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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한잔]  가장 짧은 독일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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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1 04:50:29

가장 짧은 독일의 역사(Shortest history of Germany)를 읽었습니다. 예전에 Aurelius님께서 프차에 서평을 올리셨던 책인데 (https://dvdprime.com/g2/bbs/board.php?bo_table=comm&wr_id=21476754&sca=&sfl=wr_content&stx=shortest+history+of+germany&sop=and&scrap_mode=), 한참 시간이 지나서 저도 읽어 보았습니다.
명료한 주제를 속도감 있게 풀어나간 책이었습니다. 페이퍼 백, 200여 페이지, 상대적으로 큰 활자. 한 25년 전에 유행하던 XX사 100장면 시리즈 같다는 느낌도 살짝 들더군요.

“독일을 형성하는 두 정체성이 있다. 하나는 기원 무렵부터 로마의 영향권에 들었던 지역(게르마니아)이고, 다른 하나는 1000년 정도 후에, 게르만족이 동쪽으로 팽창할 때 슬라브족을 식민화하면서 굳힌 엘베 강 동쪽 지역(東엘비아)이다.“ 여기까지가 밑밥이고, 저자의 본격적인 주장은 “동엘비아에 기반한 프로이센은 사실상 게르마니아의 서구적 가치와 전혀 양립할 수 없었으며, 프로이센이 독일 정치의 주도권을 잡았던 1871-1945의 기간은 실패한 역사이다.”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제에서 볼 수 있듯, 명쾌한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독일사를 재단합니다. 로마법의 전통을 이어받은 인권, 카톨릭 전통, 자유로운 인간으로 도식화 한 게르마니아와 전제적 지배, 다수 슬라브인에 대한 항시적 공포, 국가의 힘에 대한 숭배로 도식화 되는 동엘비아. 이 도식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 다이어그램과 도표를 사용하는 데에 전혀 주저함이 없습니다.

유럽사를 배우던 때를 돌이켜 보면, 신성로마제국이 독일의 전신이라고 여기면서 30년 전쟁까지를 배우다가, 갑자기 그 다음부터는 프로이센이 독일의 원래 이름인 것처럼 캐스팅이 바뀌어서 좀 당황 내지는 갈피를 못 잡았던 기억이 나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감이 좀 잡혔습니다.

 

책의 주요한 내용은 앞서 링크한 Aurelius님의 글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저는 거기에 좀 정치적 필터링을 좀 한 멍청한 댓글을 달았었는데, 책 내용은 그냥 대놓고 과격하더군요.

 

 

여기부터는 책을 읽고 든 사감입니다.

현대의 지도에는 작센, 작센안할트, 니더작센, 앵글로색슨으로 이어지는 작센의 연속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서는 곳이 달라지면 보이는 것도 달라지듯, 이 책은 영국 출신의 작가가 보는 독일사라는 것을 되새겨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책은 메르켈 총리에 대한 극찬으로 시작됩니다. 자유서구세계의 마지막 수호자라고. 트럼프와 브렉시트 때문이라도, 현실 세계의 앵그로색슨이 서구세계를 대표한다고 저자는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앵글로색슨 대신 그 범위를 조금 넓힌 “로마의 전통을 이어받은 자유서구세계”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그 안과 밖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한 적절한 대상으로 독일을 발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로마와 로마가 아닌 것의 경계는 브리튼 섬 안에도 있습니다. 하드리아누스 방벽이라고. 하지만, 저자가 독일에서 발견한 그런 명징한 안팎의 대비는 그 경계 양쪽에서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 저자가 책의 후반부 반을 할애하며 프로이센을 악 그 자체로 규정할까요? 답은 간단히 저자가 영국인이라서 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20여년 전에 브레진스키의 거대한 체스판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거기에는 프랑스가 유럽에서 관심을 가지는 영역과 독일이 관심을 가지는 영역이 다름을 보여주는 삽화가 있었습니다. 프랑스가 가지는 이해권의 동쪽 끝은 폴란드까지였고, 독일이 가지는 이해권의 동쪽 끝은 우크라이나였었습니다. 유럽에 대한 막연한 인상 밖에 없던 당시에는 그 지도가 상당히 재미있었던지, 유독 오랫동안 기억에 남더군요. 지금은 뭐 당연한 것이 되었습니다. 독일은 지리적으로 중부 유럽의 나라니까요. 2008년에는 유에파컵이 폴란드-우크라이나 공동개최였고, 그 때만 해도 모든 것이 낙관적으로 보였는데, 지금 폴란드는 극우 정치판이 되었고, 우크라이나는 한 술 더 떠서 전쟁으로 나라가 엉망이 되었습니다. 이 책에 설명된 프로이센의 역사를 보니, 독일이 가지는 저 동쪽으로의 뿌리깊은 관심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책에 따르면 슬라브족 문제의 해결은 프로이센이라는 나라 그 자체였으니까요.

책 앞부분의 고대-중세까지는 썩 잘 정리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간은 정치적 논쟁의 영역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뒷부분은, 글쎄요, 일본인이 쓴 한국사, 한국인이 쓴 일본사 같은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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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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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1 06:24:08

가장 마지막의 품평에 별 하나 더 드리고 싶네요

WR
2020-08-11 14:27:07

과찬이십니다.

1
2020-08-11 07:22:49

정성글에 추천 드려요. 낯선 독일의 역사였는데... 잘 읽었습니다. :)

WR
1
2020-08-11 14:30:15

저 역시 아직 낯섭니다. 그리고 저 책은 근대 이후부터는 역사책이라고 봐야 할 지 좀 애매할 정도로 (정치적)주장이 강해서, 기회가 되면 좀 더 본격적인 역사책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1
2020-08-11 10:01:33

감상에 깊이가 느껴지네요, 덕분에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WR
1
2020-08-11 14:33:11

뭔가 깊이가 느껴지신다면, 그건 책 내용 때문일 것입니다. 중간 부분까지는 저자의 주장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볼 만은 하다고 생각합니다.

1
2020-08-11 11:41:48

좋은 글 감사합니다. 책도 당연히 좋으리라 믿습니다만 그 해석의 식견에 감탄하고 갑니다. 지금의 유럽을 보면서, ‘유럽’에서 독일이란 과연 무엇일까 자주 생각하게 되는데, 여러모로 시야가 넓어졌습니다. 해외거주자라 바로 접할 수 없음이 안타깝네요..

WR
1
2020-08-11 14:38:35

저같은 일개 생활인의 감상이 무슨 식견 정도가 되겠습니까.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아직 국문 번역이 안 된 영어 책이기 때문에 해외에서도 쉽게 구해 읽으실 수 있습니다.

2020-08-12 02:32:30

킨들 버전이 있더군요. 샘플을 보내달라 해서 잠깐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이 책이 비슷한 제목으로 영국사도 있는걸로 보아서(저자는 다릅니다) 뭔가 출판사의 기획 출판물 같은 느낌은 있습니다. 통사인지 해석인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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