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VER HEALTH CHECK: OK
자동
ID/PW 찾기 회원가입

[추천]  (스포)[파워 오브 도그] 후기

 
5
  1790
Updated at 2022-01-24 10:46:11

 

연말연초에 가장 핫한 작품 중 하나인데 이제서야 봤네요. 개인적으로는 지금껏 봤던 퀴어영화 중 가장 공감이 많이 갔던 작품이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연기한 '필' 같은 사람이 실제로 제 주변에도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여전히 다소 경직된 한국 사회에서도 그러한 사람들이 꽤 있죠. 누구나 살면서 한번쯤은 만나보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필은 동생 '조지'보다 카리스마 있는 인물입니다. 그의 한마디에 모두가 귀를 기울이고 따릅니다. 그런데 누구보다 필을 잘 아는 동생 조지만큼은 형을 크게 신경쓰지 않아요. 그가 외강내유 타입인 것을 아는 거죠.


겉으로는 막말을 내뱉고 터프함을 뽐내지만 사실 필은 예술가적 기질을 가지고 있고 매사에 꼼꼼하며 동생은 전혀 신경쓰지도 않는 여러 디테일을 챙기는, 매우 섬세한 사람입니다. 아마도 '피터'처럼 어릴 때 놀림을 받았고 그로 인한 상처 때문에 겉에 다른 인격을 두른 걸로 보이네요. 그렇게 스스로를 잘 포장한 덕에(이 또한 본인의 타고난 섬세함 덕분이겠지만), 그는 남들이 보기엔 전혀 다른 인물입니다.


그는 피터가 만든 종이꽃에 유일하게 관심을 가진 사람인데, 피터(남자)가 그것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자 곧바로 조롱을 시작하며 종이꽃을 태웁니다. 자기 혐오를 동반한 방어 기제가 발동한 것. 퀴어 영화에 이런 타입의 캐릭터가 드문 건 아니지만 극의 배경과 연출, 각본, 그리고 배우의 열연이 한데 어우러지며 굉장한 시너지를 냈습니다.


필이 갑자기 피터에게 호의적으로 변한 이유는 동생 조지가 결혼하면서 빈자리를 느껴서일 수도 있고 피터에게 그의 치부를 들켜서일 수도 있습니다. 결정적으로는 그러는 와중에 자신의 무리들이 피터를 향해 'faggot'이라는 동성애자 비하 발언을 하자 본래의 인격이 순간 반응한 거라고 봅니다.


결말이 그런 식으로 끝나서 안타깝습니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그 가해자가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고, 결국 마지막 피해자가 새 가해자가 되어 돌아온 격이라 씁쓸하네요.


한편, 커스틴 던스트가 연기한 '로즈'도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끝내 일을 저질러버리는 피터보다도요. 흥미로운 건, 로즈의 알코올 중독은 비단 필만의 잘못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 예로 조지가 상류층을 초대한 저녁 식사 자리가 있죠.


조지는 로즈의 피아노 연주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좋은 피아노도 사주고 시부모와 주지사를 모신 식사 자리에서 로즈에게 연주하기를 권합니다. 그런데 정작 로즈는 본인이 잘 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조지가 피아노 연주를 권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듯한 발언을 여러 차례 해왔습니다. 남편의 말이기 때문에 마지 못해 승낙하기만 했지 뉘앙스를 보면 전혀 하고 싶어 하지 않아 했죠.


천성이 착한 조지는 그저 본인이 잘 대해준다고 생각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감을 못 잡습니다. 이를 볼 때, 그는 필과 로즈의 갈등에 대해서도 굉장히 둔감했을 거라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계속해서 둘의 갈등이 터지고 있는데도 이상하리만치 조지는 그에 대한 언급을 안 하죠.

 

필의 존재, 처음 만나는 시부모, 본인과 접점이 전혀 없는 상류층과의 대면, 그리고 너무나 무딘 남편... 부담을 안 느끼기가 오히려 힘들 것 같아요. 겉으로는 다들 젠틀하게 말하지만 사실상 거절할 수 없게끔 다들 피아노 옆으로 자리를 옮기는 장면은 정말 숨이 턱 막히더군요.


물론 로즈의 가장 큰 정적은 필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가 새집에서 기댈 곳이 없다는 단서를 꾸준히 던져줍니다. 때문에 제게는 남편의 무지함이 매우 크게 느껴졌네요. 로즈가 필과 단둘이 떠나는 피터를 붙잡으러 뛰어나올 때도, 또 홧김에 인디언에게 필의 가죽을 팔아넘기고 쓰러졌을 때도, 그저 착하기만 한 남편 조지는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지 못 합니다. 조지가 필에게 한 변명은 그저 '로즈가 아프다'였죠. 만약 피터가 결단을 내리지 않았다면 로즈는 분명 단명했을 거라고 봅니다.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 예상 작품들을 이제 거의 다 봤는데 현재까지는 [파워 오브 도그]가 가장 만족스러웠네요. 초반부 캐릭터 빌딩부터, 예상을 벗어나는 파국, 씁쓸한 여운을 남기는 엔딩까지... 완벽했습니다.


+ 미드 [파고]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이 작품에 익숙한 얼굴들이 많이 보여서 반가웠습니다. 주지사 역 배우는 시즌 1에, 커스틴 던스트와 제시 플레먼스 부부는 시즌 2에 나왔죠.

님의 서명
혐오는 광기다.
2
Comments
2
2022-01-24 10:19:04

작년에 본 영화 중 파워 오브 도그와 라스트 듀얼이 제일 좋았는데.. 그 중에서도 파워 오브 도그가 더 좋았습니다. 개취겠지요..

여튼 본문의 내용은 다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봤는데.. 저도 영화 보면서 의아했던 부분이기도 한 게.. 원래 로즈가 피아노 치는 걸 좋아해서 영화관에서 피아노를 쳤다고 나오거든요.. 당시 무성영화 시대니깐 배경음악처럼 피아노 치는 일을 했을 걸로 추정이 되는데요.. 여튼 피아노를 못 치는 건 아닌데 프레셔를 받으면서 못 치는데 그게 조지의 배려 없는 배려(?)와 필의 비아냥의 결합으로 봤거든요..

WR
1
Updated at 2022-01-24 10:27:47

제 추측이지만 로즈가 피아노 치는 일을 한지는 한참 되어 보였습니다. 남편이 죽은 이후에는 식당 운영하면서 빠듯하게 살고 있었죠. 재혼하고 나서 혼자 연습하는 건 즐겁게 했지만 그마저도 필 때문에 맘놓고 치지 못했고요. 이래저래 심적 부담이 컸던 것 같습니다.

저도 파워 오브 도그 정말 재밌게 봤네요. 여운이 오래 남는 영화.

 
글쓰기
SERVER HEALTH CHECK: 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