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글] 홀로코스트의 참혹한 현장에서 눈물을 쏟다.
폴란드의 옛 수도 크라쿠프에서 서쪽으로 차로 1시간 정도 거리에 오시비엥침이 있습니다. 바로 이곳에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나치 독일 강제 학살 수용소(1940~1945)가 자리하고 있죠. 아우슈비츠(Auschwitz)는 독일어이고 폴란드어 지명은 오시비엥침(Oświęcim)입니다.
전날 오후 시간에 방문했지만 가이드 동반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입장할 수 있는 시간대는 제한되어 있고 또 인원이 마감되어 허탕을 치는 바람에, 당일엔 새벽 5시 반에 숙소인 크라쿠프에서 다시 내비를 찍고 차를 출발해 서쪽으로 향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했더니 이른 시간임에도 매표소 앞에 벌써 10여명이 대기하고 있더군요.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아우슈비츠 1캠프 정문.
'ARBEIT MACHT FREI'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수용자들은 매일 이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 온종일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 늦은 저녁 무렵에야 다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살아있는 몸으로 이 문을 나갔지만 돌아올 땐 싸늘한 주검이 되어 다른 수감자의 어깨에 업혀 돌아온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폴란드 정치범들로만 구성되었던 수용소 오케스트라는 이후엔 유대인을 포함한 여러 국적자들로 인원을 채웠습니다. 이들은 취사장 앞에서, 혹은 노동 명령을 받고 일하러 나가거나 들어오는 수용자들 앞에서 행진곡을 연주했습니다.
이곳으로 강제 이송된 사람들을 태운 주요 기착역들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고압 전류가 흐르는 이중 삼중 철책으로 둘러싸여 있는 수용소.
외벽과 삼엄한 망루의 감시까지 있어서 탈출은 거의 불가능한 구조입니다.
목발이나 의족에 의지했던 장애인들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분류 심사에서 노동 부적합 판정을 받고 바로 가스실에서 학살당했습니다.
희생자들의 식기, 안경, 가방, 칫솔, 옷솔, 면도솔, 구두약통들...
들어올 때 가져왔던 저 여행가방을 들고 다시 나갈 수 있으리라는, 수용자들이 가졌을 희망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합니다.
강제 이송된 수용자들의 재산은 모두 독일 당국에 귀속됩니다. 현금과 귀금속은 강탈당했고 금이빨은 녹여 금괴로 만들어 제국은행으로 보내졌습니다. 입었던 옷들은 주로 섬유공장에 산업원료로 제공되었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는 수용자들의 왼쪽 팔뚝에 일련번호 숫자 문신을 새겼습니다. 유대인의 경우엔 번호 아래 역삼각 도형이 추가되었습니다. 다만 수용자들은 이 번호를 최대한 감추려고 했는데 카포나 나치 대원들에게 번호를 불리는 것은 곧 죽는다는 걸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수용자들은 수용 한계를 초과하는 극한의 공간에서 고통과 배고픔에 시달리며 밀짚이나 깔개 위에 몸을 뉘었습니다.
미예치슬라브 스토비에르스키(Mieczysław Stobierski) 作 "굶주림(Starvation)"
배급 식량은 충분하지 않았고 고된 노동으로 수용자들은 극도로 야위어갔으며 기아로 인한 수용소 내 사망자 수는 계속 증가하게 됩니다.
나치 친위대가 수천 명의 사람들을 총살한 '죽음의 벽'.
옆 건물 창문은 처형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판자로 가려놓았습니다.
매달리기 형벌이 이루어졌던 말뚝들.
수감자들 두 손을 뒤로 묶고 발이 땅에 닿지 않도록 한 채 말뚝 고리에 걸어 고문했던 형틀입니다.
이곳 즉결 심판소에서 약식 재판으로 사형 선고를 내리면 바로 건물 밖 '죽음의 벽'으로 끌고 가 집행하였습니다.
탈주 중에 붙잡혔거나 탈주를 도운 혐의가 있는 사람들을 한꺼번에 처형했던 집단 교수대입니다. 12명까지 동시에 교수형에 처했습니다.
수용자들은 여름에는 4시 30분, 겨울에는 5시 30분에 기상해서 점호 지휘소 앞으로 모였습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점호를 받았는데 점호는 악천후에도 강행됐고 몇 시간씩 진행되기도 했습니다. 점호 시간에 노동 부적합자를 선별해 가스실로 보내거나 집단 교수대에서 공개 처형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교수대에는 시체를 걸어놓아 수용자들에게 공포의 경고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전후 1947년 폴란드 대법원의 판결에 따라 초대 수용소 소장이었던 나치 친위대 중령 루돌프 회스(Rudolf Franz Ferdinand Höß)가 이곳 교수대에서 교수형에 처해집니다.
수용소에서는 다양한 의학 실험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독일 제약회사와 연구기관의 요구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불임, 약품 테스트, 잠복기를 알아보기 위한 발진티푸스 감염, 쌍둥이 실험, 굶주림이 인간 신체 기능에 주는 변화 등을 실험하게 됩니다. 대부분 마취도 없는 고통스러운 실험이었고 이로 인한 수많은 불구자와 후유증 환자들이 노동 부적합자로 분류되어 가스실에서 살해됩니다.
의학 실험뿐만 아니라 수용소 병원의 수용인원 과다를 이유로 환자들을 살해하기 시작합니다. 지정된 사람들은 위생병에 의해 페놀 심장 주사를 맞고 수초 내에 죽음을 맞습니다. 살해된 시체들은 맞은편 방으로 옮겨두었다가 수레에 실어 화장터로 보내졌습니다.
수용소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페놀 주사 투여나 물통에 넣어 익사시키는 방법으로 모두 살해됩니다. 다만 1943년 중반 이후 태어난 비유대계 아이들은 살려두었습니다.
사진 속에 있는 인물들은 모두 수용소에서 사망했습니다.
대량학살을 위해 사용된 '지크론 B(Zyklon B)' 화약품통.
지크론 B는 청산가스이자 이곳 가스실에서 사용한 독가스입니다.
끔찍한 시신 소각장.
시체를 옮기기 위한 선로와 수레, 화장용 소각로를 볼 수 있습니다.
독일군은 1941년 여름, 제1수용소인 오시비엥침에서 3km 떨어진 시골마을 브제진카(Brzezinka)에 제2수용소를 건설합니다. 독일명으로는 비르케나우(Birkenau)입니다.
비르케나우 수용소로 가는 철길이 통과하는 입차 관문입니다. 나치 친위대의 감시 초소 역할도 수행했던 곳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철길은 수용소 안으로 이어져 있고 그 종착점에는 독가스실과 소각장 터가 나옵니다.
창문도 없는 좁은 화물칸 하나에 1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선 채로 강제 이송되었습니다.
이곳에 새로 도착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나치 군의관에 의해 노동 부적합자로 판정받아 그 즉시 수백 미터 떨어진 가스실로 옮겨져 집단 학살을 당했습니다. 열차 선로는 가스실까지 이어져 있어서 사형 명령을 받은 사람들은 나치 친위대의 경계 하에 화물열차에 실리거나 걸어서 가스실까지 끌려갔습니다.
목조 막사들은 따로 창문이 없고 지붕의 채광을 통해 빛이 들어오는 구조입니다.
인원이 과잉 수용된데다 위생시설 이용에 한계가 있어서 수용된 인원들은 배설물 속에서 고통받습니다. 이나 쥐를 통한 전염병이 수용소 내에 자주 유행해 사람들이 죽어갔고 막사는 점차 짐승의 축사처럼 변해갔습니다.
초기에는 시체를 대규모 매장지에 땅을 파서 매장하다가 나중에는 노상의 나무 장작더미 위에서 태웠습니다. 그러다 거대 가스실과 화장장 복합 건물을 완공한 후부터는 그곳에서 본격적인 집단 학살과 시체 처리를 시작합니다.
열차 선로 끝에 위치한 건물 지하실에 가스실이 있었는데 수용소 전체 5개 화장장의 24시간당 처리 규모는 시체 4,756구였습니다.
1944년 10월에 수용자들의 반란이 일어납니다. 존더코만도 항쟁 사건입니다.
수용소 내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배경으로, 이동진이 별 다섯 개를 줬던 영화 "사울의 아들"이 이 소재를 다루고 있습니다.
수용자들은 독일군을 공격해 수용소 건물 일부를 파괴하고 독일군 3명을 죽이지만 탈출했던 수용자 전원은 모두 죽임을 당합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450명이 사망합니다.
가스실 잔해들 사이에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추모비 아래에는 이곳에 강제 이송된 사람들이 사용했던 23개 언어들로 각기 담긴 추념문 청동판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유럽 여러 나라에서 끌려온, 주로 유대인 남성과 여성 그리고 어린이들 약 150만 명이 나치에게 살해당했으니 이곳은 절망의 절규가 되어 인간성에 대한 경고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1940-1945
폭력과 잔인함이 사라진 세상을 꿈꿉니다.
그 누구도 고통에 힘들어하거나 눈물 흘리는 사람이 없기를...
글쓰기 |
좋은 사진과 배경 이야기까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