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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한잔]  [역사] 토함산의 붕괴와 석씨 세력의 몰락

중혼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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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14-02-08 20:46:05

  
   ‘토함산이 무너졌다.’니 이 무슨 소린가 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신라는 그 역사의 초기에 박, 석, 김이라는 3개의 성(姓)씨 집단이 왕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이들이 순서에 따라 돌아가면서 왕좌에 앉았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때 그때의 권력 관계와 상호간의 타협에 따라 왕업이 이어져 나갔던 것입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박씨 집단에서는 시조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 이후로 신라 역사의 전 기간에 걸쳐 모두 10명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석씨는 제 4대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을 시작으로 해서 총 8명의 왕을 배출하였습니다. 김씨로서는 제 13대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이 가장 먼저 옥좌에 앉았고 17대 내물이사금(奈勿尼師今) 이후부터는 신라의 왕계를 김씨가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발견됩니다. 뭐냐 하면, 16대 흘해이사금(訖解尼師今)을 끝으로 석씨는 신라 왕실의 계보에서 자취를 감춰버린다는 것입니다. 아니, 왕계표에 나타나지 않는 정도를 벗어나 신라의 전체 역사에 걸쳐서 거의 존재를 드러내지 못합니다. 그건 박씨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묻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지만 박씨는 김씨가 왕권을 독점하기 시작한 이후의 기간에도 간간히 왕비족으로 모습을 나타냅니다. 뿐만 아니라 신라 말기인 912년에는 박씨인 신덕왕(神德王)이 즉위하여 자신들의 세력이 아직도 건재함을 자랑합니다.

   이런 사정을 검토해 보노라면, 석씨는 어떤 계기를 거쳐 아주 철저하게, 도저히 재기할 수 없을 만큼의 정치적 타격을 입고 밑바닥까지 몰락해버렸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석씨는 어떠한 이유로 이와 같은 도태의 길로 접어들었던 것일까요? 다음의 사서 기록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이서고국이 금성을 공격해왔다. 우리나라가 군사를 크게 동원하여 이를 방어하였으나 물리칠 수 없었다. 그 때 갑자기 이상한 병사들이 나타났는데 그 수를 모두 헤아릴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댓잎을 귀에 꽂았는데 우리 군사와 함께 적군을 쳐부수고 난 후에는 돌아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수만 개의 댓잎이 죽장릉에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백성들이 ‘돌아가신 임금께서 하늘의 군사를 보내 전쟁을 도우셨다’고 말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례이사금 14년조)

   유례이사금(儒禮尼師今)은 석씨로서 신라의 14대 임금이었습니다. 그는 재위 14년(297)에 오늘날의 경상북도 청도군으로 비정(比定)되는 이서고국(伊西古國)의 공격을 받습니다. 전투는 사로국(신라)에 불리하게 진행되어 유례이사금은 결정적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때 바람처럼 나타난 원병들이 있었으니 죽장릉으로부터 달려온, 그리고 댓잎을 귀에 꽂은 이른바 죽엽군(竹葉軍)이었습니다. 이 죽엽군의 구원으로 유례이사금과 석씨 세력은 왕권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죽엽군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삼국사기>는 이들을 사람이 아닌 귀신들로 이루어진 군대[陰兵]처럼 설화조로 묘사하고 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귀신이 실제 전투에 참여해서 창칼을 휘둘렀을 가능성은 별로 없습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죽장릉(竹長陵)이 바로 선왕인 김씨 미추이사금의 무덤이었다는 점입니다. 사건의 정황을 살펴보건대, 유례이사금을 비롯한 석씨 세력은 죽장릉으로 상징되는 김씨 족단의 병력 지원을 받고서야 이서고국의 반란을 겨우 진압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이미 석씨 족단의 힘은 서서히 쇠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김씨인 내물이사금이 즉위하는 4세기 중반에 이르면 왕위는 김씨에 의해 장악됩니다. 비정한 권력의 세계에서 석씨들도 뭔가 살아남기 위한 전략을 짜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비록 내물이사금을 기점으로 하여 왕위의 김씨 독점 시대가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김씨 족단 내부에서도 왕좌를 두고 권력 다툼이 있었습니다. 바로 내물계와 실성계가 그 싸움의 주역들이었습니다.

   당시는 고구려가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던 때였는데, 내물이사금은 고구려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왕 37년(392)에 김씨 세력 내의 실력자인 실성(實聖)을 고구려로 보내버립니다. 졸지에 머나먼 이국땅에서 인질 생활을 하게 된 실성의 입장에서는 이를 득득 갈 만도 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실성의 어머니가 바로 석씨인 이리부인(伊利夫人)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석씨는 바로 김씨 족단 내의 실성계와 손을 잡고 정치 생명을 이어나가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때가 되어 내물이사금이 천수를 다할 무렵(401년), 경주에 침입한 왜병을 물리쳐준 대가로 신라에 대한 간섭을 시작하게 된 고구려는 자국 내에 머물고 있던 실성을 신라로 귀국시켜 왕위에 오르게 합니다. 실성은 고구려에 거의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머물면서 어느덧 고구려의 입맛에 맞는, 다루기 쉬워 보이는 인물로 변모했던 것입니다.

   자신들이 지원했던 실성계가 집권하자 석씨 세력도 모처럼 활기를 띠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권력의 세계입니다. 실성이사금은 당연히 자신의 자손으로 왕계를 이어나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라의 종주국 노릇을 하고 있던 고구려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은 특정한 가문이 신라 왕실을 계속해서 장악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신라에 대한 자신들의 통제력이 흔들리게 될테니까요. 그래서 고구려는 실성이사금의 다음 임금으로 내물이사금의 아들인 눌지(訥祗)를 지목합니다.

   결국 고구려군의 지원을 등에 업은 눌지는 쿠데타를 일으켜 실성이사금 정권을 타도하고 새로이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으로 즉위(417)하게 됩니다. 자, 그러면 실성계에 협력하여 세력을 유지하고자 했던 석씨 족단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름 5월, 토함산이 무너지고 샘물이 세 길 높이로 솟아올랐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실성이사금 15년[416]조)

   이것은 실성이사금이 눌지의 정변으로 시해되기 약 1년 전쯤의 기사입니다. 여기서 토함산의 붕괴는 석씨 집단의 말로를 간접적으로 증언하는 기록으로 생각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역사책에서 여러 차례 석씨 세력과 토함산을 연결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탈해이사금(토해吐解라고도 한다.)이 왕위에 올랐다. 이 때 나이가 62세였다. 성은 석이며 왕비는 아효부인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서문)

   이 기사를 보면 석씨의 시조인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의 다른 이름이 토해(吐解)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름부터가 벌써 토함(吐含)과 비슷합니다. 탈해이사금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3년, 봄 3월, 왕이 토함산에 올라가니 우산 모양의 검은 구름이 왕의 머리 위에 피어 났다가 한참 후에 흩어졌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3년조)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은 탈해이사금이 토함산에 오르자 검은 구름이 왕의 머리 위에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는 다소 신령스런 분위기의 기사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느 날 토해(吐解=탈해)는 동악(東岳=토함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백의(白衣)를 시켜 물을 떠 오게 했다. 백의(白衣)는 물을 떠 가지고 오다가 중로에서 먼저 마시고는 탈해에게 드리려 했다. 그러나 물그릇 한 쪽이 입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탈해가 꾸짖자 백의는 맹세하였다. ‘이 뒤로는 가까운 곳이거나 먼 곳이거나 감히 먼저 마시지 않겠습니다.’ 그제야 물그릇이 입에서 떨어졌다. 이로부터 백의는 두려워하고 복종하여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삼국유사> 기이편 탈해왕조)

   위와 같이 탈해가 토함산에서 지방의 토착세력을 의미하는 白衣에게 강력한 권위를 과시했다는 기사도 보이고

   “탈해가 죽은 뒤 제 27세 문호왕(文虎王)대인 조로(調露) 2년 경진(庚辰) 3월 15일 신유(辛酉) 밤에 태종(太宗)의 꿈에 외모가 매우 위엄있고 용맹한 노인이 나타나 ‘내가 바로 탈해다.’ 라고 하며 ‘소천구(疏川丘)에서 내 유골을 파내어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안치해 달라.’ 하니 왕이 그 말을 따랐다. 그런 까닭에 지금까지 국가 제사가 끊이지 않으며 바로 동악신(東岳神)이라 부른다.” (<삼국유사> 기이편 탈해왕조)

   이처럼 탈해가 동악 즉 토함산의 산신이 되었다는 기사까지도 보입니다. 즉 당시에 석탈해와 그를 시조로 하는 석씨 집단은 경주 동쪽의 토함산으로 상징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토함산이 무너졌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눌지가 실성이사금에 대한 쿠데타를 감행할 때 실성의 편에 서서 격렬히 저항하던 석씨 세력이 완전히, 그리고 철저하게 제거되어 재기하지 못할 정도로 몰락하였다는 사실을 밝혀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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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크림힐트
2013-09-13 08:54:31

흥미롭습니다.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WR
중혼후
2013-09-13 08:57:30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까마긔
2013-09-13 08:58:28

동북아의 고대 역사는 신화와 혼재되어 - 또는 신화의 형태로 - 기록되어 해석되는 점이 흥미진진합니다. 문학적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WR
중혼후
2013-09-13 09:00:01

신화적 묘사는 고대인들이 역사를 기록하는 한가지 주된 방법이었지요. 고맙습니다.

꿋꿋하게~!
2013-09-13 09:03:10

좋은 글 고맙습니다. 사료에서 발췌된 글을 기사라고 표현하시니 좀 더 생동감이 있고 재미있네요.

WR
중혼후
2013-09-13 09:06:33

본래 역사학계에서는 옛 역사서들의 기록을 가리켜 '기사'라고 합니다. 물론 저는 역사학계에 있지는 않습니다. ^^

달빛늑대
2013-09-13 09:09:44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WR
중혼후
2013-09-13 09:10:49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르니탁
2013-09-13 09:10:00

신라 역사 속에서 석씨가 어디로 간 걸까 궁금했는데 비로소 궁금증이 풀렸네요. 매번 좋은 글 감사합니다.

WR
중혼후
2013-09-13 09:11:10

제가 감사드려야죠. ^^

Kount
2013-09-13 09:36:21

매번 즐거운 역사 이야기 재밌게 읽고 갑니다.

WR
중혼후
2013-09-13 09:38:30

격려 감사합니다.

머리에 꽃을
2013-09-13 09:39:28

석씨가 혹시 인도계엿을까요?? 신라 초기에 인도나 동남아 계열의 사람들이 한반도에 정착했다는 설도 들은거 같아서요..

WR
중혼후
2013-09-13 09:41:10

학계 정설은 '알 수 없다.' 입니다. 한반도가 아닌 외부 세력이었을 가능성은 있는데 개인적으로 인도설은 희박하다고 봅니다.

2013-09-13 11:16:01

확실히... 신라 후기에 다시 왕권에 등장하는 박씨에 비해 석씨들의 퇴장에 대해선 많은 궁금증이 나오긴 합니다. 중혼후님덕분에 조금 풀리는 군요.

WR
중혼후
2013-09-13 11:16:43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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