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정치] 중국(습근평)의 한국전쟁 관련 주장에 대하여
최근 625(한국전쟁)에 대한 습근평의 발언에 대해 제가 아는 사실 위주로 의견을 답니다. 먼저 습근평의 발언을 보도한 두개의 신문 기사를 인용합니다. 뒤의 의견은 어디까지나 사실관계가 틀릴수 있거나 중요사항을 빼먹었을수 있습니다. 일시, 인명지명등은 모호한게 있습니다.
<신문 보도>
A신문
그(습근평)는 “미국은 중국의 경고를 무시하고 38선을 넘어 전쟁의 불길을 중북 접경까지 끌고 왔다”면서 “중국은 침략자를 때려눕혀 전 세계를 경천동지하게 했고 신중국의 대국 지위를 세계에 보여줬다”고 했다. “위대한 항미원조 전쟁의 승리로 제국주의 침략을 막아냈고, 신중국의 안전을 지켰으며, 한반도 정세를 넘어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를 지켜냈다”고 의미도 부여했다.
그는 “당시 중국과 미국의 국력은 큰 차이가 났지만, 중국군이 북한군과 힘을 합쳐 ‘미군 불패의 신화’를 깼다”면서 “이를 통해 지난 수백 년 동안 동양의 해안에 대포 몇 발만 쏘면 한 나라를 점령할 수 있다는 서방 침략주의자들의 생각을 무너뜨렸다”고 주장했다.
B신문.
(습근평)은“위대한 항미원조 전쟁은 제국주의 침략이 확장되는 것을 막고, 신중국의 안전을 지켰으며, 중국 인민의 평화로운 생활을 보위했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그는 “신중국 성립 초기 중국 인민들은 평화와 안정을 갈망했지만, 제국주의 침략자들은 중국 인민들에게 전쟁을 강요했다”며 “미국은 중국 정부의 거듭된 경고에도 북-중 국경까지 불을 질렀고, 동북 지방을 폭격해 국경 지역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심각하게 위협했다”
그는 이어 “항미원조 전쟁 중 중-조(북한) 양국 인민과 군대는 동고동락하며, 생사를 같이하며 피로 위대한 우의를 맺었다”며 “힘겨운 전투를 통해 미군의 불패신화를 깨뜨렸고, (서구 제국주의에 의한) 백년의 치욕을 완전히 지우고 ‘동아시아의 병자’라는 오명을 벗어던졌다”고 말했다.
<의견>
1. 한국전쟁은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이고 중국 인민들에게 전쟁을 강요했다.
- 습근평은 남침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음. 다만 한국전쟁의 성격과 의미를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이라고 표현하므로써 남침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교묘하게 비켜갔음. 이는 중국교과서와 비슷합니다. 남북한의 충돌이 알어나서 중국이 참전했다는 식입니다.
2. 제국주의적 침략이 확장되는 것을 막았다
- 한국전쟁을 계획한 것은 북한이고 이를 지원, 승인한 것은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모택동).
- 김일성이 스탈린을 만나 침략 승인과 대규모 군사원조를 약속받았을때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모택동의 동의를 얻으라고 함. 이후 김일성은 북경을 방문해 김일성에게 동의를 받음.
모택동이 침략을 승인한 이유로는 첫째, 사회주의 이념(사회주의 형제국 지지를 강조했던 이데올로기), 둘째, 국공내전시 북한의 전방위적인 도움과 인맥 셋째, 모택동의 야망(대한해협까지 공산주의 영향. 동아시아에서 황제노릇하고 싶어했기도)과 정세인식 넷째, 국공내전에 참여했던 조선인들의 요청(연변을 포함한 만주지역 한인들의 바람이기도 했음) 등. 이는 중국이 1950년말에 직접 파병하게되는 원인과 겹침.
- 미국은 이승만의 대규모 군사원조 요청에도 소규모 군사자문단를 남기고 철수. 이는 한반도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대규모 철수 완료. 침략전쟁을 할수 있는 국내외적 상황이 아니었음.
3. 미국은 중국의 거듭된 경고를 무시하고 북중경계까지 끌고 왔고 동북지방을 폭격했다.
- 미군(UN군)의 인천상륙이후 전세가 뒤집어졌을때 미군은 38선에서 잠시 주춤합니다. 왜냐하면 UN결의에서 탄생한 한국의 영토는 38선 이남이었고 이를 회복했기 때문에 더이상 진격하는 것은 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었습니다.
- 중국은 UN군의 38선 돌파 전후에 인도의 주중국대사를 통해서 (그리고 제네바나 동구권 주재 중국대사를 통해) 참전하겠다는 의사를 밝힙니다. 미국은 무시합니다.
- 중국의 동북지방 폭격은 사실로 보입니다. 미군은 기본적으로 한반도를 벗어나 중국까지 공격하는 것은 한국전쟁에서 일관되게 금지 합니다. 다만 폭격기의 압록강상의 다리 폭격, 전투기의 미그기와의 랠리는 불가피하게 북중국경을 넘거나 중국 일부지역(단동=단둥)에 폭격피해를 주었습니다.
- 참고로 한국전쟁중에 미국은 만주지역에 스파이(정보원)을 파견했습니다. CIA요원이나 국민당의 요원들을 파견했습니다. 대부분 생포되거나 피살된것으로 보입니다.
4. 항미원조 전쟁 중 중-조(북한) 양국 인민과 군대는 동고동락하며, 생사를 같이하며 피로 위대한 우의를 맺었다
- 중국은 북한군이 패퇴하자 지원(자원)군이름으로 보내지만 실제는 정규군이었습니다. 물론 자원자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만주지역에서는 특히 조선족을 중심으로 자원자 모집을 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선전의 의미가 큽니다.
- 중국은 1950년 말에 북한과 중조연합사(정확한 명칭은?)를 조직합니다. 중국군과 북한군을 하나의 조직밑에 둔것입니다. 북한군 전력이 거의 형해화되었기때문에 중국군이 실질적으로 주가 되었고 사령관도 팽덕회가 맡습니다. 부사령관 등 다른 직위는 북한과 중국이 나눠 가집니다. 지원군인데 사령관이 북한의 장성이 아니라 중국군이 맡은 것입니다. 그래서 몇십년동안 중조연합사의 조직을 비밀로 합니다. (북한판 한미방위조약)
- 그럼 중조연합사는 문제없이 잘 운영되을까요. 그건 아닙니다. 중국군(지도부 포함)은 북한군을 무시했고 북한군은 김일성을 포함해서 겉으로는 지원군으로 여겼지만 속으로는 불만이 많았습니다. 예컨대 구체적인 작전에 대해 이견이 표출되었는데 중국군은 보급과 휴식을 위해 재편성시간을 가졌는데 북한군은 왜 공세를 늦추느냐고 불만이 많았습니다.
- 중국군에 대한 불만은 한국전쟁이후에도 계속 문제가 됩니다. 심하게 말하자면 남한에서 미군이 누렸던 특수한 지위를 북한에서 중국군도 동일하게 갖습니다. 중국군대가 북한군대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안하무인격의 행태를 보입니다. (장관이나 고위급을 억류하거나 중국군인들의 온갖 악행들과 민폐)
5. 신중국의 대국 지위를 세계에 보여주고 신중국의 안전을 지켰다.
- 신중국 성립후 불과 2년도 안된 상황에서 일어난 한국전쟁은 중국에 나쁜 방향으로 작용했습니다. 중국내의 막대한 물적, 인적 피해는 별도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 먼저 대만 침략이 영원히 불가능해졌습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미 7함대가 대만해협으로 이동해서 해남도 점령 다음 목표였던 대만 해방이 현재까지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 중국내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모두 경직성이 심해졌습니다. 대약진, 문화대혁명 이전의 반동적인 움직임이 모든 분야에서 일어났고 많은 인명이 간첩, 반동분자라는 이름으로 죽었습니다.
- 미국과의 관개개선도 1972년까지 수십년 늦춰집니다. 미국의 자본, 투자, 기술 등이 필요했는데 완전히 적대적인 관계로 돌아서면서 불가능해졌고 외교에서도 입지가 좁아졌습니다.
- 물론 그들의 말대로 중국의 위상을 높여준 면도 있습니다. 한국전쟁중에 소련은 더이상 지원하지 않은 상태에서 중국이 전적으로 도맡아했기 때문에 명분상으로는 그렇게 말할수 있다고 봅니다. 스탈린이 구상한 소련독점지배하에 동아시아 지역 대장으로서는 확실한 위치를 차지했다고 볼수 있습니다.
- 한가지 더 생각해볼만 것은 1951년 티벳침략입니다. 한국전쟁덕에 조용히 묻혀졌습니다. (물론 한국전쟁이 없었다고 해도 과연 미국이 개입했을까지는 또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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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한결같은 정책이죠... 적국과 국경을 맞닥드리지 않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통일을 강하게 반대 할 가장 강력한 세력일 겁니다. 아마 러시아는 방관, 중국과 일본은 반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