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한잔] 조선의 사람들은 언제 공화국 시민이 되었는가
밑에 aurelius님이 좋은 글을 올려주셨습니다. 프랑스 시민혁명에서 왜 왕은 죽어야만 했는가 를 다루면서, 그것이 권력의 속성이라는 점을 설명해주셨습니다.
저는 그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그 혁명을 우리나라에 대입시켜 이야기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동학란에서도 쟁점중에 하나가 이거였는 데, 결론은 동학농민군내에서 근왕론이 이겼습니다. 아직 대다수 농민군들은 왕조시대의 백성들이었습니다.
동학이 사농공상의 신분계급을 타파하고 사민평등을 외치기는 했지만, 왕조 폐지에까지는 나가지 못했습니다.
당시 동학 농민군 (1차)의 요구사항을 한번 봅시다.
“녹두장군 깃발아래선 누구나 평등하다” - 경향신문, 2004. 5. 19
http://m.khan.co.kr/view.html?art_id=200405191854441
"농민군은 첫 봉기 때부터 정부의 비정을 지적하는 글을 보냈으나 전주를 점령한 뒤에는 이를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농민군의 요구는 국가제도로 이루어진 비정, 곧 국가수탈을 중지할 것이며, 모든 벼슬아치의 부정행위를 척결하고 쌀의 외국 유출을 막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왜 관군과 농민군은 서로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전주에서 물러갔던가?
간단히 분석하면 관군은 서울에 일본군과 청군이 진주하는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었고, 농민군은 북접(北接·농민전쟁 당시 충청도 지역의 동학 조직. 전라도 지역은 남접이라 했다)의 호응이 없어서 고립된 처지에 놓여 있었다.
관군과 농민군은 각기 이해득실에 따라 타협을 하고 다음의 정세에 대비하려 했던 것이다. 아무튼 농민군들은 전라도 일대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자신들이 내건 강령을 실천했다. 집강소는 국가에서 임명한 수령들을 몰아내거나 하수인으로 부리면서 지방행정의 직접 통치를 이룩했다.
집강소를 통해 수행한 주요 조항을 보면 신분관련 조항으로는
▲유림과 양반무리의 소굴을 없애버리는 일
▲종의 문서를 없애버리는 일
▲백정의 머리에 패랭이를 벗기고 갓을 쓰게 하는 일 등이었다.
국가수탈 문제로는 ▲모든 부당한 조세를 중지하는 일
▲무명 잡세를 없애버리는 일
▲탐관오리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토지문제로는 토지를 고루 나누어 짓게 하는 일 등이며, 여성문제로는 과부의 재가를 허락하는 일 등이었다. 또 외국세력과 결탁하는 자들은 잡아죽이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오지영의 동학사 필사본)
이를 폐정개혁이라 부른다. 조선왕조는 신분제도와 토지제도를 골간으로 지배체제를 유지했다. 다시 말해 양반과 상인을 가르고 노비와 천민을 최하층으로 하여 양반(사림) 중심의 관료사회를 이룩했던 것이다. 특권을 누린 양반들과 달리 양인들은 국가조세와 군대경비를 부담하면서도 벼슬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 천민들은 갓을 쓰지 못하고 패랭이를 쓰거나 맨상투 차림을 하고 돌아다니며 양반의 부당한 부림을 받아야 했다.
또 토지 소유를 무한정하게 허락하여 양반과 지주들은 수천석, 수만석의 잉여생산을 거두어들이면서도 소작인에게는 8~9할의 소작료를 물렸다. 따라서 소작농들은 생존할 수 없는 처지에 몰려 춘궁기가 되면 굶어죽는 사태가 연이어졌다. 그런데도 국가에서 농지소유를 제한하려는 정책이나 소작료를 낮추려는 제도를 만들지 않았다.
소농민들과 하층민들은 이런 불평등의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오랜 투쟁을 벌여왔으나 번번이 좌절하고 말았다. 지배세력은 지배체제의 유지를 위해 완강하게 이를 개혁하지 않으려 했다. 농민군들은 집강소 활동을 통해 이를 실현하려 했다. 그리하여 노비들은 종문서를 불태워버리고 해방되었으며, 백정들은 패랭이를 벗어 던지고 양민과 같은 차림을 하고 돌아다녔다. 또 자작농과 소작농은 과도한 소작료나 고리채를 물지 않거나 부당한 국가수탈에 저항했다. 집강소가 설치된 지역은 바로 해방구였다.
또 집강소는 합의에 의해 조직을 결성하고 당면의 정책을 결정했다. 여기에는 모든 계층이 참여했다. 집강소 관계자와 일반 민중에게는 서로의 호칭을 접장(接長)으로 통일하여 부르게 했다. 곧 부인접장(여성), 동몽접장(어린이) 등 신분과 남녀와 나이를 떠나 동등한 호칭을 사용케 하여 사민(四民)평등의 의지를 드러냈다. 상하와 존비와 남녀의 차별관념을 타파하려는 평등의 호칭이었다. 접장 호칭의 등장은 러시아 혁명 뒤 ‘동무’라는 호칭을 쓴 시기보다 적어도 20여년 앞섰다."
동학 농민군은 사실 상당히 순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민란의 발생 자체가 모내기때문에 터진 거였습니다.
조선 후기 이앙법이 확산되면서, 모내기를 하는 농부는 소득이 늘어난 반면, 모내기를 못하고 직파법을 하는 농부는 소득이 상대적으로 감소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모내기를 하기 위해서는 대량의 물이 필요하고, 그러니 저수지가 있어야 합니다.
땅이 많으면 스스로 저수지를 만들거나, 하다못해 둠벙이라도 만들어 물을 저장해 둘 수 있었지만, 가난한 소작농들은 모내기에 쓸 물을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들은 물을 구하기 위해 저수지를 가진 대지주들에게 물값을 지불하기도 했었습니다. 농민들이 쓸 공용 저수지가 부족하였으니까요.
그런데 고부군수가 공용저수지를 짓겠다며, 땅은 정부가 낼 테니, 농민들이 부역을 해서 저수지를 지으면 5년간 물값은 공짜로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놓고는 다 지어지고 나자, 약속을 저버리고 모내기 물값을 걷겠다고 징수했습니다.
이에 농부들이 화가 나서 들고 일어난 것이 동학난입니다.
좀 더 상세한 내용은 제가 예전에 썼던 글을 참조해주셨으면 합니다.
https://dvdprime.com/g2/bbs/board.php?bo_table=comm&wr_id=17816914
이 민란에서 전봉준이 동학군 수뇌로 뽑힌 이유는 글을 쓸 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훈장 아들출신인 전봉준은 글을 쓸 줄 알았고, 그래서 농민들 사이에서 관아에 보낼 항의문서를 쓸 사람으로 뽑혔습니다.
이런 수준이다 보니, 종교지도자 동학 접주들은 그래도 이념이 좀 들어가 있다고 쳐도, 대다수 농민들은 말 그대로 무지렁이 순박한 농민수준이었습니다. 수도로 쳐들어가 왕을 죽이자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수도 한성에서 고종은 동학란을 다르게 보았습니다. 동학 농민군이 자기 목을 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동학 농민군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달래서 화해를 해놓고, 뒤로는 외세의 개입을 요청했습니다. 고종의 요청에 응한 청나라 군대가 들어옵니다. 그러자 일본군도 청군 진입에 맞불놓겠다며 들어옵니다.
이건 정보의 비대칭성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는 데,
학정을 폈다는 고부군수 조병갑은 고종이 뇌물 받고 임명한 관리였습니다.
당시 고종은 재정을 충당한다며 관직을 돈받고 파는 매관매직을 손수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Orz
고종은 조병갑이 탄핵되고 농민군이 수도까지 밀려오면 자기도 쫓겨난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막상 동학농민군은 조병갑이 고종에게 뇌물바치고 채용된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전통적인 종래의 가치관 - 간신들이 임금의 눈을 가리고 있을 뿐, 임금은 백성들을 살펴주리라- 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근왕론이 농민군내 주류 의견이었습니다.
그러나 1차 동학란이 조정과의 화해로 진정된 후,
고종이 뒤로 불러들인 외세들이 나타나고, 특히 일본군이 진입하여 한성 궁궐을 장악합니다. 일본군은 청나라 군대와 평양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청일전쟁), 승전의 기세를 타고 조선 수탈을 본격화합니다. 이에 동학 농민군은 재봉기를 합니다. 그래서 2차 동학 농민란의 주 목적중 하나가 일본군을 격퇴하자 이고 반외세 독립운동의 성격을 띕니다.
그러자 일본군은 고종의 승인을 받아(?), 동학 농민군 진압에 나섭니다.
고종은 옥새를 찍은 공문서로, 조선 관청은 일본군의 동학란 진압에 협조하라는 문서를 내보냅니다.
이에 일본군이 기관총으로 쓸어버리고 나면, 우리나라 관군이 죽은 농민군 목을 잘라서 효수해서 길거리에 걸어놓고 다니는 형태로 2차 동학란 진압이 이루어졌습니다.
고종은 조병갑을 판사로 임명하였고, 판사 조병갑은 동학교주 최시형의 재판을 맡아 사형을 선고합니다.
이게 삼남 지방 민심에 끼친 효과는 치명적이었습니다.
임금이 일본군과 한패가 되어, 백성들 목을 잘라 효수한다. 는 걸 직접 목격했으니까요. 일본군이 지시를 내리고 우리나라 관군 포졸들이 따르는 걸 직접 봤으니 충격이 컸습니다. 임금이 핍박을 받아서 저리했으리라 라고 생각해주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임금이 고부군수 조병갑을 판사로 임명하여 최시형에게 사형을 내리는 자리에 둔 것은 무슨 의미였겠습니까. 관청의 포졸들이 일본군 명령을 받고 조선 사람을 목베어 효수하고 다니는 것을 본 충격은 컸습니다.
저는 이게 우리나라를 공화국으로 만든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동학란은 가담자가 일백만명입니다. 당시 조선 인구는 천만이었습니다.
동학란이 삼남지방에 주로 국한되어 있었다는 것, 그리고 대가족제도였다는 것을 고려할 때, 거의 집집마다, 또는 한두집걸러 하나씩 동학란 참가했다고 봐야하고, 밑바닥 민심에서부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근왕의 명분을 들었던 마지막 민란 -동학란이 고종에 의해 무너진 후,
이 땅에서 시민들이 들고 일어난 다음번 대 봉기는 3.1운동이었습니다.
3.1운동은 고종황제의 죽음을 명분삼아 모여서
고종황제 장례일 3.1일에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거였지만,
https://ko.m.wikipedia.org/wiki/3%C2%B71_%EC%9A%B4%EB%8F%99
그 누구도 조선왕조 만세니 황제 만세를 더 이상 외치지 않았습니다. 근왕의 이름은 사라져버렸습니다.
왕에게 버림받은 백성들은,
일본의 침략앞에 스스로 서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3.1운동의 주체는 대한 사람들이고, 대표는 민족대표 33인이었습니다.
독립선언문을 자세히 읽어보시면 왕의 왕자도 안 나옵니다. 고종황제의 장례날 모인 이들은 더 이상 왕의 신민으로 살 생각이 없었습니다.
3.1 독립선언문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ho3312&logNo=221477206255&categoryNo=48&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
3.1운동으로부터 한달 뒤인 1919년 4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임시 헌장(헌법)이 발표됩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헌법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https://ko.m.wikipedia.org/wiki/%EB%8C%80%ED%95%9C%EB%AF%BC%EA%B5%AD_%EC%9E%84%EC%8B%9C_%ED%97%8C%EC%9E%A5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
제2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통치한다.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
제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종교,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통신, 주소 이전, 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누린다.
제5조 대한민국의 인민으로 공민 자격이 있는 자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다.
제6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교육, 납세 및 병역의 의무가 있다.
제7조 대한민국은 신(神)의 의사에 의해 건국한 정신을 세계에 발휘하고 나아가 인류문화 및 평화에 공헌하기 위해 국제연맹에 가입한다.
제8조 대한민국은 구 황실을 우대한다.
제9조 생명형, 신체형 및 공창제(公娼制)를 전부 폐지한다.
제10조 임시 정부는 국토 회복 후 만 1개년 내에 국회를 소집한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라고 하는 것이 헌법 1조입니다.
구 황실은 예우상 우대를 받기는 하지만, 더 이상 나라의 주인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저는 지금 동학농민운동에서 황실에게 버림받았던 백성들과,
1919년 임시정부 수립과 헌장의 주권재민을 연결시켜서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의 실패(1895)와 3.1운동 (1919) 사이에는 26년의 격차가 있습니다.
이 사이를 메꿔주는 것이 1905년 매켄지 기자의 이야기입니다.
캐나다 출신으로 영국 데일리 메일지의 아시아 특파원이었던 F. A. 매켄지는 평온한 경성과는 달리 한반도 시골지역에선 민란과 진압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1907년 무작정 현지 취재에 나섭니다. 그래서 경기도로 나갔다가 양평에서 시골 의병들 (정미의병)을 만납니다. 매켄지가 이때 찍은 사진이 유명한 이겁니다.
https://mblogthumb-phinf.pstatic.net/20160522_1/kingforpoii_1463843874002rgWRU_JPEG/12_ohyh45.jpg?type=w2
매켄지는 의병들을 인터뷰하기도 했습니다.
이 인터뷰에서 의병들은 그날 아침 일본군과 싸워 전사자를 내며 패퇴한 군대인데도, 생각외로 담담하게 진술합니다.
"이기리라는 생각은 않습니다. 죽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예로 사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의병들은 자발적으로 일어나서, 죽을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의 존엄과 자유를 위해 싸웠고, 왕실은 거기에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정미 의병 전쟁-맥켄지가 기록한 의병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treeId=010701&tabId=03&levelId=hm_121_0090
"우리가 원주에 도착하기 전에 이 부근에서 틀림없이 의병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원주에서 15마일이나 20마일쯤 앞으로 나가면 의병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그 정도 거리가 되는 지점에서 양근(陽根)으로 향했다.
……(중략)……
처음 보았을 때 양근은 사람이 살지 않는듯 보였다. 그러나 주민들은 문 뒤에 숨어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얼마 후 어른이나 아이들이 살그머니 나와 접근해 왔다. 우리는 곧 친구가 되었다. 부녀자들은 도망쳐 버렸다. 그날 오후 우리는 집 구조가 꽤 좋은 한국 가옥의 마당에 여장을 풀었다. 나의 고용인이 앞쪽 안마당에서 저녁을 준비하고 있다가 돌연 들고 있던 것을 떨어뜨리고 급히 내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그는 몹시 흥분하여 “선생님, 의병이 나타났습니다. 여기에 군인들이 있습니다!”라고 소리쳤다.
다음 순간 5, 6명의 의병이 마당에 들어와 내 앞에서 정렬하더니 경례를 했다. 그들은 모두 18세에서 26세 정도의 청년들이었다. 영리하게 보이고 용모가 단정한 한 청년은 아직도 한국 정규군의 구식 제복을 입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군복 바지를 입었다. 이들 중 두 사람은 흐느적거리는 낡아빠진 한복을 입고 있었다. 가죽 구두를 신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허리에 손수 만든 무명 탄대(彈帶)를 감고 있었고, 거기에 총알이 반쯤 들어 있었다. 한 사람은 머리에 터키 모자 같은 것을 쓰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두건을 감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갖고 있는 총을 보았다. 여섯 사람이 각각 다른 다섯 종류의 무기를 갖고 있었는데 어느 것이나 제대로 쓸 만한 총이 없었다. 한 사람은 가장 낡은 유형의 화승총으로 알려져 있는, 총구로 탄환을 재는 구식 한국 총을 자랑스럽게 가지고 다녔다. 그 남자의 팔에는 도화선인 화승이 감겨 있었고, 앞쪽에는 화약 주머니와 장전용 탄환 주머니를 달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 총구로 탄환을 재는 총이 대부분의 의병이 쓰고 있는 무기였다. 총에 화약을 재기 위해 쓰는 꽂을대는 자기 집에서 나무를 깎아 만든 것이었다. 총신은 녹슬어 있었다. 총의 가죽 멜빵은 없고 대신 무명으로 만든 끈이 달려 있을 뿐이었다.
두 번째 남자는 구식 한국군 총을 갖고 있었는데, 너무나도 구식이어서 그 시대 최악의 견본이라고나 할 만한 물건이었다. 세 번째 남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또 한 사람은 아주 작은 스포츠용 총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아버지가 귀여워하는 열 살 정도 어린이에게 줄 수 있을 정도로 결코 해를 가하지 못할 물건이었다. 또 한 남자는 기마용 권총을 갖고 소총 탄창을 붙이고 있었다. 세 자루의 총에는 중국 마크가 붙어 있었다. 그 모든 총은 어느 것이나 녹슬어 있고 부식되어 있었다.
설마 이 사람들이 몇 주 동안이나 일본군에 항전할 것을 선언해 온 사람들이라니! 지금 이 순간에도 일본 정규군 1개 대대는 이 사람들과 그 전우들을 포위⋅섬멸하려고 작전 행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내 앞에 있는 사람 중에 세 사람은 날품팔이 노동자였다. 오른쪽에 서 있는 영리하게 보이는 젊은이는 분명히 하공사관으로서 행동하고 있었고, 그는 자기 전우들에게 군인으로서의 거동을 훈련시키려고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거기에 일곱 번째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무장은 하지 않고 양반풍의 좋은 옷차림을 한 상류 계급 한국인이었다. 다만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여위고 햇볕에 타 있었다.
……(중략)……
그들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많이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날 아침의 전투에 참가하고 일본군 앞에서 후퇴한 참이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더 유리하게 포진하여 40명으로 200명의 의병을 공격했고, 의병 측은 후퇴한 것이었다. 그러나 의병 측은 일본군 4명을 사살했으며 일본군 측은 단지 의병 2명을 살해하고 3명 정도에게 부상을 입혔을 뿐이라고 그들은 설명했다.
……(중략)……
잠시 후 그날 전투를 지휘한 장교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퍽 젊은 남자였으며 상류층의 한국인으로 통상적으로 입는 길고 흰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당신들이 여기에 있는 줄 알면 일본군이 틀림없이 이리로 올 텐데, 야간 공격에 대한 어떤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나요? 보초는 세워 놓았나요? 개울 쪽 도로는 방비하고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그는 “보초는 필요 없습니다. 주위에 있는 한국인 전부가 우리를 위해 감시를 해 주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다른 의병군의 조직에 대해 여러 가지로 그에게 물어 보았다. 그들은 도대체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 것일까? 그 대장이 나에게 해준 이야기로 미루어 보면 그들은 실제로 전혀 조직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각각 흩어져 있는 몇 개의 무리들이 아주 엉성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에 불과했다. 각지의 부유한 사람들이 기금을 제공했다. 그것을 그가 산재해 있는 한두 사람의 의병에게 은밀히 건네주면 그들이 각각 자기 주위에서 자기편을 모으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들의 전도가 반드시 밝은 것만은 아님을 인정하였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로 살기보다는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죽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중략)……
내가 가는 곳마다 들은 이야기는, 많은 전투에서 일본군이 부상자나 투항자의 전부를 조직적으로 살육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모든 경우가 그랬다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대개의 경우가 확실히 그러했다. 이 사실은 일본 측의 많은 전투 보고에 의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전투 보고서에 적힌 한국인 사상자 수를 보면 부상자나 투항자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고 죽은 자의 수가 너무나 많은 것이다.
또 한 가지 기록해 둘 필요가 있다. 일본군은 도처에 불을 지르고 다님과 동시에, 반란군을 도왔다는 혐의가 있는 자를 다수 사살했다. 한국인들이 나에게 이런 사실을 이야기해 줄 때 그들이 마지막에 꼭 하는 말은, 일제 사격을 가한 후 총살대를 지휘하는 일본 장교는 시체에 다가가 칼로 찌르거나 베거나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신빙성을 확실히 보증할 수 있는 어느 영국인에게도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후략)……
F. A. 맥켄지 저, 김창수 역, 『조선의 비극』, 을유문화사, 1984
조선 사람들은 스스로 일어섰으며, 자신들을 버린 왕을 잊은 채 홀로 싸웠습니다.
저는 조선 사람들이 노예로 살기보다 싸우다 죽으리라 고 인터뷰한 이 말들이,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을 외친 미 독립운동의 패트릭 헨리보다 못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자유와 독립을 위해 스스로 일어서고, 죽음을 알면서도 싸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홀로서기는 공화국 시민정신의 탄생이었습니다.
저는 현재 우리나라 헌법 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의 뿌리가 사람들 사이에 형성되게 된 것은 이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동학란때 왕에게 버림받고, 이후 이십여년간 자유와 독립을 추구하며 싸우다가 죽어간 의병들의 목숨값은 조선왕조의 백성이었던 사람들을 공화국 시민으로 바꾸는 데 쓰였습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일본과는 달리, 내가 나라의 주인이다 라는 정신이 일반 시민들 한명 한명에게까지 뿌리박혀 있는 것에는 이런 역사적 근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국가 정체로 서기까지에는 이후에도 수십년이 더 필요했지만,
이 땅의 사람들 마음속에서 왕조는 사라지고 공화국은 탄생하였습니다.
한반도에 공화국은 탄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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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 국가였고 군주제가 혁명 또는 외침에 의해 멸망당하면서 공화주의 의식이 자리잡은
중국,한국,베트남과 달리 일본은 이러한 변혁이 없이 군주제가 유지되는 결과를 낳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