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한잔] 시청자도 작가도 결말에서 해방되었을까?
식구끼리 동료끼리 친구끼리 연인끼리 유독 밥 먹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 것은 우리가 영원히 밥 먹는 것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먹고 살아야 하는 존재여서'가 아니었을까요.
해방클럽이 재개되면서 드라마가 막을 내립니다. 해방클럽이 시작되기 전후의 모습들과는 자못 다른 모습들입니다. 입가에는 미소들이 눈빛들은 신뢰가 - 스스로에 대한 상대방에 대한 닥쳐올 미래를 두려움 없게 살리라는 - 충만해 있습니다.
나의 아저씨는 모두가 평안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는 드라마였습니다. 지안이 평안에 이르는 동안 교차해서 나오는 다른 출연진 모두 '평안'을 갈구하지 않았어도 평안치 못했던 마음끓음들이 하나씩 정리됐었죠.
완벽한 결말에 대한 기대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것은 시청자가 아니었을까요, 마지막회를 보면서 작가가 일을 너무 벌여서 줏어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해방, 추앙, 환대 등 한글세대들에게 잘 쓰이지 않는 고대어들을 끌고와서 너무 개념적인 환상을 부각시킨 것은 아닌지, 드라마가 시작도 느리고 밋밋하게 진행하더니 뭐야 결말이 짜릿한 것 없이 가슴 터지는 해방 따윈 불가능한 것인가라는 약간 불만에 차서 마지막회를 봤습니다.
새벽 5시에 눈이 떠졌습니다.
바깥은 벌써 환하고 좀 있다 일어나면 또 밥을 먹을 것입니다. 밥 먹는 것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밥 먹을 걱정에서 해방된 지도 오래 됐지만 아직 우린 '먹거리'에서 해방되지 않았죠.
나의 아저씨는 평안을 가져와서 나의 아저씨가 스스로 인간답게 서로에게 인간답게 살아갈 삻에 대한 '태도'를 말하는 드라마였다면
나의 해방일지는 해방과 추앙과 환대를 말합니다.
해방은 놓여나는 것이 아니라 해방되고 싶어하는 감정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추앙은 추앙받을 자존감을 높히고 선택에 후회하지 말라는 것이며
환대란 시련을 응시하고 반가와하며 꿋꿋하게 대처하란 뜻이죠. 사람에 대한 미움을 걷고 그 사람이 처한 상황에서 해방되도록 마음으로 '환대'한다는 뜻은 공감과 용서를 내포한다 하겠습니다.
해방클럽은 다시 모임을 시작하고
사랑을 확인한 사람들 앞에 역경은 다름없이 그대로여도 입가의 미소를 마주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나고
해방되고 싶은 마음을 잊은 그들에게 해방은 그들의 한 발 씩의 걸음걸음마다 되잧아지고 있었습니다.
후련한 해방을 원했었던 갇힌 마음에서 벗어나 작가가 그려준 좀 답답한 해방에 대한 불만에서 해방됐습니다.
인생은 밥상머리에서 꾸역꾸역 밥을 먹어가는 것 그 자체입니다.
가끔 고구마 줄거리에 어려있는 분주한 정성을 기억하면서
서울에서 당미까지, 당미에서 산포까지 긴 귀가길이라는 것은 인생의 굴레였죠. 어떤 형태로든 삶을 힘겹게 느끼는 것들 하나씩 지금 가지고 계시지 않나요? 그것들에 대한 관조를 권하는 드라마입니다.
모두들 스스로의 마음의 감옥에서 해방되시길 바랍니다.
해방 속에서 살면 해방을 꿈꾸지 않게 되는 것이지 무지개 같은 찬란한 해방이란 원래 없었다는 생각입니다.
나의 아저씨의 평안이란 한 끼 밥과 눈 붙이고 누울자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 한다면
나의 해방일지의 해방이란 권태와 불만과 기우와 의심과 상투적 윤리로부터 벗어나란 뜻으로 보였습니다.
싱겁게도 열심히 즐겁게 살라는 인생 별 것 없다는 작가의 환기를 새벽 부옇게 밝아오는 천정을 바라보며 느꼈습니다.
- Krishnamur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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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하고 답답해 보이는 전개 속에서도 소소한 일상의 발견들로 작은 해방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