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정치] 모욕에 대처하는 태종과 세종의 자세
때는 1413년.
조선 태종 13년에 해당하는 이 해에 다음과 같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혜정교(惠正橋) 거리에 아동 곽금(郭金)·막금(莫金)·막승(莫升)·덕중(德中) 등이 있어 타구(打毬) 놀이를 하는데, 매 구(毬)의 칭호를 하나는 주상(主上)이라 하고, 하나는 효령군(孝寧君)이라 하고, 하나는 충녕군(忠寧君)이라 하고, 하나는 반인(伴人)이라 하였다.” <태종실록> 13년 2월 30일
오늘날의 광화문 우체국 근처에 위치한 혜정교 거리에서 곽금 등 4명의 아이들이 ‘타구’ 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타구’가 뭐냐 하면 대나무 등으로 만들어진, 숟가락처럼 생긴 몽둥이를 휘둘러 달걀만한 목제 또는 석제 공을 상대편의 골문(毬門)에 넣으면 점수를 얻게 되는, 일종의 놀이이자 스포츠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타구놀이 자체가 아니라 아이들이 공에 붙인 이름이었습니다. 하나는 충녕군(후일 세종)이라 했고, 하나는 효령군(충녕의 둘째 형)이라 했으며, 다른 하나는 주상(主上)이라 붙였던 것입니다. 주상은 다름 아닌 당시의 임금 태종 이방원을 가리키는 것이었죠.
아무리 아이들이라 해도 임금의 권위가 절대적인 왕조국가에서 국왕과 왕자들의 호칭을 붙인 공을 몽둥이로 후려치고 있었으니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어지는 기사는 이렇습니다.
“서로 치다가 구(毬) 하나가 다리 밑의 물로 굴러 들어가자, 그 아이가 말하기를 ‘효령군이 물에 빠졌다.’하였다. 효령군의 유모(乳母)가 마침 듣고 쫓아가 잡아서 효령군의 장인 대사헌 정역(鄭易)에게 고하였다. 정역이 형조에 고하여 옥에 가두고 물으니 말하기를 ‘곽금(郭金)이 제창하여 장난한 지 이미 3일입니다.’하였다.”
아주 제대로 걸렸습니다. 효령군이라 이름 붙인 공을 후려갈겨 개천에 빠지게 한 다음 그 군호(君號)를 부르며 희롱하고 있는 것을 마침 근처를 지나던 효령군의 유모가 듣고는 아이들을 붙잡아 효령군의 장인인 대사헌(오늘날의 검찰총장) 정역에게 고변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감옥에 갇히고, 문초를 당하게 되었지요.
감히 대놓고 임금과 왕자들을 모욕하였으니 사건을 조사한 형조(오늘날의 법무부)는 임금인 태종에게 그 내막을 아뢰어야 하였습니다.
“이때에 이르러 형조에서 요언률(妖言律)로써 갖추어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아이들은 모두 10세에 불과하니 요언(妖言)을 조작한 것으로 논함은 불가하며 또 동요(童謠)라 이를 수도 없다. 예전의 이른바 동요란 이런 일이 아니었다. 비록 이것이 동요라 하더라도 또한 무죄(無罪)이니, 동요의 율은 즉시 대언사(代言司)로 하여금 형조와 함께 불태우게 하라.’”
요언(妖言)이란 ‘요망한 말’로서 율대로 하자면 참형(斬刑)에 해당하는 중죄였습니다. 여기서 참형이란 칼로 목을 쳐서 죽이는 형벌을 말합니다.
하지만 태종은 아이들의 행동을 요언률로 논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판단했습니다. 불과 10세 언저리에 불과한 아이들의 철없는 행동을 법조문에 나와 있는 무서운 형벌로 다스리는 것은 도리로 보나 인정으로 보나 가당치 않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조정의 질서를 다잡기 위해 처가 식구들과 사돈, 그리고 생사를 함께 했던 공신들까지 가차 없이 죽여버린 냉혹한 군주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태종도 한갓 아이들의 장난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과도한 형벌을 가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아이들의 죄상을 담은 형조의 계문(啓文)을 불사르도록 명하고 이 사건을 다시는 재론하지 않도록 지시합니다.
세종과 관련된 사건도 알아봅시다.
“난언(亂言)을 한 조원(曺元)을 의금부(義禁府)에 가두었다. 당초에 조원이 강음현(江陰縣)의 전지 소송(田地訴訟)을 하였는데, 현관(縣官)이 오랫동안 미루면서 결단하지 않는 것을 분하게 여겨 ‘지금 임금이 착하지 못하여 이와 같은 수령(守令)을 임용했다.’ 하였다. 마침 본궁(本宮) 노자(奴子)가 옆에 있다가 (그 말을) 듣고 알린 것이었다.” <세종실록> 6년(1424) 4월 4일
오늘날의 황해도 금천에 해당하는 강음현에서 조원이라는 사람이 토지 관계로 소송을 하였는데 관할 수령이 오래도록 판결을 해주지 않고 시간을 끌고 있었나봅니다. 이에 조원이 홧김에 ‘임금이 착하지 못하여 저런 불성실한 자를 고을 수령으로 앉혔다.’고 불평을 했던거죠. 그런데 이걸 관노(官奴 관청 소속 노비)가 듣고는 고발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의금부 제조 및 삼성(三省)에서 계하기를 ‘조원(曺元)이 비방한 연유를 신문하니, 답하기를 “내가 전지(田地) 송사를 하여 관(官)에서 판결하기를 기다리는데, 수령이 손님을 대하여 술을 마시면서 속히 판결하지 않으므로, 분하고 성이 나서 이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다시 묻지 말라. 무지(無知)한 백성이 나를 착하지 못하다 하는 것은 바로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려는 것과 같은 것이니 차마 어찌 죄를 주겠느냐. 속히 놓아 보내라.’ 하였다.
지신사 곽존중(郭存中)과 다섯 대언(代言)이 들어와서 아뢰기를 ‘주상께서 조원의 무지한 망발을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해서 놓아 주고 논죄하지 말라 하시니 이것은 비록 성상(聖上)의 미덕이시나, 이와 같은 죄를 논하지 아니하시면 무엇으로 후인을 징계하겠습니까.’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세종실록> 6년 4월 17일
이 조원이라는 사람에게 적용된 난언(亂言)죄 역시 참형에 처해질 수 있는 매우 중대한 범죄였습니다. 세종이 관대한 임금으로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당시는 전근대의 군주국가인 조선시대였고, 세종은 국왕으로서 보수적 유교국가의 수호자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부친인 태종처럼 세종도 이 사건에서 더 이상의 처벌은 가하지 않도록 명합니다. 지방관의 사법행정에 마음이 상해서 홧김에 한 말을 가지고 인명을 상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이죠.
(나중에 신료들이 끈질기게 조원을 죄줄 것을 청하여 그를 고향으로 보내서 생업에 종사하도록 조처하는 선에서 마무리를 짓습니다. 죽을죄를 지었는데 이 정도 선에서 그쳤으면 대단히 너그러운 처분이었습니다.)
지금은 세상이 바뀌어 우리는 더 이상 군주를 섬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임금이 나라의 주인이자 만백성의 어버이이던 시대에서 국민이 주인이고 주권자인 세상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물론 여전히 나라를 이끌어 가는데 지도자가 필요하긴 합니다만 어디까지나 그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된 권력입니다. 국가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인만큼 그에 걸맞은 권위가 주어지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국민의 위에 군림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따라서 국민은 지도자를 비판할 자유와 권리가 있고 지도자는 국민의 비판을 겸허히 수용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격한 비난이나 조롱이 가해진다 해도 기꺼이 감수해야 합니다. 그것이 권력을 위임한 주권자, 국민에 대한 예의입니다.
지도자가 자신을 비난하는 국민을 관대하게 대할 때 국민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을 표할 수 있을 것이고 그 결과로 민주주의는 굳건하게 자리 잡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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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정말 재미있군요. 현재 필요한 사람들에게 쇠귀에 경 읽기이겠지만,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