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한잔] [피겨] 그래서 김연아다!
사포(기원전 612~560년 추정)
어떤 이는 기병대를,
어떤 이는 보병대를,
또 어떤 이는 함대를 말한다.
검은 대지 위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각자가 사랑하는 사람이라 말하리.
마음껏 비웃어라! 심판들을 향해!
스포츠에 있어서 심판이란 직업은 최악의 것 중 하나입니다. 축구를 보시길. 야구를 보시길. 농구를 보시길. 다른 스포츠 모두 보시길. 감독, 선수, 관중, 시청자 모두 심심하면 씹는 존재가 바로 심판입니다. 조금만 의심이 가는 판정을 내리면 "야, 너 눈깔 삐었냐?"란 얘기가 나옵니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나 선수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한 판정을 내리면 사형수라도 만들 기세로 격렬하게 외칩니다. "너 돈 얼마나 먹었어?" 아마도 심판들이 송장이 돼도 생전 몸무게에서 21g을 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인간에게 영혼의 무게란 게 있다면, 이미 그들의 영혼은 심판으로 활동하던 시절 탐욕스러운 스포츠 팬을 포함한 모든 스포츠 관계자들에게 다 빼앗기고 말았을 테니 말입니다.
1등과 2등과 3등을 나누는 스포츠판이기에 그들이 속한 심판 세계에서도 욕을 먹는 일에 있어서 1등이 존재합니다. 바로 채점표를 든 심판들. 피겨스케이팅이나 체조와 같은 종목의 심판들. 예를 들죠. 축구는 골로 승부를 가릅니다. 간단합니다. 승자나 패자나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으면 승부의 결과에 복종합니다. 골이라는 것, 즉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이 있기 때문에.
『13/14시즌 프리메라리가 3라운드에서 바르셀로나가 점유율 8을, 헤타페가 점유율 2를 가져갔다. 바르셀로나가 슈팅 20개, 유효슈팅 15개를 기록했다. 이들의 패스 성공률은 83%에 달했다. 그라운드 위의 모든 선수가 하나가 된 것처럼 아름다운 경기력을 선사했다. 반면 헤타페는 슈팅 2개, 유효슈팅 1개를 기록했다. 이들의 패스 성공률은 58%에 불과했다. 선수들 각자는 넓은 공간에서 분리돼 바르셀로나 선수들의 포위망에 압살을 당했다. 패스는 자신들의 진영에서부터 쉽사리 차단을 당했고, 그 결과 중앙선을 넘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정도이다.
기적이 일어났다. 후반전 44분, 바르셀로나 지역에서 미쿠가 얻어낸 프리킥 찬스를 통해 후안 바렐라가 헤딩골을 성공시켰기 때문이다. 이것이 경기의 유일한 골이었다. 헤타페는 승리했다.』
자, 이 경기에서 헤타페가 승리를 거뒀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절대다수의 스포츠가 이렇게 확실한 기준점을 만들어 결과를 정해왔고, 우리는 여기에 익숙해졌으니 말입니다.
피겨라면 다릅니다. "바르셀로나의 승리이다"라 말할 것입니다. 그 이유로 "바르셀로나는 예술을 보여주지 않았겠는가"란 언급을 덧붙일 것입니다. 기술점수도 압도적으로 높았고, 특히 수행점수(PCS. 일종의 예술점수로 알려진 것)가 월등했기 때문에. 여기까지는 심판의 역할을 두고 별다른 반발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 믿습니다. '결정적인 한방이 아닌 전체의 과정을 두고 판단하는 종목이라면 그렇게 평가를 할 수 있겠지'와 같은 생각을 할 테니 말이죠.
허나 문제가 있습니다. '채점엔 심판의 주관이 개입된다. 심판은 인간이다. 인간은 편견을 갖고 있다. 또 특정 국적과 특정 선수에게 호불호를 가질 공산도 크다. 다른 측면을 보자. 그들의 업무는 채점을 할 때 정해진 방식대로 일을 처리하도록 약속이 돼있는 것이다. 특정 선수가 이전엔 듣도 보도 못한 아름다운 기술을 경기 중 불쑥 선보인다면, 여타 많은 스포츠에선 그 동작이 팬들에게 많은 감동과 즐거움을 선사한다는 측면을 고려 이러한 행위를 창조하고 보여주는 것을 장려하는 모양새인데(예컨대 60년대 중후반 브라질의 축구선수 히벨리누가 플립플랩 기술을 개발, 이를 그라운드 위에서 보여줬던 것처럼), 과연 피겨계 심판들은 앞선 상황이 발생했을 때 어떠한 결정을 내릴 것인가 등등.' 마지막으로 하나 더. 피겨계란 곳이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심판 매수 스캔들(결국 공동 금메달 수상 등 촌극이 벌어진)이 터져 올림픽 종목에서 퇴출당할 위기에 몰렸을 정도로 정치적 이권다툼이 심각할 정도로 벌어진 곳이기도 하기에 조직 자체에 대한 신뢰도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소냐 비엥게티와 같은 피겨계 거물, 최근까지도 심판으로 활동을 한 패트릭 이벤스 등과 같은 인물들이 '피겨계는 여전히 부패하다'와 같은 멘트를 날리기도 했다는 사실. 심지어 "심판은 기본적으로 선수 그리고 그들이 속한 국적을 본다"란 언급까지도.
『꼴뚜기 왕자의 조국 꼴뚜기 별은 반드시 꼴뚜기 왕자를 금메달리스트로 만들겠단 심산이다. 꼴뚜기 별은 국제빙상연맹(ISU)을 먹여 살린단 말을 들을 정도, 왜냐하면 그곳의 여러 기업들이 ISU의 충실한 스폰서로서 뛰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꼴뚜기 별 출신의 심판 비중도 높다. 당장 심판 A는 꼴뚜기 별 출신이며, 심판 B와 C는 정치적 야망이 커서 꼴뚜기 별 인사들과 친분관계가 깊다란 소문이 이리저리 들린다.
당신은 비교적 객관적인 측정이 가능한 기술점수를 꽤 정확하게 매길 수 있는 피겨 지식과 판단력을 지니고 있다. 또 예술 점수와 관련, 오랜 기간 무엇보다 지속적으로 피겨를 접하면서 피겨 선수들이 갖고 있는 예술적 표현 능력을 느낄 수 있는 감각을 길렀다고 여기고 있다.
당신의 눈으로 봤을 때, 꼴뚜기 왕자는 그리 인상적인 경기를 보여주지 못했다. 프로그램에 대한 인상도 평이했다. 꼴뚜기 왕자의 연기와 음악은 그리 잘 어우러지지 못했다. 음악은 진행이 됐고, 이와는 별도로 수행해야만 하는 기술을 꾸역꾸역 보여주는 수준이었다. 평범한 점프엔 다른 선수들보다 많은 가점이 붙었다. 음악에 대한 해석을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공연이었음에도 심판진은 PCS 부문(크게 보면 스케이팅 기술과 연기, 그리고 안무와 해석 등으로 나뉜다)에서 최고 점수를 주었다. 당신이 판단했을 때, 그보다 더 좋은 공연을 보여준 선수가 두 명은 있었다. 그런데 포디움의 가장 높은 자리는 꼴뚜기 왕자의 몫이었다. 당신은 경기 결과에 대해 승복할 수 있는가. 축구와 같은 종목에서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풀 수 있는 알렉산더의 검인 '득점'과 피겨와 같은 채점제 종목에 있어서 심판의 '프로토콜'(채점표)을 동일시할 수 있겠는가.』
심판들을 위한 옹호
세르반테스의 위대한 풍자소설 '돈키호테'에 나오는 일화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커다란 통에 담긴 포도주를 즐기고 있었다. 두 명의 전문가가 갑자기 불평을 시작했다. 한 사람이 말했다. "쇠의 맛이 미묘하게 난다. 포도주의 깊은 맛이 훼손됐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 "아니, 여기에선 가죽의 맛이 느껴진다. 그로 인해 포도주의 향이 훼손됐다." 마을 사람들은 포도주에서 어떠한 잘못된 점도 느끼지 못했다. 비웃으며 전문가들을 향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저 전문가 양반들 서로 다른 의견을 내세우고 있구나. 포도주에 별다른 문제점도 발견이 되지 않는데 말이지." 사람들은 다시 포도주를 마음껏 마셨다. 마침내 포도주를 다 마시고 그 통이 바닥을 드러냈을 때, 통의 밑바닥엔 가죽 끈에 묶인 녹슨 열쇠가 놓여있었다.』
'난 모르지만,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다'와 같은 직감은 세상만사를 이해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교육 따위에 에너지를 쏟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대충 글만 읽고 쓸 수 있을 정도만 배우면, 알아서 커나갈 수 있고 지식을 쌓으며 나중엔 모두가 대단히 현명한 사람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허나 이러한 것입니다. 시각적인 경험이나 훈련이 없다면, 회화의 구도나 명암의 대비 또 고도의 암시와 같은 부분을 느끼기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음악의 경우 '어, 이 음악 익숙하니 좋다'와 같은 감상평, 마치 술을 마시면서 '술은 취하니 좋은 게지'라 말하는 것처럼,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지각가능한 수준의 문제로 넘어가서도 마찬가지. 마이클 만 감독이 "'이번 신작은 디지털로 찍어야만 주제와 관련된 나의 의도를 더 잘 표현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라 말했다 칩시다. 이 지점에서 어느 관객이 있습니다. 그는 평소 컴퓨터의 작은 모니터로만 영화를 봤습니다. 지론은 이것입니다. '720p를 넘어가면 그 선명도를 구분할 수 있다는 주장 다 구라다.' 따라서 감독을 향해 "난 디지털이다 필름이다 그따위 것 분별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으니 됐고, 그냥 당신이 영화 재밌게 만들었는지나 보겠수"라 말한다면?
자, 피겨계에 있는 심판들은 전문가입니다. 적어도 보다 많은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피겨 공연의 질을 분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들인 인물들입니다. 기계적으로 말한다면, 심판진의 판단은 절대적이지도 않고 절대적일 수도 없지만 최소한 피겨계에 입문하려는 아니 '공연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가'란 문제에 있어서 참고할만한 방향타를 제시할 수 있는 이들입니다.
김연아의 '죽음의 무도'
세상만사 그렇듯, 피겨 경기를 평가한다는 일에도 각자의 주관이 개입됩니다. 점프와 같은 기술적인 측면이야 교과서적으로 따진다면(심판들이 기계적으로 채점을 할 수 있다면) 이견이 발생하기 힘든 영역에 있다고 하겠지만, PCS와 같은 요소는 다릅니다. 극단적으로 보자면, 전형적인 CF용 배우들을 보면서도 '저 친구들 연기력 좋은데?'라 믿고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앞서 예시로 들었던 꼴뚜기 별의 왕자의 경우, 모 심판이 '그의 연기력은 발군이었고, 안무에 대한 해석도 판타스틱했다. 왜? 내 눈에 아름답게 보였으니까'라 주장하면 사실 뭐라고 말하기도 힘듭니다. 꼴뚜기 별의 왕자가 로봇처럼 기계적인 연기(딱딱한)를 보여줬다고 할 때, 그 심판이 산업용 기계가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장면에 강한 페티시를 갖고 있다면? 나아가 인간을 압도하는 기계의 힘을 보며 두려움을 넘어 숭고함을 찾아냈던 19세기 이후 몇몇 예술가들의 판단력(인간의 불완전한 감성을 이성의 압도적인 힘으로 몰아낼 수 있다)을 따르고 있다면? 그 심판이 궤변가라면 할 수 있는 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 채점제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칸트의 '주관적 보편성' 개념을 차용, 최대다수가 '그래, 이것이 바로 피겨를 피겨답게 만들어주는 선수이며, 그가 형상화해낸 작품이다!'라 진심으로 생각하고 칭송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고. 선수에 대한 호불호나 프로그램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생각할 때, 예컨대 '가장 좋아하는 축구선수는 로베르토 바조이지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는 펠레를 꼽겠고 절대적 실력으로만 봤을 때 역대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준 선수로는 현재의 메시를 선택하겠다. 가장 좋아한 팀은 지네딘 지단이 이끌었던 프랑스 대표팀과 카카가 있을 때의 AC밀란이지만, 역대 최고의 팀으로는 70년 펠레의 브라질 대표팀을 꼽겠고 절대적 측면에 있어서는 최근 3~4년간 볼 수 있었던 메시와 그의 바르셀로나를 선택하겠다. 단체 구기종목인 축구에 있어서 한 명의 힘이 극대화가 됐던 경우로는 86년 월드컵에서 마라도나가 보여준 퍼포먼스라 생각한다'라 말하는 것처럼, 제가 접한 여자 싱글 부문 피겨 프로그램에서 가장 완벽한 작품이라 여기는 것은 2009년 세계선수권 쇼트 프로그램 중 나온 김연아의 '죽음의 무도'입니다.(결코 '주관의 영역을 벗어날 수 있다'란 소리가 아닙니다)
'빙판의 사용면적, 같은 기술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 속도가 미치는 영향, 완벽한 엣지의 사용은 선수의 몸동작을 어떻게 만들어주는가, 점프의 질은 어떠한가, 그렇기 때문에 점프 후 착지의 성공/실패만이 승부를 가르지 않는 것이다'와 같은 기술적 부분들은 명시적입니다. 적어도 피겨를 이해하고자 노력을 한 이들이라면, 기술적 부분만큼은 큰 이견이 없이 판단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기계적인 자세로 점수를 매긴다는 전제에서 말이죠. 여기에 있어서 김연아 선수가 보여준 절정의 기량은 압도적입니다. 깊은 엣지를 부드럽게 사용하며, 넓은 빙판 전체를 연기의 무대로 삼는 대담성과 빠른 속도로 빙판을 가로지르면서도 자연스럽게 연기를 해내는 높은 기술력을 보여주고, 높은 도약과 깨끗한 착지가 어우러진 교과서적인 점프를 해냅니다. 거짓이 개입이 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앞선 측면만 있었다면 '김연아 선수의 죽음의 무도가 최고였다'라 생각하진 않을 것입니다. 피겨엔 음악이 있습니다. 괜히 음악을 삽입하는 건 아닐 것입니다. 생각을 해보시길 바랍니다. 예컨대 발레엔 음악이 들어갑니다. 따로 발레용 클래식이 작곡이 됐고, 오늘날에도 작곡이 되고 있습니다. 발레리나와 발레리노의 춤으로만 발레란 예술이 완성이 될 수 있다면, 이 무대공연에 음악이 들어갈 필요는 애초 없었을 것입니다. 발레에 춤이 있고 음악이 있다는 건, 결국 '음악에 대한 해석이 어우러져야만 발레는 완성된다'란 소리이겠죠. 피겨도 마찬가지, 에너지 남아돌아서 원곡을 피겨의 형식에 맞게끔 편곡하고 여기에 어울리게 안무를 짜고 하는 게 아니란 것.
인간의 감성을 찬미한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적 작곡가 중 한 명인 생상스의 곡 '죽음의 무도'는 할로윈 기간에만 무덤에서 일어나 생명력을 얻는 사자(死者)들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365일 중 364일을 잠들어있다 단 하루, 그것도 자정부터 동이 트기 전까지만 생명력을 얻을 수 있는 죽은자들의 이야기. 짧은 시간입니다. 따라서 최대한 압축적으로 놀아야만 합니다. 유한하기에 아름다울 수 있는 축제란 의미가 절실하게 다가오고 증폭되는 지점입니다. 생전엔 수줍음을 많이 타던 이들도 미친 듯이 뛰놀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이해되지 않나요?
김연아 선수가 완성해낸 죽음의 무도를 보면, 원작자가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작품을 만들어냈을지 감히 확신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할로윈 기간,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죽은 이가 깨어났다. 생명을 잃었기에 산자를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그러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그들은 지상세계가 할로윈 기간을 기념하고 있음을, 자정이 넘었음을, 따라서 자신들이 활동할 수 있음을 그렇지만 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즉각적으로 깨닫는다. 광포하듯 높게 날아올라 춤을 춘다. 몸을 풀고는 기쁜 듯 미소를 짓고 자유를 만끽한다. 어느덧 수탉이 울기 시작하고, 곧 동이 틀 거란 사실을 알게 된다. 사자들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잡으려는 기세로 마지막 순간을 즐기리라.' 피겨계 유명 인사인 필립 펠리씨에는 '생상스가 김연아의 공연을 봤다면 무덤에서 뛰쳐나와 춤을 췄을 것이다'란 표현을 했는데, 이 안엔 '소리로만 전달이 되는 음표를 시각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경지가 예술이 아니라면, 그 무엇이 예술이 될 수 있겠는가'란 판단이 들어있지 않을는지 곰곰이 생각을 해봅니다. 누가 아나요? 전설적인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와 생상스의 일화처럼 재미난 일이 생겼을지. :-)
『'빈사의 백조'를 통해 '당신이 바로 백조이다'란 찬사를 이끌어낸 안나 파블로바가 1909년 발레 뤼스의 일원으로 파리에 갔다. 파블로바는 리허설 도중 반주를 해주던 피아니스트에게 불만을 표했다. "틀렸어요. 이곳에 쉼표가 있단 말이에요." 그 피아니스트는 온화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면 여기에 쉼표를 하나 넣어드릴게요." 그 피아니스트는 빈사의 백조를 작곡한 생상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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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아 만세!!! 제발 끼어들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