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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어스 (Us)(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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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1-10 20:28:46

 

우리가 남이다

 

 

 

[스포일러 있음] 

 

"당신이 그날을 기억하지 못하는 진짜 이유가 뭔지 알아? 그건 말이야.. 

그냥 잊어버린거야! 왜? 싱거운가요? 

하지만 사실이야. 당신은 그냥! 잊어버렸어. 

왜? 남의 일이니까."


- 박찬욱 감독의 2003년작, <올드보이> 중에서


애들레이드 (루피타 뇽) 와 남편 게이브 윌슨 (윈스턴 듀크) 은 잘 사는 부부. 이들은 딸 조라 (샤하디 라이트 조셉) 와 아들 제이슨 (에반 알렉스) 을 데리고 산타 크루즈의 별장으로 여행을 온다. 정확히는 이웃 가족과 함께 왔다. 애들레이드는 사실 20여년 전 산타 크루즈에서 한 어트랙션에 들어간 적이 있다. 유령의 집 같은 공간을 헤매다 거울방에 들어선 그녀는 자기 도플갱어를 발견한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작품이 굳이 설명하지 않지만, 그녀는 그 날 봤던 도플갱어로부터 쫓기는 심정으로 살아가기 시작한다. 불안 속에 살아서 한 때 꿈꿨던 발레리나도 단념한 상태. 생각한대로 이뤄지는가. 애들레이드는 가족구성원과 흡사한 사람들을 대동한 도플갱어와 20년 만에 재회한다. 애들레이드의 도플갱어인 '레드' 와 나머지들은 살의를 드러내며 사람들을 공격한다. 윌슨 가족은 묶인 자들로부터 도망치면서 이들이 자신들과 똑같이 행동한다는 점을 알게 되고, 그들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도플갱어의 공격을 받고 있음을 알게된다.

 


<어스>를 진상들이 가득하다는 문화의 날에 본 이유는 공포물로서 가진 기대감 때문이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에서 보면 비명 듣는 재미도 있고, 내가 비명 질러도 덜 민망할 듯 해서였다. (물론 안타깝게도 이 작품은 공포영화다운 무서움이 거의 없었다.) 물론 <겟 아웃> 에서 가진 의구심으로 인해 조던 필 감독 신작을 제 값 주고 못 보겠다는 마음이 더 컸다. 흑인들에게 느끼는 선입견을 가장한 백인들의 은밀한 욕망을 다룬 <겟 아웃>은, 후반부로 갈수록 '흑인 한 명의 전투력은 백인 여섯명의 전투력에 맞먹지. 블랙피플 짱짱맨' 처럼 변하던 작품이었다. 감독 스스로 흑인이라는 정체성에 도취된 듯 했달까. 흑인 영화인들도 백인과의 피지배 / 지배 관계에만 천착할 게 아니라, 그들 내부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다루는 비중을 더 키울 때가 됐는데 아직 그런 문제를 다루기엔 시기상조일까. 생각하면 지금도 <블랙 팬서> 같은 작품이 오스카상 후보에 오르고, 현실 미국사회 속 공권력은 흑인이라는 이유로 별 고민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희한한 세상이다. <어스>가 이토록 장황한 화법을 쓴 이유가 이 희한한 현실을 감안한 결과인지 생각했다.


 

작품은 도입부부터 장황하다. 어린 애들레이드의 시점으로 TV에서 미국 내부와 전세계 빈민층들을 돕자고 시작된 '핸즈 어크로스 아메리카' 광고가 방영 중임을 보여주는 숏이 대표적이다. 주변에는 VHS 테이프들이 어지럽게 늘어져 있는데 내 눈에 네 개쯤 보였다. 리차드 도너 감독의 <구니스>, 더글라스 칙 감독의 <C.H.U.D.>, 칼 라이너 감독의 <전자두뇌인간> (TV 방영시에는 원제에 충실한 <두 개의 뇌를 가진 사나이> 라는 제목이었다.), 마지막으로 필립 카우프만 감독의 <필사의 도전>. <어스>가 네 작품이 지닌 요소들로부터 일부 영향받았음을 티 내는 순간이다. 상관없어 보이는 지상 공간 밑에 거대한 지하세계가 있다는 점은 <구니스>. 역시 지하세계가 나오지만 거기 사는 자들이 지상의 사람들을 죽이러 올라온다는 설정에서 <C.H.U.D.>, 정부 실험이라는 점에서는 <필사의 도전>, 한 개의 뇌, 혹은 몸을 두고 두 자아가 공유하는 점은 <전자두뇌인간> 과 연관이 있다.


 

<어스> 가 디테일을 만드는데 있어 네 작품들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말하는 건 자유다. 하지만 여기에 얼마나 많이 호응해줄지는 의문이다. 한국을 넘어 미국 관객들에게조차 낯선 예시처럼 보여서다.<C.H.U.D.>로부터 받은 영향은 대충 알겠는데 <구니스>는 예상 못한 규모의 지하 공간이 있다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연관성이 거의 없다. <전자두뇌인간> 은 온라인에서 작품을 보지 않은 사람들의 추측성 설명으로 '하나의 영혼을 두 사람이 공유하는 이야기' 라고 알려져 있다. 사실 영혼과 큰 관련 없고 살아있는 뇌와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공유 장면 역시 기본 설정이 아니라 하일라이트고. 전작인 <겟 아웃>과 더 어울리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언급된 네 편 중 <C.H.U.D.> 와 <필사의 도전> 정도만이 <어스>와 어울린다. 두 편만 해도 됐을텐데 굳이 네 편을 제시했다는 것. 이는 <어스>가 정교한 함의를 담아뒀으며, 다양한 해석과 담론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과시처럼 보인다. 막상 보면 다른 외피들을 억지로 걸치고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는 척 하는 수준인데 말이다. 수많은 디테일과 메타포들은 본편과 잘 이어지지 못하고 번잡스럽게 느껴진다. 그래서 보고 있으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제시하려는 이야기가 상당히 확고한 탓에 다른 해석이 끼어들 틈이 없어 보이는데, 작품의 태도는 마치 확고하게 봐주길 피하려는 듯 보인다.



연출자가 다양한 함의들을 담아낼 수 있다고 과시하려 들었다가 망했다고 생각해도 된다. 하지만 일단 작품이 하려는 이야기가 논란의 소지가 있는 탓에 이를 희석시켜서 다가가기 위함이 아니었을지 먼저 생각하게 된다. <어스>가 공포물로서는 별 볼 일 없었지만 <겟 아웃> 보다 흥미롭게 느껴진 이유였다. 작품은 흑인 영화인이 더 적극적으로 다뤄주길 바랐지만 흔히 볼 수 없던, 혹은 개인적으로 보고 싶었던 이야기를 한다. 이젠 흑인들도 사회적 계급에서 만들어지는 차별과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말하는게 그것이다. 도입부에서 제시된 레퍼런스인 <필사의 도전> 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여기서 빛을 발한다. <필사의 도전> 은 미 정부 우주개발 정책의 일환으로 NASA 비행사들이 초음속비행에 도전하는 이야기라 '정부의 실험' 하나로 연관성을 갖기엔 백만광년 가까운 거리감이 있다. 물론 오마주로 서로 연결된 측면은 있다. 그 작품 후반부에 음속비행에 도전하는 한 비행사의 모습과 클로드 드뷔시의 '달빛' 에 맞춰 춤추는 발레리나를 교차편집한 장면이 있는데, <어스>에서 기괴하게 응용된다. 애들레이드가 아들 제이슨을 납치해 간 레드와 후반부에서 맞다이 까는 장면이 그것이다.


 

* 필립 카우프만 감독의 1983년작, <필사의 도전> 중에서 


 

레드는 애들레이드가 과거 발레리나의 꿈을 키웠던 점을 언급한다. 지상에서 애들레이드가 무대에서 공연할 때 본의 아니게 지하에서 교감해왔던 레드는 똑같은 방식으로 그녀를 공격한다. 이 액션 연출은 굉장히 어이없다. 나름 공포영화랍시고 여태껏 유지해왔던 분위기를 와장창 깨버리는 발레 킥, 발레 펀치, 발레 쑤시기가 등장하는데 이게 패러디물인지, 감각적인 척 하는 공포물인지... 최소한 싸움을 탱고로 표현했던 이명세 감독은 좋아할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하세계에서 좋든 싫든 지상의 애들레이드와 교감하는 레드를 사회계급적으로 생각해보면 이 한 맺힌 발레는 곧 사람 가슴을 치게 만든다. 꿈꾸는 건 자유다. 그러나 이 꿈을 실행에 옮기려 할 때 주변환경에 의해 좌절될 수 있음을 깨달으면 그만큼 사람 비참하게 만드는 고문이 또 없다. 애초부터 그런 꿈을 꾸지 않는 쪽이 훨씬 행복할 수 있다는 얘기다.

 

 

* <어스>의 발레 장면. 지상에서 발레를 하는 애들레이드와 지하에서 따라하는 레드


 

도플갱어의 스텝은 김성모 만화에서나 볼 법한 개나리 스텝 따위가 아니라 분노가 내재되어 있고, <어스>는 사투를 벌이는 사이사이에 과거의 애들레이드가 발레 공연 하는 플래시백을 교차편집 시킨다. <필사의 도전> 속 교차편집과 정서적으로 확연히 다르다. <어스>는 그 작품을 꽤 삐딱하게 봤었나보다. 실제로 NASA가 우주개척 정책을 시도했던 시기에는 미국사회에서 격렬한 반대시위가 있었다. 시위의 이유는 세금이 낭비된다는 것이었으며 주체는 흑인과 백인이 뒤섞인 빈민층이었다. '우린 이렇게 살고 있는데 백인들은 달에 간답시고 세금을 펑펑 쓰네' 라는 가사를 가진 길 스콧 헤론의 명곡 'Whitey's On The Moon' 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국가적으로는 필요했고 이로서 사회가 발전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과연 미국사회는 그 때나 지금이나 항의하던 빈민들을 돌아본 적이 있었나? 우주개발이 인류의 큰 한 걸음이었다면 시위하던 사람들도 우주의 꿈, 발레리나의 꿈, 혹은 마술사의 꿈을 꿀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필사의 도전> 배경으로부터 40여년. 혹은 '핸즈 어크로스 아메리카' 운동으로부터 30여년 쯤 흘렀지만 사회계급 간 격차는 벌어졌으면 벌어졌지 줄어들지는 않았다. 가진 자들이 몇십년 전 친히 시행해 주셨던 '핸즈 어크로스 아메리카' 는 <어스>에서 미국사회에서 점점 밀려나던 자들이 세상을 뒤집는 항거 수단이 된다. 작품은 분노를 숨기지 않는다. 물론 까도 우리가 까야한다고도 생각한다. 단순히 추상적인 계급비판에서 끝내지 않고 흑인사회도 콕 찝어다가 비판의 여지를 찾는다. 그래서 후반부로 갈 수록 먼저 습격한 도플갱어들보다 어째 주인공인 윌슨 가족이 사악하게 보이는 기현상이 생긴다. 주로 유머러스한 형태로 제시된다. 처음엔 위협으로부터 방어하려 했던 윌슨 가족은 자신들의 도플갱어를 비롯해 함께 왔던 타일러 가족의 도플갱어들도 가차없이 때려 죽인다. 그리고는 자기가 더 많이 죽였다고 주장하거나, 시체 옆에서 토론하는 등 상황에 무덤덤해지다 못해 살육을 즐기는 듯한 분위기마저 풍긴다. 이런 유머는 웃기지도 않고 솔직히 작품의 완성도에 해만 끼친다. 조던 필 감독은 분명 코미디언이자 코미디 프로그램 작가로 유명해진 사람인데, 이상하게 자기 연출작에 넣는 유머는 죄다 재미가 없다. 그러나 의미심장한 잔상은 남긴다. <심슨가족> 할로윈 특집에서나 볼 법한 유머라서다. 덕분에 게이브 윌슨을 연기한 윈스턴 듀크도 그 얼빵함 때문에 어느샌가 흑인 '호머 심슨' 처럼 느껴진다. 작품이 바라본 어떤 영감이리라. 요컨대 흑인사회의 백인화 같은.



 


* 그러고 보면 <심슨가족> 시즌 8 할로윈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바트 심슨의 쌍둥이고 사악한 휴고 심슨이 등장하는데, 마지막 반전에서 사실 사악한 쪽은 바트였음이 드러난다. 결말에서 바트와 휴고의 환경은 바뀐다. 



<어스>는 학살과 탄압으로 세워진 미국사회에서 상대적으로 탄압당하는 위치에 있었던 흑인들에게 묻는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고려했던 수단이 목적 자체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지 말이다. 차별받던 흑인들은 자신들 앞에 놓인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투쟁하기는 커녕 차별하는 자들처럼 살기를 택하고, 안온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이 받은 증오를 그 주체에게 향하지 않고, 오히려 사회적이거나 인종적인 측면에서 약자인 세력에게 향한다. 윌슨 가족이 도플갱어들을 때려 죽일 때 이런 전치현상의 정서가 느껴진다. 작품은 너희가 미국사회에 포함되기에 그 방식이 좋다고 생각하는지. 너희들의 삶이 언제든지 바뀔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보지 않았었는지. 그 집단에서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희생될 실험용 토끼에 불과한 존재가 너희인거 모르겠냐고 말한다. 작품이 보여주는 마지막 반전은 그런 점에서 은근히 즐길 구석이 있다. 그 반전은 심지어 애매하기까지 하다. 연출은 애들레이드가 잃어버린 과거의 기억 일부를 되찾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는 형태지만, 초중반부를 보고 있으면 그녀는 이미 자신이 누구인지를 인지 중인 것처럼 보인다.



작품의 시선은 현재 미국사회 속 흑인들의 행보에 대해 불안함을 극대화하는 형식이라 좀 놀랍다. 이는 흑인감독의 지나친 피해의식에서 비롯된 불안인가. 아니면 흑인사회가 지닌 병폐를 정확히 꿰뚫은 지적질인가. 한 가지 확실한 부분은 <어스>가 미국사회에 만연한 다양한 문제들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데는 헐거워도, 최소한 누구 보라고 만든 건지는 명확히 보인다는 점이다. 애들레이드가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았든, 이미 다 알고 있는 시점에서 나는 살아남았다는 의미에서 안도하는 것이든 그녀가 미소짓는다는 사실은 같다. 흑인 감독이 영화를 통해 던지는 조롱의 썩은 미소이리라. 전자는 탄압받은 인종으로서 그런 현실이 있음을 잊어버릴 정도로 외면했다는 점에서. 후자는 그런 이기심을 지녔으면서 권리가 필요한 사회적 약자인 것처럼 굴 자격이 있느냐는 점에서. <어스>를 보면 흑인 관객들의 반응이 궁금해진다. 이 일갈 앞에서 찔려할까, 외면할까. 아니면 차별받고 있다는 사실에만 몰입하며 선택적으로 동조하는 척 할까.

 


p.s.


1) <어스>의 크레딧 중 'thanks to' 에는 스티븐 스필버그, 'special thanks to' 에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이름이 올라와 있다. 아마 그들이 많이 도와준 모양이다. 재밌는 건 마지막 장면에 삽입되는 곡 'Les Fleurs' 를 부른 미니 리퍼튼은 마야 루돌프 배우의 어머니다. 그러니까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장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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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2019-04-16 13:24:42

어스를 안봐서 준호님의 이 좋은 글을 못 읽다니...

감상후 정독하겠습니다. ^^

WR
2019-04-16 13:27:47

아아.. 그러셨군요. 이런 안타까운 일이.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완성도는 별로였지만 내가 원했던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 <겟 아웃>보다는 볼만했다' 그런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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