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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정치]  중국(습근평)의 한국전쟁 관련 주장에 대하여

파고비지철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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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4
Updated at 2020-10-26 17:08:59

최근 625(한국전쟁)에 대한 습근평의 발언에 대해 제가 아는 사실 위주로 의견을 답니다. 먼저 습근평의 발언을 보도한 두개의 신문 기사를 인용합니다. 뒤의 의견은 어디까지나 사실관계가 틀릴수 있거나 중요사항을 빼먹었을수 있습니다. 일시, 인명지명등은 모호한게 있습니다.

<신문 보도>
A신문

그(습근평)는 “미국은 중국의 경고를 무시하고 38선을 넘어 전쟁의 불길을 중북 접경까지 끌고 왔다”면서 “중국은 침략자를 때려눕혀 전 세계를 경천동지하게 했고 신중국의 대국 지위를 세계에 보여줬다”고 했다. “위대한 항미원조 전쟁의 승리로 제국주의 침략을 막아냈고, 신중국의 안전을 지켰으며, 한반도 정세를 넘어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를 지켜냈다”고 의미도 부여했다.
그는 “당시 중국과 미국의 국력은 큰 차이가 났지만, 중국군이 북한군과 힘을 합쳐 ‘미군 불패의 신화’를 깼다”면서 “이를 통해 지난 수백 년 동안 동양의 해안에 대포 몇 발만 쏘면 한 나라를 점령할 수 있다는 서방 침략주의자들의 생각을 무너뜨렸다”고 주장했다.


B신문.
(습근평)은“위대한 항미원조 전쟁은 제국주의 침략이 확장되는 것을 막고, 신중국의 안전을 지켰으며, 중국 인민의 평화로운 생활을 보위했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그는 “신중국 성립 초기 중국 인민들은 평화와 안정을 갈망했지만, 제국주의 침략자들은 중국 인민들에게 전쟁을 강요했다”며 “미국은 중국 정부의 거듭된 경고에도 북-중 국경까지 불을 질렀고, 동북 지방을 폭격해 국경 지역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심각하게 위협했다”
그는 이어 “항미원조 전쟁 중 중-조(북한) 양국 인민과 군대는 동고동락하며, 생사를 같이하며 피로 위대한 우의를 맺었다”며 “힘겨운 전투를 통해 미군의 불패신화를 깨뜨렸고, (서구 제국주의에 의한) 백년의 치욕을 완전히 지우고 ‘동아시아의 병자’라는 오명을 벗어던졌다”고 말했다.


<의견>
1. 한국전쟁은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이고 중국 인민들에게 전쟁을 강요했다.
- 습근평은 남침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음. 다만 한국전쟁의 성격과 의미를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이라고 표현하므로써 남침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교묘하게 비켜갔음. 이는 중국교과서와 비슷합니다. 남북한의 충돌이 알어나서 중국이 참전했다는 식입니다.


2. 제국주의적 침략이 확장되는 것을 막았다
- 한국전쟁을 계획한 것은 북한이고 이를 지원, 승인한 것은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모택동).
- 김일성이 스탈린을 만나 침략 승인과 대규모 군사원조를 약속받았을때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모택동의 동의를 얻으라고 함. 이후 김일성은 북경을 방문해 김일성에게 동의를 받음.
모택동이 침략을 승인한 이유로는 첫째, 사회주의 이념(사회주의 형제국 지지를 강조했던 이데올로기), 둘째, 국공내전시 북한의 전방위적인 도움과 인맥 셋째, 모택동의 야망(대한해협까지 공산주의 영향. 동아시아에서 황제노릇하고 싶어했기도)과 정세인식 넷째, 국공내전에 참여했던 조선인들의 요청(연변을 포함한 만주지역 한인들의 바람이기도 했음) 등. 이는 중국이 1950년말에 직접 파병하게되는 원인과 겹침.
- 미국은 이승만의 대규모 군사원조 요청에도 소규모 군사자문단를 남기고 철수. 이는 한반도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대규모 철수 완료. 침략전쟁을 할수 있는 국내외적 상황이 아니었음.

3. 미국은 중국의 거듭된 경고를 무시하고 북중경계까지 끌고 왔고 동북지방을 폭격했다.
- 미군(UN군)의 인천상륙이후 전세가 뒤집어졌을때 미군은 38선에서 잠시 주춤합니다. 왜냐하면 UN결의에서 탄생한 한국의 영토는 38선 이남이었고 이를 회복했기 때문에 더이상 진격하는 것은 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었습니다.
- 중국은 UN군의 38선 돌파 전후에 인도의 주중국대사를 통해서 (그리고 제네바나 동구권 주재 중국대사를 통해) 참전하겠다는 의사를 밝힙니다. 미국은 무시합니다.
- 중국의 동북지방 폭격은 사실로 보입니다. 미군은 기본적으로 한반도를 벗어나 중국까지 공격하는 것은 한국전쟁에서 일관되게 금지 합니다. 다만 폭격기의 압록강상의 다리 폭격, 전투기의 미그기와의 랠리는 불가피하게 북중국경을 넘거나 중국 일부지역(단동=단둥)에 폭격피해를 주었습니다.
- 참고로 한국전쟁중에 미국은 만주지역에 스파이(정보원)을 파견했습니다. CIA요원이나 국민당의 요원들을 파견했습니다. 대부분 생포되거나 피살된것으로 보입니다.


4. 항미원조 전쟁 중 중-조(북한) 양국 인민과 군대는 동고동락하며, 생사를 같이하며 피로 위대한 우의를 맺었다
- 중국은 북한군이 패퇴하자 지원(자원)군이름으로 보내지만 실제는 정규군이었습니다. 물론 자원자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만주지역에서는 특히 조선족을 중심으로 자원자 모집을 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선전의 의미가 큽니다.
- 중국은 1950년 말에 북한과 중조연합사(정확한 명칭은?)를 조직합니다. 중국군과 북한군을 하나의 조직밑에 둔것입니다. 북한군 전력이 거의 형해화되었기때문에 중국군이 실질적으로 주가 되었고 사령관도 팽덕회가 맡습니다. 부사령관 등 다른 직위는 북한과 중국이 나눠 가집니다. 지원군인데 사령관이 북한의 장성이 아니라 중국군이 맡은 것입니다. 그래서 몇십년동안 중조연합사의 조직을 비밀로 합니다. (북한판 한미방위조약)
- 그럼 중조연합사는 문제없이 잘 운영되을까요. 그건 아닙니다. 중국군(지도부 포함)은 북한군을 무시했고 북한군은 김일성을 포함해서 겉으로는 지원군으로 여겼지만 속으로는 불만이 많았습니다. 예컨대 구체적인 작전에 대해 이견이 표출되었는데 중국군은 보급과 휴식을 위해 재편성시간을 가졌는데 북한군은 왜 공세를 늦추느냐고 불만이 많았습니다.
- 중국군에 대한 불만은 한국전쟁이후에도 계속 문제가 됩니다. 심하게 말하자면 남한에서 미군이 누렸던 특수한 지위를 북한에서 중국군도 동일하게 갖습니다. 중국군대가 북한군대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안하무인격의 행태를 보입니다. (장관이나 고위급을 억류하거나 중국군인들의 온갖 악행들과 민폐)

5. 신중국의 대국 지위를 세계에 보여주고 신중국의 안전을 지켰다.
- 신중국 성립후 불과 2년도 안된 상황에서 일어난 한국전쟁은 중국에 나쁜 방향으로 작용했습니다. 중국내의 막대한 물적, 인적 피해는 별도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 먼저 대만 침략이 영원히 불가능해졌습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미 7함대가 대만해협으로 이동해서 해남도 점령 다음 목표였던 대만 해방이 현재까지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 중국내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모두 경직성이 심해졌습니다. 대약진, 문화대혁명 이전의 반동적인 움직임이 모든 분야에서 일어났고 많은 인명이 간첩, 반동분자라는 이름으로 죽었습니다.
- 미국과의 관개개선도 1972년까지 수십년 늦춰집니다. 미국의 자본, 투자, 기술 등이 필요했는데 완전히 적대적인 관계로 돌아서면서 불가능해졌고 외교에서도 입지가 좁아졌습니다.
- 물론 그들의 말대로 중국의 위상을 높여준 면도 있습니다. 한국전쟁중에 소련은 더이상 지원하지 않은 상태에서 중국이 전적으로 도맡아했기 때문에 명분상으로는 그렇게 말할수 있다고 봅니다. 스탈린이 구상한 소련독점지배하에 동아시아 지역 대장으로서는 확실한 위치를 차지했다고 볼수 있습니다.
- 한가지 더 생각해볼만 것은 1951년 티벳침략입니다. 한국전쟁덕에 조용히 묻혀졌습니다. (물론 한국전쟁이 없었다고 해도 과연 미국이 개입했을까지는 또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



25
댓글
옆집
3
2020-10-26 08:17:04

 중국의 한결같은 정책이죠... 적국과 국경을 맞닥드리지 않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통일을 강하게 반대 할 가장 강력한 세력일 겁니다.  아마 러시아는 방관, 중국과 일본은 반대...  

WR
파고비지철철
2020-10-26 08:23:12

모택동 등이 실제 참전과정 논의에서 순망치한이라는 용어를 씁니다. 그래서 중국이 통일을 반대하지 여건과 조건을 우리의 지도자들이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numero1
1
2020-10-26 08:21:16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WR
파고비지철철
1
2020-10-26 08:31:04

긴글 읽어주셔서 저도 감사드립니다.

韓風相隨
Updated at 2020-10-26 08:28:29

잘 읽었습니다

 

중국은 애초에 미국이 참전했을 때 38선까지만 오고 그 이상 미국은 올라오지 않은 상태에서 

38선 이북에서 투닥거리는 남북 두 나라가 알아서 해결하도록 요구했죠

습근평씨가 이야기한 내용은 바로 이런 배경이죠    

 

1951년 티벳 문제에 대해서는 마리 끌레르 베르제르의 <중국현대사>에서 중국이 영국-인도와 협상한 결과라고 읽었던 것 같습니다. 아쉽게도 지금 책이 주변에 없어서 정확한 내용은 확인하게 힘드네요 

WR
파고비지철철
1
2020-10-26 08:41:58

저는 네루가 중국에게 당한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네루는 티베과의 역사적,경제적, 외교적 이해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중국이 직접 통치하는것을 반대했습니다. 국제적으로 중국 공산당을 지지했던 네루의 입장에서는 중국이 설마 침략해서 완충지대를 없애고 직접 지배까지 노릴줄 몰랐던 것입니다(중국이 티벳 침략의 의사 타진을 은근히 하는데도 말입니다. 중국도 인도의 개입 가능성이 있다고 봤습니다) 오래전에봤던거라 틀릴수 있습니다.

skybabo
1
2020-10-26 08:32:24

앞에있으면 한마디 해주고 싶네요 야이 ㅅㄲ야 싸우고 싶으면 늬들끼리 가서 치고 받아라 남의 아픈역사 가지고 왜곡해서 시비걸지말고!

WR
파고비지철철
1
2020-10-26 08:45:38

특히 전체주의 정권의 지도자들은 걸러 들어야겠지요. 현재의 중국-북한관계때문에라도 저렇게 할겁니다.

inaba
1
2020-10-26 08:40:40

 제가 알기로는 마오쩌둥은 미군의 상륙작전 이전부터 본격적인 참전 의사를 가지고 있었고, 스탈린이 오케이 하길 바랬던 것으로 압니다. 중국군의 참전이 늦어진건 중국이 아닌 스탈린의 의지라고 봐야할지도요. 결과적으로 그런 모양새인 것처럼 되긴 했다지만, 과연 그게 그들의 의지였는지는 좀.... 전 아니라고 봅니다. 그래서 중국이 38선을 말하는게 그들 입장의 시각으로 보려고해도 좀 말이 안되는거 같아요.

WR
파고비지철철
1
2020-10-26 08:51:47

중국도 무턱되고 참전할군 없고 패전위기에 가까운 북한이 공식요청하기까지는 논의와 준비를 합니다. 중국도 중국내지에 흩어져있는 군대와 물자를 후송할수 있는 시간도 필요했습니다. (북한은 준비부터 침략까지 줄곧 소련과 소련군에 의지했기때문에 패퇴시까지는 중국은 소려대상이 아니었습니다. 625바발 시점도 뒤늦게 통보만 했을정도입니다)

inaba
1
2020-10-26 09:36:33

말씀하신대로 비슷하게 알아왔었는데, 예전에 덕질하면서 링크 따라가다보니 중국 베이징대 역사학과 김동길 교수라는 분이 쓴 논문이 있더군요. 

https://www.kci.go.kr/kciportal/po/search/poArtiSearList.kci 

요기 가시면 원문 다운로드도 됩니다.

러시아 외교문서 공개 관련 재밌는 것들이 있어서 이래저래 찾으면서 제가 즐겨찾기를 해놨습니다. 물론 이게 진실이라고 제가 감히 말할수는 없고, 그걸 읽을 능력은 더더욱 없지만, 한글 논문이고 해서 읽었던 기억이 있었습니다. 한번 보시면 제가 어떤걸 보고 리플달았는가는 말씀드릴수 있을것 같아 붙여봅니다.

WR
파고비지철철
1
2020-10-26 09:50:42

들어가서 저자 검색해서 논문 받았습니다. 시간내서 차분하게 읽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이글은 최근 중국의 한국전쟁한 주장이 많이 올라와서 급하게 쓴 글이라 오류도 있고나 통설과도 틀릴수 있어서 의견 정도로만 읽어주시길 ㅠㅠㅠ

블라지미ㄹ
Updated at 2020-10-26 09:06:58

예전에 중국갔을때 전쟁박물관에 갔었는데 그곳에 김일성이 모택동에서 보낸 참전요청 편지가 전시되어 있더군요.   

타이핑된 것이아니라 손글씨로 쓴것인데 첫 머리가   ' 모동지 ' 이렇게  시작되는데 편지의 전체적 분위기로는 니들이 당연히 와서 도와야지 뭘 꾸물거리시나 하는 분위기로 기억됩니다.

 

 

WR
파고비지철철
2020-10-26 09:25:31

제가 같은 편지를 봤는디는 모르겠지만 제가 읽은 김일성의 편지는 다급성이 느껴졌었습니다. 소련은 더이상 지원 안해준다고 하니 중국밖에 기댈수가 없었던 사정을 알고 나서 그런것이겠지만요. *그러고 보니 중국에서는 군사, 무기박물관은 한번도 가본적이 없네요. 중국도 충실히 꾸며놓았을것 같은데요.

별똥별집사
Updated at 2020-10-26 14:26:09

문제는 중국이 한국전 참전을 결정한 시기가 중국 국경까지 올라오기 전이었다는거죠. 중국 국경까지 왔을지라도 이것은 구실에 불과할 뿐입니다. 국경을 넘어 남한까지 침입했으니까요.

WR
파고비지철철
2020-10-26 10:35:55

그렇더라도 중국내부의 참전논란과 그 후과에 대해서는 고려해졸만한 부분이 많다고 봅니다. 나중의 일이지만 중국지도부는 김일성의 오판에 대해서 은근히 책망하기도 합니다. (이를 평가하는 중국학자들도 호의적이지는 않은 느낌입니다)

Kaka-Cn
2020-10-26 10:27:18

중국의 참전이 미국등 연합군의 38선 돌파북진에서 찾는 견해도 있지만, 사실상 중국참전의 계기는 미국이 대만을 중국에 귀속시키기로한 중국과의 합의를 깨고 한국전쟁 개전 극초기에 미 7함대로 대만해협을 봉쇄한데서 부터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당시 중국의 대만침공이 아주 임박해 있었고, 중국이 대만을 침공한다면 무난하게 대만을 점령할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즉 미국의 대만해협 봉쇄는 중국내전에 적극적 개입의사를 표현한 것이고, 남한에서의 미국이권을 지키는 것을 넘어서 북한지역까지 점령을 염두에 둔 결정이었기 때문에 중국이 미국에 대한 적극적 대응을 고려하지 않을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된거죠.

WR
파고비지철철
2020-10-26 10:41:19

중국내전에 무기나 경제원조외에 방관했던 마국이어서 중국으러서는 대만침략을 50년인가 51년인가로 상정하고 준비했었죠. 미7함대가 대만햅협애 전쟁발발 즉시 파견되니 공산당 지도부가 격앙하기는 합니다. 그리고 이는 중국의 참전의 중요한 요인이란것은 인정합니다만 그것이 유일한 요인은 아니라고 봅니다.

Kaka-Cn
2020-10-26 10:55:47

중국의 대만침공은 1950년 하반기정도였고 1950년 1월에 미국은 중국의 대만귀속을 용인한다는 합의를 한 상태였으므로 1950년7월초에 미국의 대만해협 봉쇄는 중국으로서는 전혀 예상을 못했고, 그때 미국의 대만해협 봉쇄는 현재까지 이르는 70년이상의 분단으로 이어진거죠. 중국은 한국전쟁전이나 개전후에도 한국전쟁에 참전할 의지도 역량도 없었습니다. 대만 침공점령이 최우선 목표였기 때문에 한국전쟁에 개입한다는 것은 사실상 말도 안되는 결정인거죠. 즉 미국의 대만해협 봉쇄가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미군의 38선돌파 북진은 대만해협 봉쇄와 함께 중국에 엄청난 위협으로 대두된겁니다.

WR
파고비지철철
2020-10-26 11:20:03

그렇다면 만약 중국이 대만 사태가 없었다면 참던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이에 대해서 회의적입니다. 대만사태 여부를 떠나서도 중국이 참전해야할 이유가 여러가지가 있었다고 봅니다.

Kaka-Cn
Updated at 2020-10-26 11:38:52

대만해협봉쇄와 연합군의 38선 돌파 북진이 없었다면 중국이 참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90%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중국의 당면목표는 대만점령였고, 중국본토를 점령한지 겨우 6개월밖에 안되었고 무기체계도 극히 열악한 중국이 제2차세계대전 승전국이자 당시 압도적 패권국인 미국을 상대로 전쟁를 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결정이죠. 그러니까 임표나 팽덕회등 한국전 참전을 모두 반대했고, 마오쩌뚱이 밀어부쳐서 참전한거자나요. 미국 역시 대만해협 봉쇄나 38선이북 진공은 중국군 전력을 극히 무시했기 때문에 내릴 수 있었던 결정이고, 중국이 참전한다 해도 쉽게 이길수 있다는 안이한 판단을 한 결과죠.

WR
파고비지철철
2020-10-26 11:53:43

몇가지만 적아보겠습니다. 1. 명분(이념) 당시의 공산권의 지도자들이 밑고있던 공산주의 이념은 명분에 불과했을까요. 반공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목적은 다른데 있고 이념은 거짓일뿐이었을까요. 그시대 유럽을 포함하여 공산주의는 영향력이 지금보다 더 월등했었고 동유럽이나 동아시아는 밀할나이 없을 정도로 보편적이었습니다. 각국 공산당과 지도자들과 지지자들의 국제주의는 공산주의 역사만큼 오래되고 근본적인 이념이었습니다. 2. 1과 관련해 해방후 국공내전 승리까지 북한의 지원은 전방위적이었고(북한군이 직덥 참던 안한것 빼고는 거의 모든 분야 지원) 중국은 이에대해 큰 빚을 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공산당 지도부의 인적결합은 덤이고요. 국가수립이전에는 당대당 협력관계얐던것이 신중국이 수립되자 각종 협정을 신속히 맺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3. 기타 모택동 개인의 야망과 정세인식, 적대국과 국경을 맞대야만 하는 상황, 중국공산당의 패권의식, 스탈림의 책임떠넘기기 등은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Kaka-Cn
Updated at 2020-10-26 13:42:06

1950년의 중국은 갓 공산혁명을 이루어낸 공산권의 변두리국가였습니다. 공산혁명 원조국가이자 종주국/수출국은 소련이지, 중국은 그런 역량자체가 없었습니다. 1927년 난창봉기이후 20년이상를 장개석의 국민당군에 일방적으로 밀리다가 1948년이후 야구로 얘기하면 9회말 만루 역전홈런을 터트린겁니다. 즉 1950년의 중국은 극적으로 공산혁명을 이뤄낸 상태로 대만을 점령함과 동시에 내부수습에도 힘겨운 상태였습니다. 1950년은 당시 똑같이 국경을 접한 북베트남과 라오스에서는 프랑스를 상대하여 공산 베트민군이 힘겨운 전쟁을 하던 시기입니다. 중국은 베트민군에 무기를 지원했을뿐 참전은 엄두도 못내던 시기입니다. 2차대전에서 지리멸렬했던 프랑스군에 대항해서도 참전엄두도 못내던 중국입니다. 즉 당시 중국은 공산혁명의 수출역량은 전혀 없었다고 봐야 합니다. 북한이 중일전쟁 종전후 국민당군과의 내전에서 엄청난 도움을 준것은 당연히 사실이지만, 미국을 상대로 중국의 운명을 걸 정도의 도박은 할수가 없었다고 봅니다. 유엔군의 북진없이 한국군 단독 북진을 했다면, 통일이 되었을 가능성은 반반이라고 봅니다. 북한군이 낙동강전선에서 후퇴하면서 막대한 타격을 받은것도 사실이지만, 장비를 제외한 인원은 상당히 보존이 된 상태로 후퇴를 하였고, 당시 한국군의 전투력 역시 극히 안습한 상태였으므로 국군 단독의 북진통일은 상당히 불확실한 상태였다고 봅니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미군주도의 한반도 통일과 한국군주도의 한반도 통일은 상당히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을거라고 봅니다. 즉 1948년 신탁통치가 끝난 상태였으므로 한국군에 의한 한반도 통일이 이루어졌다면, 상당히 빠른 시간내로 미군 및 연합군의 철수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미군이 주둔하지 않는 통일 한반도는 중국에 그리 큰 부담으로 작용하진 않았을거로 봅니다. 그러나 미군주도로 한반도가 통일된다면 미국의 영향력이 클수밖에 없으므로 중국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을겁니다. 특히 이미 대만해협을 봉쇄해서 중국에 대한 노골적 무력개입을 선언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한국군만이 단독 북진했으면 결국 북한군과 전선이 고착화되면서 38~39선 어느 지점에서 휴전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고, 중국군은 참전을 안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역사를 가정해 본다는 것이 의미는 없지만 미군이 북진을 하지않고, 중국군이 참전을 안했으면 한국전쟁의 피해는 훨씬 줄어들었을겁니다. 사실 한국전쟁 인명피해의 대부분이 1951년 중국군 춘계공세후 전선이 고착된 이후 발생했자나요. 의미없는 2년기간동안 손실이 엄청났으니까요.

키노
2020-10-26 10:2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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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위대한 전쟁(자칭)에 참여해서 가장 큰 공로를 세운

사람의 최후......팽덕회

이게 습근평이가 원하는 권력의 정체죠 

WR
파고비지철철
Updated at 2020-10-26 10:47:10

지원군 총사령관은 임표가 먼저 언급된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임표는 간강을 이유로 거절했고 참가에 회의적인 면이 있던 팽덕회가 사령관을 맡게되죠. 미군에 비해 형편없는 보급과 무기와 동맹군인 북한군의 형편없는 전력에도 불구하고 나름 전과를 올렸는데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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