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스포) 개인적인 삼체 감상기
삼체. 참, 아쉬운 점이 많은 시리즈입니다. 여행이 꼬이면, 단점은 아예 생각하지 않고 장점만 찾아보려고 하죠. 어차피 시간은 낭비했으니. 몇 안 되는 장점이라도 찾아 여행을 이어가는 관대함이 나이가 들수록 생겨나죠. 이 시리즈의 미덕중 하나는, 중국 드라마가 생각보다 나쁜 게 아니었다는 자신을 낮춰 세상을 올리는 겸허함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제작진이 SF를 좋아하지 않아보였습니다. SF라고 한다면, 상상 속에서만 이뤄지던 광경이 현실화되며 머리 속에 조그마한 방울들이 몽글몽글 샘솟는 그런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성이 있잖습니까. 그런 부분들이 축소되거나 생략되고, 왜곡되었습니다. 그 SF적 상상력이 원작에서도 여러 단점을 덮어주었는데, 장점은 죽이고 단점만 도드라지게 만들었다고 할까요.
VR게임의 경우. 역사적 인물들이 재구성되어 게임속 NPC로 나옵니다. 원작에서는 뜬금없이 등장한 주문왕이 어떤 비유인지, 내뱉는 말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한참 헤매는 시간이 있죠. 그러다 서서히 외계 세계의 은유임을 알게 됩니다. 영화에서는 이 장면들이 아무런 맥락없이 VR 신기하지 자랑하며 스쳐갑니다. 주인공과 함께 외계세계를 서서히 알아가는 추리 서사를 제작진은 몰랐다고 생각합니다.
또 VR의 의미도 몰랐죠. 외계문명이 등장한다면 외계인의 외형과 문화가 무엇보다 중요하겠죠. 스타워즈, 스타트렉, 마블 유니버스의 다양한 외계인들, 에일리언의 엔지니어처럼 아이코닉한 외계인들을 떠올려 봅니다. 캐릭터가 9할은 먹고 가지 않습니까. 외계 문명이 나오는 영화이니 외계인 등장이 하일라이트가 되어야 하지만, 삼체는 그걸 VR로 대체하며 외계인의 특성을 표현합니다. 원작자의 시도는 성공했지만 드라마는 실패했습니다.
그 이유중 하나는 닌자 캐릭터 지자. 닌자 지자는 원작에서도 이질적인 캐릭터라 나올 때마다 분위기가 깨졌습니다. 드라마에서 전면에 등장시킨 것도 이해는 됩니다. 망해가는 이야기도 닌자가 갑자기 뛰쳐나와 뜬금없이 칼을 휘두르면 평균은 가겠지요. 삼체에서는 여자 닌자가 갑자기 카타나를 휘두름에도 재미가 없습니다. 외계문명에 대해 의문을 품고, 외계인을 상상해야 할 시간에, 구체적인 인간형으로 등장시키니 김이 빠지는 겁니다. 원작에서는 한참 뒤, 삼체 외계인 정체가 밝혀진 후 등장할 캐릭터를 최전면에 내세우니 꼬인 겁니다.
삼체 문제 자체를 언급하기 싫어하는 것 같았습니다. 등장 인물이 구라를 풀며 쓱 스쳐가죠. 이건 SF라는 장르의 존재이유를 부정하는 것 같았습니다. 체르노빌에서 맹렬하게 사고의 원인을 해석하던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시청자에게 복잡한 문제를 던진 후, 시청자보다 반발 앞서 해결하며, 시청자여 너 또한 참 똑똑한 인간이구나.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줄테니 3분간 으쓱해도 된단다. 잘 만든 SF를 보면 인간 본성에 있는 모험심과 지적 호기심이 충족됨과 동시에, 저 너머 세계에 대한 동경심도 생기지 않습니까. 삼체 드라마는, 너 골치 아픈 거 싫어하지. 우리 주인공이 30초 안에 말로 해결할 테니 잠깐 쉬고 있어, 주인공이 열라 똑똑해서 모르는 게 없다능. 이렇게 지나갑니다.
장르 특성을 못 살린다면, 서사는 잘 해야겠죠. 그러나 그것도 버겁나 봅니다.
그저 이 드라마를 보면서 멀리 여행간 기분을 느끼고 싶었을 뿐인데.
책 3권에 나오는 다양한 주인공이 한번에 등장하죠. 그러면 캐릭터가 겹치죠. 누구도 웃지않을 농담을 계속 던지며 유쾌함을 표현하는 캐릭터도 두 명이고, 인류의 생존 앞에서 과학 윤리를 따지는 캐릭터도 두 명입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은 상관 없는 캐릭터는 하나, 둘, 셋. 그러다 보니 피도 눈물도 없는 특수부대원 캐릭터 하나는 독기를 쪽 빼버리고 순한 동네 아저씨로 만듭니다. 배 나와 10미터도 못 뛰어갈 보디가드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면벽자는 누가 지키나. 코스 요리를 한번에 내놓고 먹으라 하니, 겹치고 모순되어 엉망입니다.
다양한 인물이 나오니 인물간의 갈등도 한번에 터져나옵니다. 그 복잡한 갈등은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것과 휴대폰을 클로즈업하는 걸로 해결합니다. 걸려오는 전화를 받지 않음으로써 갈등을 보여주는 건 90년대 뮤직비디오에서 많이 봤지 않습니까. 그 구태의연한 연출을 이 드라마는 이를 악물고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반복합니다. 보다보면 자연스럽게 박수가 터집니다. 아. 앞에서 이 드라마도 장점이 있다는 말을 했는데요. 이런 컬트적 복고 요소가 이 드라마의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용히 침묵 속에 그어갈 나노커터는 굳이 애들을 난도질하며 동네 시끄럽게 만듭니다. 시끄럽게 해도 되면 특수부대 부르지 그랬어. 어떤 대 테러진압 작전도 그렇게 시끄럽진 않습니다. 광활한 자연이 무너지는 걸 보여줘야 할 레이더 기지는 대관람차 풍경처럼 만들었습니다. 삼체 VR의 난해한 장면들도 너무나 뻔하고 상식적인 장면으로 만들었죠. 3년 전 제임스웹 망원경이 펼쳐지는 걸 보며 세계가 환호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삼체의 우주선이 펼쳐지는 건 제 삼단 우산이 펼쳐지는 것보다 개성이 없어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다 보고 나니, 20대 생각이 나더군요. 그때는 참 시간이 넘쳐 흘렀습니다. 의미없는 영화도 다양한 의미를 붙여가며 밤새 보았죠. 들었던 음악도 반복해 들었고, 읽은 책도 수없이 반복해 읽었습니다. 지금은 시간이 스쳐 지나죠. 나른하고 지루했던 20대의 어느 날, 홍대 인근의 어느 만화방에서 반나절을 보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게 이 드라마의 미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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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는 글인데 정성이 들어서 그런지 까는 글처럼 안느껴지네요.
그래도 다보고 나니 중국sf 대단하고 우리나라도 좋은 sf작품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