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한잔] 미분과 적분, 그래서 '우리들'
노희경 작가의 우리들의 블루스가 끝났습니다. 옴니버스라서 끝난 듯 이어지는 듯 연결되었었지만 이제 정말 끝났습니다.
이 드라마를 보며 드는 의구심은 당연히 노희경 작가에 대한 의구심으로 연결됩니다. 왜 구태여 계몽적인 스탠스를 견지했을까요,
팽팽한 긴장과 대비를 위했다지만 왜 드라마에 과도한 설정들을 끌어들여 부자연스럽게 만들었을까요?
저는 모두가 의도된 바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쓰다 보니 작가적 한계가 그 정도인 것이 아니고 적절한 반향을 일으킬 결과를 위한 장치들로 부자연스럽지만 눈물 한 바가지 쏟게 만들 장치들을 작가적 판단으로 사용했겠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다소 부정적 시각을 떨치고 마지막회를 시청했습니다. 아니, 사실 '미친 년' 대사까지만 보다가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 글을 올리고 다시 한 시간 남짓 시청하려고 합니다.
부정적 시각을 떨쳐버렸으니 긍정적으로 바라봐야겠죠. 우블에 나오는 상황들, 대사들 하나 하나 떼어보면 모두 예쁜 모래알입니다. 좋은 소리의 음표입니다. 그것들이 모이면 멋진 황혼을 볼 수 있는 해변이 되기도 하고 감미로운 야상곡이 됩니다. 의구심으로 시작된 우블 탐구는 미분을 대입한 예쁜 입자들의 발견에 이어 그것을 다시 적분하기에 이릅니다. 적분의 결과 원래의 모습이지만 느낌은 달라졌습니다.
보통 우리들이 드라마 내용과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혼자 했을 고민들, 이리저리 모색할 해결책들, 그 결과로 말미암을 주변에 대한 걱정들이 우블에서는 집단지성으로 이루어집니다. 온 동네사람들이 같이 궁리하는 그런 개인 고민은 우블에서나 가능합니다. 심지어 시청자도 어느새 같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의 쓸데 없이 밝은 분위기는 서로 배려하는 집단의 대화 때문입니다. 혼자의 머릿 속에서는 자기배려가 필요가 없지만 우블에서는 개인의 고난을 집단이 함께 고민하는데 그 관계 속의 대화들을 이끌기 위한 filler들이 채워져야만 관계가 있고 고민을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독하고 슬플 수 있는 모노드라마 같을 주제들이 모여 제주 한 마을의 군락이 동고동락하는 드라마가 되고 시청자마저도 내용의 향방을 마치 내 일처럼 우려하고 조바심내며 좋은 결과를 소망하고 기대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뻔한 결과가 예상되도 뻔한 드라마로 남지 않게 된 우블의 저력은 미상불 시청자 참여 드라마가 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쯤 되면 이것을 계몽이라고 해야 할까요, 우린 모두 정답을 알고 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옳은 방향으로 작가와 배우와 연출과 함께 시청자는 완결로 성취했습니다. 계몽이 아니라 나눈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마치 천주교 미사 후에 영성체를 함께 받아 먹는 것처럼요.
우정과 돈, 자식과 우울증, 청소년의 사랑, 장애인을 보는 시각과 장애인 가족의 삶, 생활의 무게, 엄마와 아들(오이디푸스, 엘렉트라 컴플렉스) 등 주제를 먼저 정해놓고 썼기 때문에 해변을 걸어도 모래알이 낱알로 밟히고 야상곡을 들어도 음표가 따로 보이지만,
결국 '우리들의 블루스'임을 전제했기에 노희경 작가가 이를 의도했고 불편한 설정의 이음새가 눈에 뜨이더라도 우리들이라는 '산'을 보되 각각의 블루스인 '나무들' 하나 하나를 관조하고 음미하며 각자가 스스로의 생활을 돌이켜보자는 다소 계몽적 느낌이지만 강권하지 않으면서 펼쳐보이는 방법을 선택했다고 봤습니다.
- Krishnamur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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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 현수와 은희 에피소드를 끝냈습니다
그간 소제목들도 일부러 확인 안하고 시작했기에 어제 소제목들의 구성을 보며 하나의 에피소드?가 끝남을 보며 드라마 전반의 구조가 그려지는듯 하더군요
집단지성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은 함께보는 해방일지의 작가의 전작에서의 후계초등학교 동창들의 시끌벅적 모임이 생각나더군요 어쩌면 해방일지에서 남매가 퇴근하고 만나 술 마시며 나누는 대화도 집단지성의 일종이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우연치않게 두 드라마의 바탕화면의 색감도 극명히 대조되는것 같아 짬짜면 먹듯 흥미롭게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