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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헤어질 결심: 플라토닉한 도착증 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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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2-07-03 02:18:06

헤어질 결심을 지난 주에 봤는데요.

 

저는 굉장히 재밌게 봤고,

박찬욱 감독은 과거의 남성성을 보여주는 성향에서

최근에는 여성성에 대한 탐구로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남성성과 여성성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의 개념을 빌려 말하면

남성성은 질서의 의미에서 신경증자를 말하고,

여성성은 질서를 파괴한다는 의미에서 도착증자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과거의 <JSA>와 <올드보이>는

남성이 이야기를 주도하며

엉켜버린 인생의 해답을 찾으려는 서사였는데


<친절한 금자씨>나 <박쥐> <아가씨>에서는

남성들이 여성에 의해 휘말리고 파괴되는 서사를 보여줍니다.

남성성의 신경증이 만들어낸 도덕과 위선, 질서가 여성에 의해 흔들리고,

여성은 자신을 파괴하면서까지 주도적으로 남성성을 유혹하고 무너뜨리는데 성공합니다.




라캉의 정신분석학에서의 신경증과 도착증을 간단히 말하자면,


1) ‘상징계’라고 말하는

언어와 질서로 이뤄진 인간 사회 속에서


2) 신경증자는 자신의 이름을 파괴하지 않고

언어와 질서의 성취를 통해 자기 이름의 가치를 가꿔나가며

자기 자신이 상징계를 지배하는 대타자에 이르려고 하고,


3) 도착증자는 자기 이름의 가치를 파괴하면서까지

대타자를 만나려는 증상을 말합니다.

언어・질서로는 도저히 대타자를 만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도착증자들은 언어적으로 낙오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아버지라는 대타자를 부르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을 파괴하는 문제와 소동을 일으키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신경증자는 언어・질서에서 쾌락을 얻지만,

도착증자는 언어・질서에서 쾌락을 얻지 못하는 불구자입니다.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아이들은

결국 부모님을 교무실에서라도 만나기 위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고,


범죄자들은 형사와 판사라는 언어적 아버지,

즉 대타자를 한 번이라도 만나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도착증의 사례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지하철 역사에서 소란을 일으킨 한 중년 남성이 있습니다.

그를 제압하러 온 경찰에게 강하게 저항을 합니다.

이 중년 남성은 자신을 언어적으로 강하게 포획해줄

언어・질서의 대타자를 간절히 원하지만,

불행히도 이 분은 대타자(경찰)에게 인정받을 언어적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더욱 문제를 일으키며 대타자의 관심을 유지하려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대타자인 경찰이

법이라는 언어・질서를 포기하고

갑자기 중년 남성을 언어가 아닌 몸으로 안아줍니다.

경찰로서의 법과 자신을 버리면서까지

중년 남성의 도착적 세계로 들어가자 중년 남성은 안정을 찾습니다. 


언어・질서에서 쾌락을 찾지 못하는 도착증자가

자신을 파괴하는 목적은 대타자를 만나기 위함이고

자신을 기쁘게 하는 사건은 질서와 대타자가 도착증자의 위치까지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도착증의 관점에서

<헤어질 결심>을 해부해보겠습니다.




<헤어질 결심>은

남성성과 여성성, 그리고 신경증과 도착증을 대표하는 캐릭터로서

해준과 서래의 특징을 설정합니다.



해준의 직업은 법을 수호하는 형사입니다.

그리고 그는 불면증에 시달리며 거의 하루종일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해준은 형사라는 점과 항상 깨어있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법이라는 언어・질서를 대표하는 대타자를 의미합니다.


인간은 어머니 뱃속이라는 어둠에서 태어났지만,

문자를 읽어야하는 인간 사회에서는 항상 빛과 낮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도 첫 구절은 “태초에 빛이 있으라!”였듯이

상징계는 빛과 낮을 필요로 합니다.

거대한 질서란 문자와 기호를 알아볼 수 있어야 존재합니다.

매우 질서있게 움직이는 자동차와 비행기는 불빛과 차선이 없으면 혼란에 빠집니다.


해준은 스트레스를 매우 받을 때마다

눈을 부릅 뜨며 안약을 넣습니다.

그에게 눈은 법을 수호하는데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또한 해준은 미결사건을 집안 벽에 전시해놓고 끝까지 해결하려고 합니다.

해준에게 가장 큰 기쁨은 이세상의 질서를 해치는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서래는 중국에서 밀항선을 타고

한국에 밀입국한 불법체류자 출신입니다.

시작부터가 법과 질서를 위반하는 인물입니다.


서래의 직업은 노인 간병인인데 

언어적 자격과 성취를 필요로 하지 않는 단순노동입니다.


질서의 계급적 정점에 있는 해준과는 대조적으로

서래는 한국 사회의 질서를 아무리 지킨다 해도

애초에 한국 사회의 대타자와는 이뤄질 길이 없는

계급적으로 밑바닥인 여성입니다.



그렇다면 서래는 자신의 본분에 맞지도 않게

왜 해준이라는 한국 사회의 대타자에 대한 욕망을 가지게 됐을까요?


사실 서래는 한국 사회의 대타자의 뿌리를 가지고 있는 여성입니다.

서래의 조부는 항일 독립군이었고, 한국에 산이라는 부동산을 소유했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서래의 조부를 잊었고, 부동산은 정부에 뺐겼습니다.

그럼에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도와주지도 않고 있으며,

추방 당할 뻔한 서래를 구제해준 말단 공무원 남편은 서래를 상습적으로 폭행하고 있습니다.


불법체류자이자 언어적 기반도 없는 서래가

한국의 대타자와 연결될 방법은 없었습니다.

해준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서래가 해준을 다시 만날 방법은

자기 이름의 가치를 파괴하는 것을 감수하면서

살인이라는 문제를 일으키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해준은 서래가 남편을 죽인 진범임을 알자

서래로부터 떠납니다.


해준을 잃은 서래는

돈이 많고 건강한 증권맨을 만나 재혼합니다.

새 남편 덕분에 해운대의 고층 아파트에 살지만,

그 남편이 번 돈은 깨끗한 돈이 아닌지라

빚쟁이가 수시로 찾아오니 도망다녀야 합니다.

돈이 아무리 많고 고층 아파트에 살아도

한국 사회의 언어질서를 지배하는 대타자의 삶과는 거리가 멉니다.


서래는 다시 한번 증권맨 남편을 희생양 삼아

해준이라는 진짜 한국사회의 대타자를 만나기 위해

두 번째 살인을 저지릅니다.


서래는 언어질서로는 대타자에 이를 방법이 없기에

자신의 인생을 파괴하면서까지 대타자를 소환하는

전형적인 도착증자의 모습으로 남성성을 위협합니다.





바다라는 여성성, 산이라는 남성성


<헤어질 결심>에서 산과 바다라는 모티프는

매우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산은 언어질서에서의 계급성을 과시하는 남성성을 상징하고

바다는 모든 생명과 인간이 태어난 여성성을 상징합니다.


산 봉우리는 언어질서로 이뤄진 모든 세상을 자기 아래로 내려다보며 지배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바다의 파도는 언어질서가 안정적으로 자리잡을 수 없는 파괴와 혼란, 무질서의 상징입니다.


해준은 바다를 좋아하지만 한국의 언어질서를 지배하는 산 봉우리를 상징하고,

말단 공무원인 서래의 남편은 산 봉우리를 동경합니다.

서래는 바다를 좋아하고, 파도 무늬의 벽지로 집을 꾸밉니다.


서래는 말단 공무원인 남편이 산 봉우리에 올라 대타자인 척하자

남편을 뒤에서 밀어 그의 본래 위치인 산 밑바닥으로 떨어뜨립니다.


상징계에 자리잡은 남편은 고통없이 여유롭게 산에 오르지만,

상징계에 자리잡을 수 없는 서래는 산 봉우리에 오르자 손바닥이 온통 상처와 굳은 살로 가득해집니다.



반면, 서래는 그토록 되찾고 싶은 조부의 산에서

해준을 만났을 때, 해준을 안고 키스합니다.

비록 조부의 산을 정부로부터 되찾지는 못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서래가 꿈꾸던 한국 사회에서의 지위를 회복하고,

자신의 본래 계급에 어울리는 대타자와 하나가 되는 꿈이 실현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서래는 해준과 현실적으로 이뤄질 수는 없습니다.

해준의 아내는 한국 사회의 빛을 지탱하는 원자력발전소 직원입니다.

해준은 자신의 대타자 지위를 포기할 마음이 없습니다.


서래가 유일하게 해준에게 언어적으로 영원히 기억되는 방법은

해준의 책상 벽에 붙여진 미결 사건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래의 가장 큰 기쁨은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언어질서를 휩쓸어가는 바다라는 자신의 세계로

상징계의 대타자인 해준이 오는 것입니다.






저는 <헤어질 결심>을 보면서 두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언어질서를 지배하려는 신경증자 남자 주인공이

도착증자 여주인공에게 무너지는 이야기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팬텀 스레드>가 떠올랐고,


사회적으로 자기 이름의 가치를 완전히 잃게 된 여주인공이

바다로 돌아가는 장면은 홍상수 감독의 <밤의 해변에서 혼자>가 떠올랐습니다.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 감독이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완전히 이해하고 만들었다는 확신이 들 정도로

캐릭터와 미장센, 서사가 잘 맞아 떨어지는 영화였습니다.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이미 김기덕 감독이나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이 자신의 영화에 즐겨 사용한 학문입니다.

황동혁감독의 <오징어게임> 장면에서도라캉의세미나 11등장하기도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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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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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03 05:36:51

프로이트로부터 시작된 정신분석학 자체가 과학적인 토대가 없다 보니 학문으로서는 거의 폐기된 상태인데

인문이나 철학쪽에서는 그걸 바탕으로 비평을 하고 뭔가를 만들려고 하니 참 희한하죠.

1
2022-07-03 08:58:35

아...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요즘에는 인정받지 못하는군요.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것도 잘 몰랐어요.
정보 감사합니다.

WR
2
2022-07-03 10:42:46

프로이트의 이론과 라캉의 이론은 완전히 다른 이론입니다. 아예 정신분석학을 모르시나보네요

Updated at 2022-07-03 08:48:39

와 엄청 새롭고 전문적인 리뷰네요.
찬찬히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좋은 영화가 나오니 좋은 리뷰들도 나오네요.
행복합니다.

1
2022-07-03 08:56:59

그런데 본문의 내용 중 서래가 두번째 살인을 한 이유가 해준을 만나기 위해서는 아니지 않나요...?

2022-07-03 11:05:31

엄밀히 들어가면 해준을 지키기 위한 마음이 컸으니 애매하게 보일 순 있지만 이미 해준을 너무 사랑하게된 입장에서 구실이 크게 중요하진 않았지 싶습니다.
무의식이든 의식이든 억지로 이포로 이사한것도 그렇구요.

2022-07-03 11:12:35

흥미로우면서도 양질인 정신분석학적 관점의 리뷰 잘 읽었습니다.
아주 조금씩 확증편향적인 부분도 느껴지지만 대체적으로 수긍이가고 특히나 서래 외조부의 부분은 의아한 구석이 있었는데 글을 읽고나니 무릎이 탁 쳐지네요.
추천 꾸욱 누릅니다.

2022-07-04 05:26:29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스크랩 했습니다. ^^

Updated at 2022-07-05 14:30:50

좋은 글이고, 영화를 보고난 후
가슴으로는 이해되나 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들었던 부분이 해소되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박찬욱감독은 철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엄청난 독서가에다가 전공이니까 당연히 뭐…
철학과 영화의 만남이죠…^^
영화감독에게 다소 유리하다고 할수있는
미술전공 혹은 철학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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