관객도 없는 곳에서 철저하게 혼자가 되어 연주하는, 스튜디오에서의 독주곡의 녹음이었고, 그러한 형태의 음악적 결과물들이 굴드의 음악적 삶을 가득 채웠죠.
그러나 조금 생각해보면 그는 혼자일 수가 없었습니다. 굴드는 까다로운데다가 생활에 서툴렀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의 부모로부터, 나중에는 레이 로버츠와 같은 매니저, 혹은 피고용인으로부터 끊임없는 보살핌을 받아야 했습니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그가 다루는 악기가 피아노였다는 것입니다. 피아노는 제작하고 관리하기가 무척 까다로운 악기죠.
굴드가 사용했던 스타인웨이의 D모델 피아노는 12,000 개의 부품들을 각각의 제품 하나하나가 미묘하게 다른 규격을 가지고 있어 공식화된 작업 지시서 없이 만들어야 했고,(놀라운 일이지만 지금도 스타인웨이를 비롯한 많은 피아노들이 이렇게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피아노를 규격화해 대량생산이 가능하도록 만든 최초의 회사가 일본의 야마하였다고 하죠.) 사용되는 피아노는 사용하는 첫 그 순간부터 점진적으로 음율이 어긋나기 시작해서, 수시로 조율을 해주어야 했습니다. 때문에 훌륭한 피아니스트 옆에는 항상 그 피아노를 보살피는 훌륭한 조율사가 있어야 했고, 이들의 역할은 그저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에 그치치 않았습니다. 훌륭한 골프 선수 옆에 항상 경험 많은 케디가 필요하듯이, 1류 연주자들에게는 그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조율사의 존재가 필수였습니다. 스타인웨이는 그들의 유망한 협력 연주자들을 위해 최고의 조율사가 연주여행에 동행하는 전속 테크니션 제도를 운영했습니다. 그들은 피아노를 조율하는 테크니션의 역할 뿐 아니라, 때로 피아니스트를 다독이고 고민을 들어주는 심리치료사의 역할까지 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글렌굴드에게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러나 여지껏 굴드를 다룬 대부분의 책들(한국에 번역된 것들)에서 조율사의 존재는 거의 드러나않거나, 잠깐 스치고 지나가는 정도였습니다. 굴드가 아꼈던 피아노들(캐나다의 치커링, 스타인웨이의 CD174나 CD318, 혹은 모델B)의 경우는 굴드의 생애를 조명하는 와중에 그 이름들이 가끔 언급되고 굴드의 애착에 대해서도 언급되는 경우가 없지 않지만, 그 피아노들이 어떤 개성을 가지고 굴드와 조화를 이뤘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는 경우가 드물었습니다.
그러나 굴드는 혼자일 수가 없었습니다. 굴드에게는 수 많은 사람들이 협력해서 만들어낸 훌륭한 피아노가 있었고, 그 피아노를 굴드가 원하는 상태로 꾸준히 다듬어온 조율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굴드의 스튜디오 음반제작을 담당한 또 다른 중요한 동료들과 함께, 굴드라는 현상을 만들어낸 하나의 팀이었습니다. 굴드의 피아노는 '솔로'가 아니었던 것이죠.
이 책은 굴드와 그의 스타인웨이 피아노 CD318, 그의 전속 조율사였던 샤를 베른 에드퀴스트가 우연한 기회로 서로 만나고, 팀을 이뤄 환상적인 결과물들을 만들다가, 사고를 당하고 해체되기까지, 각각의 구성요소들의 궤적을 동일한 비중으로 그려낸 흥미진진한 책입니다. 때문에 이 책은 굴드 개인에 대한 책 보다는 '팀 굴드'에 대한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굴드의 피아노 조율사, 샤를 베른 에드퀴스트
이 책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굴드 그 자신의 개성만큼이나 그의 피아노 CD318이나 조율사였던 에드퀴스트의 개성이 굴드의 결과물들 만드는데 필수적이었으며, 어떤 경이적인 성과물을 만드는 일은 온전히 홀로 해낼 수 없다는 평범한 진실을 세삼스레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복잡한 구성요소들의 상호작용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늘 벌어지고, 우리가 결코 그 결과를 예측 할 수 없으며, 그것이 세계의 본질적인 측면이라는 것도요. 그러나 게으른 우리의 눈과 마음은 늘 빛나는 주역에게만 집중되죠.
그래서 이 책을 덮을 때 즈음이면,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의 의미가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이 책은 이외에도 이전 관련 서적에서 알 수 없었던 다양한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굴드의 연애사 입니다, 굴드의 연애 상대였던 코닐리아 포스는 남편이 있는 상태에서 굴드와 불륜을 저지른 것이기에(이상하지만 이것은 굴드에게 이상한치마리 호의적이었던 코닐리아의 남편의 묵인하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지휘자라서 그랬을까요?) 그동안 그 전말을 아는 사람들 모두 철저하게 비밀을 지켜왔습니다. 그래서 굴드가 동성애자였다는 오해가 생기기도 했죠. 그러나 굴드가 죽고 40년이 지난 만큼, 당사자가 시간이 지난 만큼 사실을 공개해도 상관 없다는 판단을 내린 상황에서 이 책의 저자 헤프너가 포스의 동의를 얻어 최초로 실명을 공개합니다. 이 에피소드를 통해 독자들은 굴드가 사람이나 사물을 대하는 태도- 강한 편집증-의 일관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에드퀴스트 말고도 굴드의 피아노를 돌봤던 몇 명의 조율사들에 관한 것입니다. 조율사들이 피아노 연주에 있어서 얼마나 긴요한 역할을 하면서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후반기 굴드가 연주했던 야마하의 조율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면서도 공은 다른 사람에게 빼았긴 일본인 조율사 이즈마 미쓰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하나는 당연히 CD318-굴드의 피아노-에 관한 것입니다. 이 피아노의 역정은 너무나 드라마틱하고 안타까워서 마치 영혼을 가진 하나의 독자적 생명체 같은 느낌을 줄 정도입니다. 이 불멸의 악기는 그의 동료였던 굴드의 개성을 빼다 박았습니다. 그런데 의외인 것은 굴드의 생전이나 사후에, 이 파아노가 수 많은 재즈 뮤지션들과 인연을 맺었다는 것입니다. 생존 당시 재즈에 대해 일관되게 평가절하하는 발언을 했던 굴드의 비밀스럽고 의외스러운 면모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의 아이러니도요.
저는 국내에 발간된 굴드에 관한 모든 책들을 읽어봤지만 단 한권의 책을 추천하라면 이 책을 꼽을 것 같습니다. 굴드에 대해 한국에 소개된 책들 중, 재미와 밀도, 객관성 측면에서 가장 뛰어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 하나 안타까운 것은 이 책의 제목입니다. 이 책의 원제는 "A Romance on Three Legs(세 다리 위의 사랑)"로, 굴드가 스타인웨이 경영진에게 보낸 편지에 직접 쓴 표현입니다. CD318과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위트있게 고백한, 굴드와, 에트퀴스트 CD318 , 3자가 얽힌 낭만적 이야기에 딱 어울리는 제목이죠. 이아마도 상업적 고려가 있었겠지만 이 멋진 원제가 번역 과정에서 무미건조한 제목으로, 그리고 조율사의 존제를 지워버리는 제목으로 바뀐 것은 퍽 안타까운 일입니다. 부제로 '글렌 굴드와 그의 피아노, 그리고 조율사의 이야기'를 달고, 원제목을 그대로 살렸으면 판매가 부진했을까요? 독서시장의 열악함을 생각할 때 이해가 가지만 두고두고 아쉬운 제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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