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
비밀번호 찾기 회원가입

[차한잔]  [역사] [펌]이순신장군에 대한 왜곡 고찰 (추가분 포함)

더나은미래
1
  813
2004-09-01 14:24:20

안녕하세요.

차한잔에는 처음 글 올리는 사람입니다. 지난 2년여간 DP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좋은 정보를 얻기만 했지 제가 나눈 적은 별로 없네요. 인터넷에서 좋은 글을 읽었기에, 나누고자 하는 마음에서 글을 올립니다. 혹 뒷북이라면 죄송합니다.

요즘 이순신 장군님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네요. 저도 얼마전 <칼의 노래>를 읽고 다시 현충사에 다녀왔답니다. ^^

제가 퍼온 글은, 소설가 송우혜 님이 쓰신 이순신 장군님에 대한 글입니다.
제가 자세한 역사를 알진 못하지만, 첨부된 사료와 글을 쓰신 성의를 보면 분명히 읽어볼 만한 가치는 있을 듯 합니다.

사실 글의 분량이 상당히 많습니다. 읽는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지만, 이순신 장군님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궁금해하시는 분이라면 꼭 보세요. (아니면 주요 제목만 훑어 보셔도 좋겠습니다) 


결실 맺는 행복한 가을 되세요. ^^


PS. 처음 이 글을 올릴 때에는 송우혜님 논문의 전체가 아니었습니다.
크라잉 프리맨님께서 나머지를 마저 보고 싶다고 하셔서 다시 퍼왔습니다.
이제 긴 글이 마무리된 듯 합니다.

참고로  이 글은 윤민혁 님의 홈페이지  http://www.whitedeath.pe.kr/  자유 게시판에서 퍼 왔습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


제목 : 문학작품을 통해 진행되고 있는 이순신 폄훼 현상과 KBS 대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원작소설이 지닌 심각한 역사 왜곡의 문제

글쓴이 : 송우혜(宋友惠, 소설가)


I. 이순신에 대한 평가와 문학적 형상화의 변천상

이순신(李舜臣) 장군은 한 사람의 무장인 동시에, 우리 민족이 지닌 '위기관리능력'의 극대치를 가장 극적으로 강렬하게 보여준 영웅이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찬연했던지, 적이었던 침략자 일본의 무사들과 그 후예들조차 숭앙하는 우상이자 전설이 되었다. 풍전등화와도 같았던 국가적 위기에서 그가 보여준 '이순신적'인 힘과 의지와 순발력은 어려울 때마다 우리 민족을 격려하고 일으켜 세운 긍지이며 재산이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는 한결같지 않았다. 우리 역사와 문학에서 이순신이 어떻게 평가되어 왔는가. 시대에 따라 변해간 평가의 주요 흐름을 짚어본다.



1. 당대: '명장 원균의 전공을 가로챈 이순신'

"이순신은 원균을 모함하고 원균의 전공을 가로챘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 교섭이 진행되고 있어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갔을 때, 느닷없이 이런 주장이 나타나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을 깎아내리면서 기세를 얻기 시작했다. '원균 명장론'을 전제로 한 이런 주장은 원균이 살아 있는 동안 계속 원균 및 그를 지지하는 서인들에 의해 줄기차게 제기되었고, 화의가 깨어져서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타오르는 불이 바람을 얻은 듯이 기세를 얻었다. 독자적으로 거둔 뛰어난 승첩이 없는 무장인 원균을 '명장'으로 만들려면, 직접간접으로 이순신을 폄훼하고 그의 공을 빼앗아 원균에게 넘겨야 했다. 그래서 당시 원균과 그의 지지파들이 계속 내세웠던 "이순신이 원균의 공을 빼앗았다"는 주장들이 현재 <선조실록>에 도처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어, 당대에 이순신이 원균측으로부터 어떤 식의 괴롭힘과 폄훼를 당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결국 그런 주장들이 선조에게 받아들여져서 이순신의 체포와 투옥 및 원균의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최초의 대전투에서 삼도 수군 전부를 무너뜨리고 본인도 전사함으로써, 또한 그 뒤에 이순신이 단지 13척의 전선을 가지고 명량대첩의 신화를 이룩함으로써, 그런 주장은 일시에 자취를 감추었다.

다만 이순신을 내치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함으로써 삼도 수군이 일시에 무너진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인 선조만은 원균이 전사한 뒤에도 계속 원균을 두호하고 "원균은 지혜와 용맹을 갖춘 무인"이라고 칭송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선조가 그런 무리한 오기를 부린 까닭은, 당시의 조선사회의 관료문화와 제도 때문이었다. 조선시대는 인물 천거에 대한 법적 규제가 엄혹했다. 누군가의 천거를 받아 관직에 임명된 자가 죄를 범할 경우, 그를 천거한 인물에게도 연좌제를 적용하여 처벌하도록 법에 명문으로 규정되어 있던 사회였다. - <경국대전(經國大典)> 吏典 薦擧

그렇기 때문에, 선조는 끝까지 "내가 사람을 잘못 쓴 잘못을 범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선조의 무리한 보신책은 난 후에 공신도감에서 공신들을 선정할 때도 이어져서,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를 억누르고 원균을 일등공신으로 책정하도록 강요하여 결국 관철시켰다.



2. 임란 이후의 조선시대 : '희대의 영웅 이순신'

임진왜란이 무수한 생령을 죽음으로 내몰고 이 강산을 초토화하고 막을 내린 이후, 종전된 지 2년만인 1600년에 임진왜란을 다룬 최초의 문학작품이 세상에 나왔다. 곧 윤계선의 <달천몽유록(撻川夢遊錄)>인데, 현재 이 작품은 '한일 양국에서 임진왜란을 문학화한 최초의 본격적인 창작소설'로서 자리매김되고 있다. - 최관, <일본과 임진왜란>,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3. 44쪽

<달천몽유록>은 27명의 임진왜란의 순국 충장들을 다루고 있는데, 가장 먼저 크게 다루어진 영웅이 곧 '대장군 이순신'이다. 전 국민이 전쟁의 진상과 참화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시기에 나온 작품인만치, 그것은 당시 민중들의 평가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분석된다. 이후 <임진록>을 비롯하여 임진왜란을 다룬 작품들이 계속 나왔는데, 이순신을 한몸으로 국난을 막아낸 희대의 영웅으로 묘사하는 점에서는 모두 일치한다. 정조 시대에 가서는 왕실에서도 이순신에 대해 최고 최상의 예우를 하고 왕명으로 <이충무공전서>가 발간되는 등 이순신 현창에 적극 나섰다.



3. 일제시대 : '하늘이 내신 성웅 이순신'

일본에 의해 나라가 멸망하게 되자, 한민족의 지식인들은 새삼 '이순신'에 대해 주목하고 이순신을 민족에게 널리 알리기에 나섰다. 3백년 전에 일본을 통쾌하게 이긴 이순신을 상기함으로써 민족 정기를 북돋으고 사기를 진작시키려는 의도였다.

현재 남아 있는 자료만으로 고찰해도, 당시의 절박감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1905년의 을사늑약으로 일본의 보호국이 되어 독립을 잃자, 박은식 선생은 1907년에서 1908년에 걸쳐서 서우학회(西友學會)의 <월보(月報)>에 <이순신>에 대해 썼고 국망 이후에 망명지인 상해에서 <이순신전>이란 제목의 단행본으로 발간했다. 신채호 선생은 1908년에 <대한매일신보>에 <이순신전>을 연재했다. 나라가 망한 지 3년 만인 1913년에는 수교사(水交社)에서 자신들이 편집한 <이순신전>을 출판했다. 친일파란 비난을 들었던 춘원 이광수조차 <동아일보> 지면에 장편소설 <이순신>을 연재했다.(1931. 6~ 1932. 4)
이 시대에 쓰여진 '이순신전'에 나오는 이순신은 문자 그대로 '성웅'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4. 해방 이후 70년대 말까지 : '하늘이 내신 성웅 이순신'


일제의 잔혹한 식민통치의 고통의 여진이 남아 있던 해방 공간에서도 이순신에 대한 관심과 열기는 여전했다. 일제시대에 쓰여진 여러 저자 여러 판본의 <이순신전>들이 속속 간행되었을 뿐 아니라, 해방 뒤에 새로 쓰여진 이순신전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은상의 <이충무공 일대기>(1946), 박태원의 <이순신 장군>(1948), 김태진의 희곡 <이순신 장군>(1948), 강남형의 <이순신>(1953), 최석남의 <이순신과 그들>(1961), 최인욱의 <성웅 이순신>(1970), 강철원의 <성웅 이순신>(1972), 이원수의 <이순신 장군>(1973)…. 이런 저작물의 공통점은 이순신을 '성웅'으로 자리매김하는 점에서 모두 일치한다. 이러한 흐름은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이 매우 적극적으로 '이순신 현창'에 나선 것과 궤를 같이 하여 더욱 크게 확산되었다.



5. 현대 : 다시 등장한 '명장 원균, 원균의 공을 가로챈 이순신'


박정희 정권이 무너진 직후인 1980년대 초반에 돌연 390년 전에 이순신을 폄훼하던 소리들이 그대로 다시 세상에 나타났다. 울산대 교수인 이정일이 논문 및 잡지 기사를 통해 '원균 명장론'을 제기한 것이다. - <원균론>, <역사학보> 89집, 1981년 역사학회. <원균은 억울하다>, <마당> 1982년 12월 - 그는 <선조실록>에 실려 있는 원균 지지파들이 이순신을 폄훼했던 발언들 및 선조가 원균을 극력 두호한 발언과 난 후에 원균이 '일등공신'으로 선정된 사실 등을 근거 삼아 원균은 '불 같은 성미의 저돌적인 용장' 으로서 이순신과 쟁공하던 사이였고, 이순신을 신격화시키는 과정에서 부당하게 악역을 맡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원균은 논리적인 타당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이 민족적 영웅으로 부각됨에 따라 상대적으로 점점 더 악인으로 되어 갔던 것이다"고 주장했다.

1980년대 초반에 그런 주장이 등장했을 때 많은 국민들이 "매우 새롭고도 충격적인 이야기"라고 받아들였다. 특히 대학가에서는 이순신 현창에 매우 적극적이었던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한 반감과 반발 때문에 그런 주장을 크게 반긴 학생들이 많았다. 그러나 임진왜란사를 제대로 공부한 사람의 눈에는 그것이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원균의 지지파인 서인의 거두들이 선조 앞에서 거듭 되풀이했던 주장으로서 <선조실록>에서 눈에 익도록 보았던 것이다. 그것은 또한 긴 전란기간 중에 가장 뛰어난 수군 장수로서 조선 최대 최강의 군권을 한 손에 장악하고 있던 이순신을 계속 견제하고 싶어 했던 임금 선조가 그대로 받아 야멸차게 활용했던 소리들이기도 했다.


이정일의 주장이 처음 나온 이래, '원균 명장론'은 논문, 잡지 기사, 소설, 1994년에 상영되었던 KBS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최근 진행되고 있는 KBS 대하드라마 제작 등등…, 여러 장르를 망라하여 거듭되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모두 똑같이 치명적인 맹점이 들어 있다. '원균이 명장'이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명장의 이름에 걸맞는 전공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원균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독자적으로는 '명장'이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전공을 거둔 전투가 전혀 없는 무장이었던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그들은 단지 '원균은 이순신과 쟁공하던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원균은 명장"이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원균은 앞장서서 나가 잘 싸우고도 이순신에게 전공을 가로챔을 당한 것이기 때문에 "이순신의 전공이 곧 원균의 전공"이라고까지 강변한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거둔 뛰어난 승첩은 모두 이순신의 지휘 아래서 거둔 것이기 때문에, 원균을 명장으로 만들자면 필수적으로 이순신을 폄훼하고 그의 전공을 빼앗아다 원균에게 넘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빚어진 결과이다. 결국 4백년 전에 이순신에게 억울하게 뒤집어 씌워져서 그의 운명을 모질게 뒤틀어놓았던 오명이 현재 똑같이 되풀이되면서 다시 이순신을 욕보이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뿐이 아니다. '원균 명장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원균을 '명장'으로 만들기 위해서 '원균의 전공'을 새롭게 조작해내고 있다. 그들은 임진왜란때 조선 수군 최초의 승첩은 이순신 함대가 경상도 바다로 진격하여 임진년 5월 7일에 거둔 옥포승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먼저 원균이 전란 초에 독자적으로 경상 우수영 수군을 지휘하여 '적선 10척을 분멸' 또는 '적선 30여 척을 격파'함으로써 최초의 승첩을 거두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김탁환은 거기서 더 나아가 그의 소설 <불멸>에서 함경도의 여진족 관계 전투 양상과 전공을 모두 조작해내고 '당대의 명장'이라고 불렸던 온성부사 신립과 함경 북병사 이일이 세운 전공을 모두 원균의 전공으로 가로채는 황당하고도 치명적인 역사 왜곡까지 감행했다. 이렇듯 원균에 유리한 것이라면 없는 사실도 만들어내고, 이순신에게 불리한 것은 사실이 아닌 것조차 확대 포장하는 것이 현재 '원균 명장론'을 주장하는 이들이 즐겨 쓰는 서술방식이다.

원균이 살아 있던 당대에 시도된 '이순신 죽이기'는 군권 장악을 둘러싼 갈등과 당파싸움이 개제된 정치적 다툼이 그 원인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군권문제와는 전혀 상관 없는 현대인들이 왜 이처럼 다시 '이순신 죽이기'에 나선 것일까. 그 이유는 극도의 '상업주의' 때문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이미 세상에 정립된 평가인 '훌륭한 이순신'을 말해서는 주목을 끌 수 없기 때문에 새롭게 '사악한 이순신'을 내세워서 독자를 모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런 분석과 견해는 정곡을 찌른 근거와 타당성을 지녔다고 보여진다. 만약 요즘의 '이순신 죽이기'가 순수하게 '역사 바로 알기' 차원에서 진행되는 작업들이라면, 절대로 의도적이고 악의적인 역사 왜곡까지 감행하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II. 1980년대 이후 이순신 폄훼에 가담한 소설들

앞에서 보았듯 1980년대 초반에 머리를 든 '원균 명장론'은 1990년대에 들어와서 소설의 형식으로도 소화되기 시작했고, 대표적인 소설가들로 고정욱과 김탁환을 들 수 있다. 이들이 쓴 소설의 공통점은, 원균측이 이순신에 대해 퍼부었던 비난과 모함들을 모두 진실인 것으로 취급하여 소설의 기본 얼개로 삼고 있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새로운 역사 왜곡까지 서슴지 않는다.



1. 고정욱의 <원균 그리고 원균> (상/하 전2권, 여백, 1994)

이 소설은 출간 당시 책 표지 및 대대적으로 퍼부은 책광고에다 다음과 같은 문구를 큰 활자로 박아 실어서 세상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원균의 4백년 원혼이 우리를 부른다"
"원균의 공을 가로채고 그 아들까지 모함하는 聖雄 이순신… 밝히고 싶지 않은 역사의 사실입니다"

고정욱이 이 소설에서 시도한 것은 문자 그대로 '원균 명장론'이다. 선조때 나온 원균측에서 이순신을 깎아내리고 원균을 추켜세웠던 말과 주장들이 소설의 기본토대이다. 그 목적을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과 전혀 다른 전개도 서슴지 않는다. 그런 사례의 하나로써, 고정욱이 소설책 표지에서까지 강력 주장했던 "원균의 아들까지 모함하는 성웅 이순신"이란 문구와 관련된 대목을 고찰해 본다.

정유재란이 발발한 직후, 이순신에 대해 제기된 비난 중 하나가 "이순신이 원균을 두고 '원균은 자신의 십여 세 된 첩의 아들까지 군공에 참여시켜 상을 받게 했다'면서 불쾌해 했다"는 것이었다. 그 비난은 당시 이순신을 죽일 죄목을 찾기에 혈안이 되었던 선조에 의해서 '이순신을 죽여야 할 죄 3가지' 중 마지막 세번째 죄로까지 꼽혔었다.

(선조 30년(정유년, 1597) 3월에 당시 투옥되어 고문을 받으면서 취조당하고 있던 이순신을 두고 선조가 '이순신을 죽여야 할 이유'로서 직접 3가지 죄목을 지정해 준 것이 <선조실록>에 실려 있다. 이야기가 난 김에 짚고 가자면, 바로 그 죄목들이야말로 '당시 이순신이 얼마나 원통하게 핍박을 받았으며 얼마나 억울하게 죽을 자리에 몰리고 있었는가' 하는 것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증거인데, 당시 선조의 말은 이러했다.
"이순신은 조정을 속였으니 무군지죄(無君之罪)요. 적을 좇아 치지 않았으니, 나라를 저버린 죄(負國之罪)요. 남의 공을 빼앗기에 이르러 남에게 죄를 씌웠으니(이것은 원균의 나이 많은 아들을 어린아이라고 하여 공을 가린 글을 올린 일을 가리킨다 - <선조실록> 자체의 주, 작은 글씨로 부기되어 있음), 제멋대로가 아닌 게 없고 어려워 꺼리는 게 없는 죄(無非縱恣無忌憚之罪)이다. 이토록 허다한 죄상이 있으니 법에 부쳐야지, 용서할 수 없다. 마땅히 법에 물어 죽여야 한다. 신하된 자로서 속이는 자는 반드시 죽여야지 용서할 수 없다." (<선조실록> 선조 30년 3월 13일 계묘조)

현재 '원균 명장론' 주창자들 중 많은 이들이 실록에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는 이 3가지 죄목의 해석조차 제대로 못해서 4가지 죄목으로 만들고는 제멋대로 네번째 죄상을 창작해 만들어 붙여서 이순신에게 뒤집어 씌우고 있는 실정이다. 아무튼 한때 이순신의 생사를 가를 뻔했던 죄목들인 만큼 여기서 잠깐 살펴보기로 한다.

첫번째의 '조정을 속였으니 무군지죄(無君之罪)'. 석달 전인 선조 29년 12월 12일에 있었던 부산 왜영 방화사건관계이다. 그날 밤에 부산의 왜영에서 대화재가 발생하여 왜군이 큰 피해를 보았는데, 당시 일본으로 건너가는 사신의 짐을 운반하는 공무로 부산에 갔었던 수군 장수인 거제 현령 안위 등이 돌아와서 통제사 이순신에게 그 대화재에 관한 보고를 하면서 자신들이 은밀히 모의하여 그 일을 이루어 내었다고 보고하자, 이순신이 장계를 올려 그 사건을 임금에게 보고하고는 안위 등에게 포상해주기를 청했다. (<선조실록> 선조 30년 1월 1일 임진조). 그런데 바로 다음날 삼남 도체찰사로 남쪽에 내려가 있던 우의정 이원익의 지시를 받고 올린 이조좌랑 김신국의 장계가 조정에 도착했는데, 장계의 요지는 "부산 왜영의 대화재는 이원익의 군관이 미리 계획하여 성사시킨 것으로서, 이순신은 그런 내막을 모르고 부하에게서 보고 받은 대로 장계한 것이기에 그 장계에 있는 대로 이순신의 부하들에게 상이 돌아가면 안되고, 이원익의 군관에게 포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선조실록> 선조 30년 1월 2일 계사조). 바로 이것이 이순신이 '조정을 속인 무군지죄'의 전모이다. 이순신 스스로 만들어낸 일이거나 이순신 자신에 대한 포상 요청이 아니요, 부하의 보고를 믿고 그대로 상주했던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순신이 반드시 죽어야 할 죄'로 꼽힌 것이다.
요즘 첫번째의 '무군지죄'라는 죄목을 두고 새로이 '역적죄'라고 칭하는 논자들이 더러 있는데, 전혀 사실과 맞지도 않고 전혀 가당치도 않은 천부당만부당한 과장이다. 역적죄는 임금을 내치고 국권을 잡는 역모를 꾸미거나 그런 역모를 실제로 실행하다 잡힌 경우에만 붙이는 대죄의 명칭인 것이다. 선조 자신이 '조정을 속임으로써 임금을 무시한 죄'라고 명백하게 규정해 놓았던 죄목과 바꿔치기하여 이순신에게 그런 대죄의 오명을 씌운다는 것은 실로 역사 앞에 죄를 짓는 작태이다. 그런데 김탁환 역시 이순신이 잡혀가는 때를 묘사하는 장면에서 다음과 같이 이순신을 아주 비천하고 비루하게 묘사하면서 이순신에게 '역적죄' 운운하는 오명을 씌우고 있으니 읽기조차 참담하다.


바로 그때 원균이 나대용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그리고 백발이 성성한 이순신의 머리를 틀어쥐고 좌우로 흔들어댔다.
"꺼억꺼어억."
이순신이 가래 끓는 소리를 냈다. 천하를 호령하던 통제사의 면모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지금 그는 그냥 두어도 곧 숨이 넘어갈 것만 같은 시골 촌부에 다름 아니었다.
원균은 이순신을 개처럼 질질 끌고 운주당 섬돌 위로 올라섰다. 오른손에 상방참마검을 쥐고 살이 두툼하게 오른 양볼을 실룩이며 주위를 노려보았다. 장졸들은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요동하는 것이라곤 그들의 검은 눈동자 속에서 이글거리는 작은 횃불뿐이었다. 원균은 상방참마검을 높이 들고 격문을 읽듯이 어둠에 묻힌 한산도 앞바다를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잘 봐라. 이놈은 임금을 속인 역적이다.(하략)"
(<불멸> 3권, 340~341쪽)

조선시대에는 반좌법(反坐法)이 엄중하게 시행되었었는데, 그것은 바로 위증이나 무고로 남을 죄에 빠지게 한 자에게 대하여, 피해자가 받은 또는 받을 해와 동일한 정도의 해를 형벌로써 시행하는 제도였다. 그래서 남을 역적죄로 몰았다가 사실이 아님이 들어나면 그 자를 역적죄를 범한 것과 동일한 형량으로 처벌했던 것이다. 지금이 조선시대였다면, '이순신이 역적죄를 지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모두 역적죄를 처벌하는 극형으로 처벌되었을 것이다.

두번째의 '적을 좇아 치지 않았으니, 나라를 저버린 죄(負國之罪)'는 널리 알려진 대로 적군인 '요시라의 반간계'에 기인한 누명이다.

세번째의 '제멋대로가 아닌 게 없고 어려워 꺼리는 게 없는 죄(無非縱恣無忌憚之罪)'가 바로 고정욱이 말하는 '원균의 아들까지 모함하는 성웅 이순신 운운'에 관련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새롭게 등장한 사건도 아니었다. 이미 삼년 전인 선조 27년 11월에 경연에서 거론되어 "그 일은 원균이 잘못한 일이었다"는 호조판서 김수(金?)의 보고까지 있었던 사건인데(<선조실록> 선조 27년 11월 12일 병술조), 이때 재론되면서 이순신의 죄로 둔갑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 또한 이순신으로서는 매우 원통한 오명에 해당했다. 이순신이 문제를 제기했던 것은 분명 '원균의 첩이 낳은 어린 아들'까지 군공자로 올려 상을 받게 한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원균측이나 현재의 '원균 명장론' 주장자들은, '원균의 본처가 낳은 장성한 아들인 원사웅'을 내세워서 그 문제 제기를 이순신의 죄악으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원균의 공을 가로채고 그 아들까지 모함하는 聖雄 이순신"이라 하여 이순신을 저열한 인격을 가진 자로 모질게 매도하고 야유하는 빌미로 삼고 있다.

고정욱이 <원균 그리고 원균>에서 이 사건을 다룬 대목은 이렇다.
"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러 내려간 사람은 이덕형이었다. 그는 공명정대하기로 유명했고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가득한 자였다. …(중략, 주:이 부분에서, 이덕형의 훌륭한 임품을 말해주는 유명한 ‘제호탕’의 일화를 소개)… 그런 이덕형인지라 남쪽으로 내려와 원균과 이순신을 불러다 대질을 할 때 두 사람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원균 그리고 원균> 하권, 175~176쪽).

고정욱은 "원균의 아들 원사웅은 아버지를 닮아 날카롭고 사나운 용모를 하고 있는 홍안의 용사였다"면서, 이덕형(李德馨) 앞에서 이순신과 원균이 '원균의 아들 문제'로 대질신문을 받고 있는 자리에 원균의 아들 원사웅이 들어오자 이덕형은 "오, 대단한 헌헌장부요"하고 감탄한다. 고정욱은 원사웅까지 등장하여 이순신의 모함을 명백하게 증명해낸 장면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 뒤에 이렇게 서술했다.

"(이덕형과 원균과 원사웅 앞에서) 이순신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무 할 말이 없었다. 확인도 안 해본 소문을 진실로 알고 언급했다가 화를 자초한 것이었다." (<원균 그리고 원균> 하권, 177쪽).

이로써 고정욱은 선조 당시 해당 사건에 대한 엄정한 진상조사를 거쳐서 '원균의 아들까지 모함'한 이순신의 죄상이 명백하게 밝혀졌었음을 아주 설득력 있게 보여준 셈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순신은 원균과 함께 이덕형에게 불려가서 대질심문을 받기는 커녕, 이덕형과 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음이 다음 해에 이덕형 자신이 쓴 장계의 내용에 의해서 극명하게 밝혀져 있다. 다음은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뒤에, 체찰사(體察使:지방에 전쟁이나 군란이 있을 때 왕을 대신하여 그 지방에 나아가 군사관계 업무 전체를 두루 총찰하던 군직(軍職), 재상이 겸임함)로서 당시 전라도에 내려가서 머물고 있던 좌의정 이덕형이 현지에서 선조에게 올린 장계의 일부이다.

<좌의정 이덕형의 장계에,

"이순신의 사람됨을 신이 직접 확인해 본 적이 없고 한 차례 서신을 통한 적 밖에 없었으므로, 그가 어떠한 인물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전일에 원균이 그의 처사가 옳지 못하다고 한 말만 듣고, 그는 재간은 있어도 진실성과 용감성은 남보다 못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신이 본도에 들어가 해변 주민들의 말을 들어 보니, 모두가 그를 칭찬하며 한없이 아끼고 추대하였습니다. 또 듣건데 그가 금년 4월에 고금도(古今島)에 들어갔는데, 모든 조치를 매우 잘하였으므로 겨우 3~4개월이 지나자 민가와 군량의 수효가 지난 해 한산도(閑山島)에 있을 때보다 더 많았다고 합니다. 그제서야 그의 재능이 남보다 뛰어난 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신은 유제독(劉提督, 주:명나라 육군 제독)이 힘을 다해 적과 싸우려는 뜻이 없다는 걸 간파한 뒤에는, 국가의 대사를 전적으로 수군에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신이 주사(舟師:수군)에 자주 사람을 보내어 이순신으로 하여금 기밀의 일을 주선하게 하였더니,그는 성의를 다하여 나라에 몸바칠 것을 죽음으로써 스스로 맹서하였고, 영위하고 계획한 일들이 모두가 볼 만하였습니다. 따라서 신은 나름대로 생각하기를 '국가가 주사의 일에 있어서만은 훌륭한 주장(主將)을 얻어서 우려할 것이 없다'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가 전사하였으니 앞으로 주사의 일을 책임지워 조치하게 하는 데 있어 그만한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참으로 애통합니다. 첩보가 있던 날 군량을 운반하던 인부들조차 이순신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무지한 노약자라 할지라도 대부분 눈물을 흘리며 서로 조문하기까지 하였으니, 이처럼 사람을 감복시킬 수 있었던 것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습니까."
(<선조실록> 선조 31년 12월 7일 무오조).




2. 김탁환의 <불멸> (전4권, 미래지성, 1998)

김탁환은 고정욱보다 한 차원 더 심화된 악의적인 부당한 역사 왜곡을 통해서 '원균 명장론'을 내세우고 있는데, 당연한 결과로 이순신을 매우 비루하고 비열하며 초라하고 유약한 인물로 만들었다. 김탁환의 경우는 다음 장에서 상세하게 고찰한다.





Ⅲ. KBS 대하 드라마 '이순신'의 원작소설들이 지닌 문제


현재 KBS 텔레비전에서는 '이순신이 주인공인 100회짜리 대하 드라마'를 제작하고 있다고 한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그 드라마는 이순신을 다룬 두 개의 소설, 김탁환의 <불멸>과 김훈의 <칼의 노래>(전2권, 생각의 나무, 2001)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이번 KBS의 이순신 드라마 제작작업은 여러 모로 걱정스럽기 그지 없다. 원작인 두 소설 모두 이순신과 원균의 행적과 업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데다가, 더구나 <불멸>의 경우에는 매우 악의적인 역사 왜곡까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미 김탁환의 <불멸>이 원작 중 하나로 선정된 사실 자체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바였지만, 보도에 따르면 담당 제작진은 이 드라마에서 "원균은 명장"임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KBS에서는 이미 1994년에도 '원균 명장론'을 기본구조로 한 다큐멘타리를 만들어 방영한 데 이어서, 이번에는 대하 드라마를 통해서 다시 '원균 명장론'의 확산에 나선 것이다.

소설과 달리 공영방송에서 방영되는 대하 역사 드라마는 매우 직접적으로 국민의 역사의식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렇게 때문에 더욱이나 악의적인 역사 왜곡을 동원한 이순신 폄훼 작업을 감행해서는 안된다. 현재 일본이 자행하는 여러 분야의 역사 왜곡과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문제로 우려와 통탄을 금치 못하고 있는 판에, 우리 내부에서 스스로 우리 역사를 마구 왜곡하고 훼손하면서 민족의 진정한 영웅을 추하게 일그러뜨리고 욕보여서야 되는가. 이제 원작인 두 소설에서 잘못된 부분들을 지적하여 검증해 보면서, '이순신'의 참모습과 당시 역사의 실체를 냉철하게 고찰해 보고자 한다. <칼의 노래>를 먼저 살펴본 다음에 <불멸>을 고찰한다.



1. 김훈의 <칼의 노래>

이 소설은 임진왜란 당시에 이순신이 자신의 내면 풍경과 심정을 독백체로 토로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런 소설구조상 실제 역사에 대한 고증을 치밀하게 하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별로 느끼지 않고 쓴 듯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원균을 '명장'이라고 추겨 세우지도 않고 '무능한 악장'이라고 지칭하지도 않는다. 의도적인 역사 왜곡은 없지만, 중요한 고비마다 있어서는 안될 오류들이 있다.


1) 정유재란이 발발한 뒤 이순신이 체포될 때의 정황이 사실과 전혀 다르다. 김훈은 이순신이 체포된 이유로서 '요시라의 반간계'를 거론하고, "나는 즉각 기소되었다. 권률이 나를 기소하고 비변사 문인 관료들은 나를 집요하게 탄핵했다"(<칼의 노래> 1, 34쪽)고 썼다.
그러나 이순신은 '즉각' 기소되지 않았고, 기소한 자가 '권률'도 아니었으며, 집요하게 탄핵한 이들이 '비변사(備邊司: 중종시대에 변경지방의 방비 업무를 관장하기 위한 임시기구로 처음 설치되었는데 차츰 전국의 군사관계 업무 전체는 물론 국정까지 관장하는 상설의 최고권력기관으로 변하여 고종시대 초기까지 존재했음) 문인 관료들'도 아니었다. 요시라의 반간계가 현안으로 대두하자 조정에서 이 문제를 크게 논의하기 시작한 것은 선조 30년(정유년, 1597년) 1월 23일부터였다. 여러 날을 두고 임금과 신하들 사이에서 통제사직의 개편 등 여러 갈래의 대책이 논의되다가, 2월 4일에 '사헌부'에서 "통제사 이순신을 잡아오게 명하여 율에 따라 죄를 정하게 하라"고 주청한 것이 체포로 이어졌다. (<선조실록> 선조 30년 1월 23일, 27일, 28일조. 2월 4일조)



2) 체포되던 당시 이순신의 행적 묘사도 부정확하다.

김훈은 "가덕 방면 전투는 헐거웠다. …가덕 해역으로부터 함대를 철수시켜 한산 통제영 모항으로 돌아오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의금부 도사는 선착장에서 나를 묶었다."(<칼의 노래> 1, 25쪽) 라고 기술했다.


그러나 당시 이순신은 가덕 해역에서만 전투를 한 게 아니었다. 선조 30년 2월에 함대를 이끌고 부산 앞바다까지 나가서 부산의 왜적들을 치고 돌아오는 길에 가덕 바다에 머물러 그 일대의 적을 소탕하고 있다가 체포되었다 (<선조실록> 선조 30년 2월조, <이충무공전서> 하권 46쪽, 충무회 발행, 참조). 체포되기 직전인 정유년 2월 10일에 이순신이 수군 단독으로 감행했던 '부산진공작전'은 뒷날 원균의 죽음에도 큰 영향을 미쳤던 바, 그에 대해서는 뒤에 상세히 고찰해 본다.

또한 이순신을 체포한 관원은 '의금부 도사'가 아니라 왕명을 받고 내려갔던 '선전관'이었다. <선조실록>에는 당시 선조가 직접 내렸던 체포명령이 사관에 의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어서 당시의 실상을 명확하게 밝혀준다.

"(임금이) 김홍미(金弘微)에게 전하여 이르기를, '이순신을 잡아올 때에 선전관에게 표신(標信)과 밀부(密符)를 주어 보내 잡아오도록 하되, 원균과 교대시킨 뒤에 잡아오라고 일러 보내라. 또한 만약 이순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적과 싸우고 있으면 잡아오기에 비편(非便)할 것이니, 전투가 끝난 틈을 타서 잡아오라는 말도 함께 일러 보내라'고 하였다." (<선조실록> 선조 30년 2월 6일 정묘조)



3) 원균의 마지막 전투의 양상과 장소 및 죽은 장소가 사실과 다르다.

김훈은 (권률은) "원균을 불러들여서 곤장 50대를 때려서 칠천량 바다로 내어 몰았다."(?칼의 노래? 1, 35쪽)라며, "하룻밤 하루 낮의 전투였다. 나중에 들으니, 적선 1,000여 척이 방사대형으로 날개를 펴면서 달려들었고, 한산 통제영에서 거제도 앞바다까지 하루 종일 배를 저어온 피곤한 군사들을 원균은 적의 방사형 대열 중앙부에 일자진(一字陣)으로 집중시켰다는 것이다."(<칼의 노래> 1, 26쪽)고 했다. 원균의 최후에 대해서는 "갑옷마저 잃어버린 원균은 거제도의 산속으로 달아났다. 그는 칼 한 자루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는 나무 그늘 아래 주저앉아서 그 뚱뚱한 몸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다가 뭍까지 쫓아온 적의 칼을 받았다."고 썼다.

그러나 이런 기술은 전혀 사실과 다르다. 실상은 어떠했던가. 당시 도원수 권률이 곤장까지 치면서 수군통제사 원균을 내몬 곳은 '칠천량 바다'가 아니라 '부산 앞바다'였다는 것은 모든 사료들이 일치하게 증언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물론 전투기간도 '하루밤 하루 낮'보다 길었다. 지도를 보면 금세 알 일이지만, 한산도와 거제도는 바로 이웃한 섬이라서 '하루 종일 배를 저'을 만한 거리가 전혀 아니다. 원균의 함대는 부산 앞바다까지 갔다가 그대로 배를 돌려서 칠천량 바다까지 '하루 종일' 노를 저어왔기에 지쳐서 전투력을 잃었던 것이다.

또한, 원균은 '거제도의 산 속'에서 '칼 한 자루도 지니지 않고' 죽은 게 아니라, '고성 땅'에서 '칼을 지니고' 죽었다. 당시 전투 현장에는 왕명으로 현지에 내려갔던 선전관 김식(金軾)이 있었다. 김식은 조선 수군이 모두 무너질 때 원균과 함께 상륙하여 달아나서 살았는데, 그가 상경하여 임금에게 직접 보고한 당시의 실상은 이러했다.


"…우리의 주사(舟師, 수군)는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후퇴하였으나 도저히 대적할 수 없어 할수없이 고성 지역 추원포(秋原浦)로 후퇴하여 주둔하였는데 적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마침내 우리 나라 전선은 모두 불에 타서 침몰되었고 제장과 군졸들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모두 죽었습니다. 신은 통제사 원균 및 순천부사 우치적(禹致績)과 탈출하여 상륙하였는데, 원균은 늙어서 걷지 못하고 맨몸으로 칼을 짚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일면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30년 7월 22일조)



4) 이순신이 '장계에 쓴 적병의 숫자가 죽을 죄목'이 아니었다

김훈은 "임진년에 여러 포구에서 이겼을 때, 매번 적병의 숫자를 장계에 써 보낸 것이 지난 정유년에 조정에서 문제가 되었다. 전공을 허위로 보고해서 …그것이 내가 죽어야 할 죄목의 하나였다. 견내량에서 이겼을 때부터 나는 장계에 적병의 숫자를 적지 않았다."(<칼의 노래> 1, 135~136쪽)고 썼는데, 이 대목도 사실과 다르다.


이순신이 잡혀와 고문을 당하며 조사 받고 있을 때, 선조는 그의 죄에 대해서 직접 명백하게 '3가지 죄목'을 정해 주면서 "죽여야 마땅하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위에서 보았듯, 그 3가지 죄목 중에 위와 같은 죄목은 전혀 없었다.(<선조실록> 선조 30년 3월 13일조)




2. 김탁환의 <불멸>

이 소설이 지닌 치명적인 문제점은, 저자가 미리 자의적으로 설정해 놓은 이순신과 원균의 캐릭터에 맞추느라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의도적이고 악의적으로 왜곡한 것이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황당하고도 해괴한 역사 왜곡이 마구 감행되어 있을 뿐더러, 당시의 제도와 그 운용에 대해서도 어두워서 실제와 전혀 다른 묘사도 자주 등장한다. <불멸>이 지닌 문제점을 세 단계(어린 시절, 함경도 시절, 임진왜란)로 나누어 고찰한다.



1) 어린 시절

김탁환은 '원균은 명장'이라는 전제 아래, 그의 캐릭터를 사내답고 씩씩하고 호쾌하고 무용이 뛰어난 무장으로 설정했다. 김탁환은 그런 설정에 맞추기 위해서, 아예 원균의 어린아이 시절부터 왜곡하기 시작했다. 원균은 이순신과 유성룡과 함께 어렸을 때부터 서울 건천동의 한 동네에서 자라면서 아이들의 대장노릇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열두 살인 원균이 열 살인 유성룡과 이요신(이순신의 형)의 도전을 받아들여 전쟁놀이를 하는 장면을 만들어 넣었다. 전쟁놀이의 결과, 원균은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그 결과 유성룡과 이요신은 원균의 앞에 꿇어앉아 눈물을 훔치고, 추운 겨울날임에도 불구하고 원균이 명에 따라 바지를 벗어 엉덩이를 드러내야 했으며, 바지를 안 벗으려고 버티다가 강제로 옷을 찟기고 있는 일곱살 짜리 약골인 코흘리개 이순신을 구하려 나섰다가 유성룡이 원균에게 죽도(竹刀)로 심하게 맞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불멸> 1, 240~242쪽).

이 대목은 그냥 읽는 재미를 주기 위해 만들어 넣은 것이 아니다. 뒷날 유성룡이 원균의 벼슬길을 막아대서 원균이 출세하지 못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일부러 설정되어 있는 장면이다. <불멸>에는 유성룡이 어린 시절에 그렇게 당한 원한으로 훗날 원균의 벼슬길을 계속 모질게 가로막았기 때문에 원균의 출세가 늦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이런 대목이 나온다.

유성룡, 이놈! 네놈이 나와 무슨 원수를 졌기로 내 앞을 이다지도 가로막는단 말이더냐.
원균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참으로 질긴 악연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십여 년 전, 건천동에서의 나날들이 눈에 선했다.
작고 볼품없는 죽도를 휘두르며 저잣거리를 달리는 아이들, 긴 댕기머리를 휘돌리며 진흙탕을 뒹굴고 감나무를 오르는 아이들, 글공부보다 들판으로 질주하기를 더 좋아하는 아이들, 머리통 하나는 더 큰 체구에 우렁찬 목소리를 가진 원균은 그 아이들의 대장이었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겨울날, 이요신과 유성룡이 원균에게 도전장을 냈다. 열두 살의 원균은 이제 겨우 열 살을 넘긴 그들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불멸> 1, 240쪽)

그러나 이런 설정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유성룡의 연보에 따르면, 유성룡은 ..년에 경상도 의성의 외가에서 태어나서 고향에서 자라다가 13세때인 갑인년에 서울로 와서 동학(東學: 서울에 있던 사학의 하나로서 동부에 있었음)에서 <중용>과 <대학>을 강독(講讀:글의 뜻을 설명하고 토론하면서 읽음)했다. 당시 조정에서 처음 과거보는 유생들에게 모두 사학(四學)에서 <중용>과 <대학>을 강독하게 한 데 따른 것이었는데, 유성룡은 이때 동학에 다니면서 강독에 참여하여 강관(講官)으로부터 "반드시 큰 학자가 될 것이다"라는 말로 크게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니 김탁환의 <불멸>에 나오는 것처럼, 유성룡이 10세 때 원균과 전쟁놀이를 하다가 져서 바지를 벗기우고 또 죽도로 맞은 것 때문에 원균에게 두고두고 원한을 품은 나머지 원균의 벼슬길까지 막는 일 같은 것은 애당초 있을 수조차 없었다.

그렇다면 유성룡이 서울에 올라온 13세때의 일이라면 가능했을 것인가를 살펴보면, 그래도 김탁환의 <불멸> 식의 그들의 어울림은 불가능하다. 앞에서 보았듯, 유성룡의 경우, 그가 서울에 올라와서 동학에서 강독에 참가하여 과거공부를 하던 중이니 원균과 전쟁놀이를 하며 엉덩이를 까내린다는 일은 전혀 가당치 않다. 또한 원균의 경우라 해도 그 때는 원균의 나이 15세일 때니, 동네 조무라기들과 전쟁놀이를 하며 남의 바지를 까내리게 할 때는 이미 지난 때인 것이다.

더구나, 사료를 살펴 보면, 유성룡이 전쟁놀이에서 져서 모욕을 당하고 죽도로 맞았던 원한으로 원균의 벼슬길을 막았다는 것은 전혀 근거없는 왜곡이다. 그 근거가 명확하게 <선조실록>에 들어 있다. 원균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바로 전 해에 전라좌수사로 임명되었다가 파면된 일과 관련된 사안이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좌수사 원균은 전에 수령으로 있을 적에 고적(考績)이 거하(居下)였는데, 겨우 반년이 지난 오늘 좌수사에 초수(超授)하시니 출척권징(黜陟勸懲)의 뜻이 없으므로 물정이 마땅치 않게 여깁니다. 체차를 명하시고 나이 젊고 무략(武略)이 있는 사람을 각별히 선택하여 보내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선조실록> 선조 24년 2월 4일 신미조)


이런 <선조실록>의 기록으로 보아, 원균은 전에 어느 지방의 수령으로 있다가 평가가 나빠서 파면되었고, 파면 된 지 반년 뒤인 이때에 품계를 뛰어올린 승진인 전라좌수사직 임명을 받았다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간원이 원균의 전라좌수사 임명을 반대한 논거는 '원균 자신이 수령으로서 거둔 나쁜 성적' 때문이었고 그 반대를 선조가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러니, 원균의 출세를 막은 것은 원균 자신의 과거 행적이었을 뿐, 결코 '유성룡이 어렸을 때 맞으면서 품은 원한 때문에 원균의 앞길을 가로막은 탓'이 아니었다.

아무튼 원균의 뒤를 이어 새로 유극량이 전라좌수사직에 임명되었다가 그도 사헌부의 논계에 의해 2월 8일자로 파면되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다시 임명된 장수가 이순신으로서 그 직을 지니고 임진왜란을 맞았던 것이다.



2) 함경도 시절

김탁환은 원균을 명장으로 만들기 위해서 대담하게 감행한 역사 왜곡의 또다른 축은 '원균의 함경도 시절'이다. 원균은 함경도의 녹둔도에서 여진족을 토벌한 일에 큰 공을 대단하게 세웠고 그때부터 '육진의 수호신'으로 불렸으며, 니탕개 무리의 토벌과 시전부락 토벌전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웠고, 또 이순신이 녹둔도에서 패전하여 처형당하게 되었을 때 원균이 그의 목숨을 구해 주었고, 그런 원균에 대해서 이순신은 평생 열등감을 안고 살아갔다는 것이다.

그런 구도를 '이순신 자신이 하는 말'이란 장치를 통해서까지 자꾸 강조한다. 녹둔도 전투로 북병사 이일에게 소환되어 문초받던 이순신이 '관아가 흔들릴 만큼 큰소리로 외쳤다'는 말의 서도가 이러하다.
"원부사가 녹둔도에서 대승을 거둔 후 야인들은 녹둔도를 멀리했소이다. 육진 중에서도 가장 안전한 곳으로 지목되어 둔전을 짓게 된 것도 그 때문이지요."(<불멸> 1, 32쪽), 또한 "육진 시절, 그는(원균) 나의 우상이었소."라느니, "원수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여진족이 압록강을 건너지 못하던 때도 있었느니라"(<불멸> 3, 18쪽)와 같은 표현들이 소설 전체를 도배하듯 했다. 이토록 대단한 원균의 ‘함경도 신화’의 구도는 <불멸> 전4권 전체를 통하여 유지되는 기본 골격이다.
그러나 이것은 선조조 당시 북변의 사정과 역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서 온 해괴하고도 황당한 날조에 해당하고, 니탕개 토벌전의 영웅인 온성부사였던 신립과 시전부락 토벌전의 영웅인 함경 북병사 이일의 전공을 가로채서 원균에게 넘긴 우스꽝스러운 역사 왜곡에 불과하다.

김탁환이 자행한 여진족 토벌관계에 대한 역사 왜곡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서, 먼저 선조 당시 북변에 대한 역사를 고찰한다.

선조 치세 당시 선조 16년(1583) 이전에는 북변에서 일체 전투가 없었다. 폭풍 전의 고요함인 듯, 임진왜란의 대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꼬박 28년 동안 이상하게도 평화로운 승평의 시절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돌연 선조 16년(1583, 계미년)에 북쪽 야인(野人) 추장인 니탕개가 2만여 기를 거느리고 변경을 침략함으로써 수십 년을 이어온 평화가 깨졌다. <한국군제사(韓國軍制史)>는 이때의 일을 <선조실록> 등 각종 사료의 기록들을 통합 정리하여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명종 10년의 을묘왜변 이후 니탕개란(泥蕩介亂)이 일어난 선조 16년까지 약 30년 동안은 이제까지 대소 규모로 침입을 끊이지 않던 남쪽의 왜인이나 북쪽의 야인이 거의 잠잠한 상태이어서 이른바 승평의 세월이 계속되고 있었다. ……선조 16년(1583) 정월과 5월 양차에 걸친 두만강 일대 야인의 추장인 니탕개의 난은 이와 같이 해이하여진 국방태세에 일대 경종이었다. ……(니탕개는) 동왕 16년 정월 진장(鎭將)의 대우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인부(隣部)를 동원하여 경원부로 입구(入寇), 아산/안원 양보(兩堡)를 점령하였다. 이에 조정은 파직 무신 오운 박선 양인을 서용하여 조방장으로 삼고 경중의 용사 80명을 거느리고 먼저 전지에 부방하게 하고, 이어서 경기감사 정언신을 우참찬으로 승진시켜 도순찰사로 함경남도 병사 김우서를 방어사로 임명하여 출동하게 하였다." - <한국군제사> 근세조선 전기편, 372~373쪽, 육군본부, 1968

명종 10년의 을묘왜변은 서기로 1555년이요, 선조 16년의 계미년 니탕개란은 서기로 1583년이니, 정확하게 따지자면 '28년' 동안 전혀 전투가 없는 승평의 세월이 계속된 것이다. 그러니 선조가 등극한 이래 그 때까지 전혀 국경지방에서의 전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돌연 계미년 1월에 국경지방의 여진족 추장인 니탕개가 이웃 부족들까지 대거 동원하여 쳐들어와서 경원성을 함락시켰다.

나라를 통치하기 시작한 이래 최초로 받은 변경의 흉보를 대한 선조가 통치자로서 느낀 충격은 매우 컸던 모양이다. 경원성(慶源城)과 안원보(安遠堡)가 함락되었다는 북병사 이제신의 치계가 조정에 도착한 것이 계미년 2월 9일인데, 선조는 그 날로 즉각 “성을 지키지 못한 책임을 물어 경원부사 김수(金璲)와 판관 양사의(梁士毅)의 목을 군진 앞에서 베어서 군율을 진작시키라”는 명을 내렸다.(<선조실록> 선조 16년 2월 9일조)

그런데 김수와 양사의의 목을 벨 선전관이 미처 출발하기 전에 다시 북병사의 치계가 당도하여 "1월 28일의 싸움에서 김수가 고군분투하여 적 40여 급을 베었다"는 승첩을 알렸다. 그러자 비변사에서는 그 공을 들어 김수를 살리기 위해서 "속죄하기에는 부족하지만, 김수의 사형 집행을 연기하고 다시 논의하는 것이 좋겠다"고 선조에게 건의했으나 즉각 단호하게 거부되었고, 결국 선전관이 내려가서 2월 26일에 두 사람의 목을 베었다 (<선조실록> 선조 16년 윤2월 5일조). 니탕개 무리는 5월에도 다시 대거 침공했었는데, 당시 온성부사로 있던 신립이 대승첩을 거두면서 난을 평정했다.

<한국군제사>는 이 부분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니탕개란의 평정에 있어서 유공하였던 장군은 신립이었고, 그 공으로 그는 임란이 발발할 때까지 근 10년 동안 일국의 명장으로서 온 국민의 촉망을 일신에 모우고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나 때에 신립이 명장이 된 근본요인의 하나가 새로 발명된 승자총통(勝字銃筒)의 이용에 있었음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니탕개란의 직후인 선조 16년 6월에 이미 왕은 ‘고(故) 병사 김지가 신제(新製)한 승자총통은 이번 북방사변(니탕개란)의 격퇴에 있어서 크게 유효하였다’고 칭예(稱譽)하면서 그에게 관직을 추증하고 그 자손에게 관직을 주었으며" - 위의 책, 459~460쪽
라고 하여, 온성부사 신립이 승자총통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니탕개란을 진압했음을 명확히 밝혔다. 니탕개란이 평정된 뒤에도 순찰사 정언신은 계속 함경도에 머물면서 사변에 대비했고, 그가 두만강 하구쪽에 있는 녹둔도에 둔전을 설치할 것을 조정에 건의하여 허락됨으로써 이듬해인 갑신년(1584) 봄부터 녹둔도에 목책을 둘러치고 군사를 두어 땅을 개간하게 하여 둔전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 녹둔도 둔전은 조산만호 이순신이 녹둔도 둔전관을 겸하고 있을 때인 정해년(1587) 추수철에 갑자기 녹둔도에 쳐들어온 야인의 침공으로 큰 피해를 입은 뒤 조정의 명에 의해 둔전이 폐지되었기에, 불과 4년 동안만 운영되었다. 이때의 녹둔도 침입에 대한 응징으로, 조정에서는 다음 해인 무자년(1588) 1월에 북병사 이일로 하여금 함경도 군사 및 서울의 군사들까지 동원한 대군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가서 여진족의 근거지인 시전부락(時錢部落)에 대한 대토벌을 단행하게 했다.)

그렇다면 북변 여진족 토벌과 원균의 관계는 어떠한가. 사료를 고찰하면, 원균과 이순신 모두 계미년과 무자년에 단행된 여진족 토벌작전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먼저 원균의 경우를 <원균 행장>과 <선조실록>의 기록을 통해 고찰한다.

우선 <원균 행장>을 보면, 원균은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을 거쳐서 조산만호로 있을 때 번호(藩胡)를 토벌하는 데 공이 있으므로 부령부사로 초배(超拜)되었다가 이내 종성부사로 자리를 옮겼고, 병사 이일(李鎰)을 따라서 시전부락을 격파하였다." (<원균정론> 290쪽, 이재범, 계명사, 1983)고 되어 있다. 또한 선조 29년(1596)에 경연석상에서 선조가 신하들과 여러 장수들의 됨됨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원균에 관한 이야기도 나왔었는데, 그때 오갔던 이야기가 <선조실록>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상(上)이 이르기를
"원균에 대해서는 계미년부터 익히 들어왔다. 국사를 위하는 일에 매우 정성스럽고 또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중략) 김수가 아뢰기를
"전에 조산 만호로 있었을 때 어사 성낙이 장계하여 포장하였습니다."
(중략) 조인득이 아뢰기를
"소신이 일찌기 종성에서 그를 보니, 비록 만군이 앞에 있다 하더라도 횡돌(橫突)하려는 의지가 있었고, 행군이 매우 박실하였습니다. 탐탁(貪濁)한지는 모르겠습니다."
(<선조실록> 선조 29년 10월 21일조)


두 자료를 종합해 보면, 원균은 계미년(1583)에 조산만호로 있으면서 니탕개난 토벌전에서 참가하여 공을 세워 부령부사로 승진했고, 종성부사로 있을 때 시행된 시전부락 토벌전에도 참가했음을 알 수 있다.
선조조 당시의 조선 무장들은 선조의 즉위 이래 첫 전투였던 계미년 대토벌작전을 통해서 처음으로 무장으로서의 역량과 명성을 세상에 알렸다. 계미년 이전에는 외적과의 전투 자체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무공을 떨쳐 이름을 낼 일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선조가 원균을 두고 "계미년부터 익히 들어왔다(自癸未年熟聞之矣)"고 말한 것이다. 즉 계미년 이전에는 원균 역시 외적과 싸운 일이 전혀 없었음이 선조의 언급으로도 명확하게 증명된다.

당시 북변의 정세 및 녹둔도 둔전의 유래와 존재 시한이 이러했음에도 불구하고, 김탁환은 전혀 다른 역사를 날조해 놓았다. 원균이 조산만호였다는 것만으로 원균 시절에도 녹둔도에 둔전이 있었을 것으로 지레 착각하고 원균의 전공을 엄청나게 날조해냈다.

이물에 서서 녹둔도를 바라보던 이경록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부령부사를 거쳐 종성부사로 가 있는 원균 장군의 첫 벼슬이 조산만호였다지?"
귀밑까지 뻗친 구레나룻이 인상적인 임경번이 협선을 뒤따르는 갈매기떼를 응시하며 대답했다.
"그렇습죠. 그때도 소인은 녹둔도의 군관이었습니다."
"호오. 그래? 그렇다면 녹둔도에서 야인 삼백여 명을 몰살시킨 전투를 알겠구나."
"알다 뿐입니까? 소인이 직접 참전했습죠."
"원부사가 홀로 목책을 뛰어넘어 적진으로 돌진했다는 게 사실이냐? 빗발치는 화살을 뚫고 말이다."
임경번은 신바람이 나서 대답했다.
"그러믄입쇼. 그땐 정말 대답했습니다. 원장군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나가자 소인을 비롯한 장졸들도 한꺼번에 목책을 넘어 뒤를 따랐습니다. 오랑캐놈들, 우리가 선제공격을 하리라곤 꿈에도 생각을 못했던지 허둥지둥 해안으로 달아나느라 아우성이었습니다. 원장군께서는 장검을 휘두르며 사정없이 놈들의 목을 쳤습죠. 수급(首級, 전투에서 벤 적군의 머리) 삼백 두를 거두어들이는 동안 아군은 단 한 명도 죽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야인들은 이 근처에 얼씬도 않고 있습죠."
"과연 원부사는 용장임에 틀림없구나. 지금의 조산만호 이순신은 원부사와 비교해서 어떠한가?"
임경번은 눈을 끔벅끔벅거리면서 잠시 말을 접었다.
"말해 보아라. 원부사에 비해 어떠한가?"
"어찌 감히 원부사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원부사는 육진의 수호신이옵니다."
(<불멸> 1, 23~24쪽)

참으로 어이 없는 황당한 역사 왜곡이다. 원균을 이순신과는 비교도 안되는 명장으로 만들기 위해서 원균의 생애 첫 승첩으로서 '녹둔도에서의 대승리'이라는 가공의 역사를 날조해내고 원균에게 거창하게도 '육진의 수호신'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하필 '녹둔도'를 원균이 처음으로 거둔 대승첩의 전장으로 설정한 것에는, 이순신이 선조 20년(정해년, 1587)에 녹둔도에서 당한 실패와 대비시키려는 노골적인 의도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 보았듯, 원균이 조산만호로 있던 계미년에 녹둔도에는 둔전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원균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나가 뛰어넘을 ‘목책’도 없었고, 물론 지키고 있는 조선 군사도 일체 없었던 텅빈 섬이었다. 따라서 그리로 여진족이 쳐들어올 이유도 없었고, 쳐들어온 일도 전혀 없었다.

계미년 니탕개의 난이 일어나자 왕명을 받아 순찰사로 현지에 내려가서 난의 평정을 총지휘했던 정언신은 난이 평정된 뒤에도 계속 현지에 남아서 방어체제를 살폈고, 그해 연말에는 북변 방수 전략의 하나로서 녹둔도에 둔전을 설치할 것을 조정에 건의하여 허락받은 결과 녹둔도에 둔전을 설치하게 되었다. 그래서 뒷날 그가 병조판서로서 조정에 있던 때인 선조 20년(1587) 9월에 녹둔도에 여진족의 침입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는 변보가 서울에 도달하자마자 정언신은 책임을 통감하고 먼저 자신을 처벌해줄 것을 자청하고 나섰다.

<병조판서 정언신이 아뢰기를,
"녹둔도에 논밭을 일군 일은 전부 신에게서 발의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적호들이 침범해 와서 사람과 가축들을 약탈해 갔다는 소문을 들었으니, 이는 모두 신의 그릇된 생각으로 말미암아 빚어진 일입니다. 먼저 신을 다스려 조야(朝野)에 사과하소서.">
(<선조실록> 선조 20년 10월 4일조)

당시 선조는 정언신이 자신을 처벌해 달라고 한 요구에는 좋은 말로 만류했지만, 이 일을 계기로 녹둔도 둔전을 폐지했다. 불과 4년 동안 둔전이 경영되었고, 이순신이 당했던 녹둔도 전투를 계기로 폐지되었던 것이다.
이 자료 하나만 보아도 녹둔도 둔전의 역사의 전모를 알 수 있고, 김탁환이 주장하는 원균이 여진족 수급 3백 두를 거둔 녹둔도의 대승리 운운 하는 주장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허구인지를 알 수 있다.
선조가 즉위한 이래, 선조 16년 계미년 1월에 돌연 경원부로 침공하여 경원성을 함락시켰던 니탕개 무리를 응징하는 대규모 토벌전이 실시되기 전에는 조선의 무장들과 여진족과의 사이에서 전투가 전혀 없었다. 당연히 원균이 생애 최초로 참여했던 실전은 '계미년 이전의 녹둔도 전투'가 아니라 '계미년의 니탕개 토벌전'이었다. 그리고 원균은 거기서 공을 인정받아 부령부사로 승진했다는 것인데, 단편적인 언급만 있을 뿐 그에 직결된 상세한 자료는 아무 데도 없다. 당시 니탕개 토벌전에서 거둔 대승첩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역사에 큰 활자로 기록된 장수는 신립이다.
여기서, 김탁환이 원균을 위하여 선조조 여진족 토벌에 관한 실제 역사를 얼마나 심하게 왜곡하고 해괴하게 날조했는지 그 실례를 들어본다.

계미년(癸未年, 1583년) 봄부터 여름까지 여진족 추장 니탕개는 삼천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두만강을 넘나들었다. 곡식과 의복을 빼앗기 위한 일시적인 노략질이 아니라 육진을 한꺼번에 삼키려는 전초전의 성격이 강했다. 남의 땅을 빼앗기는 쉬워도 이미 얻은 땅과 성을 지키기란 어려운 법이다. 온성부사 신립이 두만강을 건너자고 했을 때 경원부사 이일과 부령부사 원균만이 그 제안에 동조했다. 나머지 삼진의 부사들은 개죽음을 자초할 뿐이라며 발을 뺐다. (중략) 원균이 앞장을 섰고 이일이 뒤를 따랐다. 신립은 맨 뒤에 처져서 멈칫거리는 군졸들의 목을 쳤다.
(<불멸> 1, 243쪽)

김탁환이 묘사한 계미년의 니탕개 무리에 대한 토벌전은 발단도 성격도 진행도 모두 역사적 사실과 다른 것임은 물론, 온성부사 신립을 빼고는 가장 기본인 인적사항마저 사실과 다르다. 계미년 1월에 니탕개란이 벌어졌을 당시, 경원부사는 이일이 아니었다. 니탕개에게 경원성을 함락당한 죄로 왕명에 의해 목이 잘려 처형된 김수(金璲)였다. 경원부사 김수가 조정에서 내려간 선전관에 의해 처형되어 죽은 날이 2월 26일, 그 후임으로서 4월 7일자로 새로 임명된 경원부사가 이일이었다. 임명 당시 이일은 전라수사였으니 (<선조실록> 선조 16년 4월 7일조), 그가 실제로 함경도에 부임한 날은 그로부터 훨씬 뒤였을 것이다.

또한 니탕개의 난 당시에 원균은 조산만호였지, 부령부사가 전혀 아니었다. 당시 부령부사는 장의현(張義賢)이었는데, 장의현은 니탕개 무리와의 전란에서 큰 공을 세워서 가자(加資:정삼품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를 올려주는 일)까지 되면서 현재 <선조실록>에 이름이 당당히 올라있다. 선조 16년 2월에 니탕개의 난이 일단 평정된 뒤에, 선조가 승전원에 전교하여 토벌전에서 공을 세운 장수들에 대한 포상을 다음과 같이 지시했는데, 그 안에 당시 부령부사이던 장의현에 대한 항목이 들어있다.

<전교하였다.
"신립은 가자
6
댓글
2004-09-01 05:38:42

한마디로 김탁환이니 고정욱이니 책 좀 팔아서 돈 좀 벌어보겠다는 추악한 생각으로 이순신 장군에 대 한 역사왜곡을 무자비하게 단행했다는 얘기네요. 나라 팔아먹은 이완용이에 버금가는 인간말종들입니 다.

헬몬트
2004-09-01 05:39:43

우헤헤헷.이젠 유성룡 폄하론까지 나왔군요.

피그말리온
2004-09-01 07:06:22

다음타자는 누구일까요?

하윤아빠
2004-09-01 07:17:02

^^ 좋은 글 읽었습니다..언제 날잡아서 다시 한번 정독하구 싶네여.. 3단락이 다 나와있는 곳 좀 알려주십시요

WR
더나은미래
2004-09-01 09:40:18

크라잉프리맨님, 감사합니다. 요청하신 마무리 부분을 퍼 왔습니다. 모쪼록 KBS에서 방영할 <불멸의 이 순신>에서는 왜곡된 점이 수정됐으면 좋겠네요.

특수곰™
2004-09-01 12:37:46

진짜 추악하군요... 더 이상 원균론에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을듯...

댓글 남기기
로그인 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05:35
6
603
연수현우아범
04:14
 
668
고담의 현자
04:09
2
1689
블러프잼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