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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천안문 광장 학살'이라는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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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1-06-04 15: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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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광장 학살"은 없었다 (리처드 노스)

• 출처: CBS 뉴스 / 2009년 6월 4일
https://www.cbsnews.com/news/there-was-no-tiananmen-square-massacre/

지난 몇 년 동안 (천안문 10주년 무렵에는 확실히) 학자들 (그리고 많은 언론인들)은 그것을 주말 학살, 베이징에서의 학살, "베이징 학살", 또는 "천안문에서의 단속"이라고 기술했지 "천안문 광장 학살"이라고 기술하지 않았다.

"천안문 학살"은 지금까지도 통용되는 문구이지만,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주의 깊게 설명하는 경우 지금은 잘 사용되지 않고 있다.

이 배후에 있는 것은 목격자의 증언, 기밀 해제된 구미 정부의 보고서들, 그리고 동트기 직전 부대들이 일제사격으로 장내 방송 설비 대형스피커들을 침묵시키며 강제로 광장에 진입하기 시작했을 때 - 이때쯤에는 광장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 군과 일부 학생 저항파 사이의 단기 협상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역사학자들의 연구의 무게이다. 시위자들의 마지막 그룹은 그후 바로 광장을 나와 남쪽으로 갔다.

그 총격이 발생했을 때 나는 (광장의 경계들 중 하나를 형성하는) 인민대회당 남쪽 주랑 현관에서 중국군 부대에 의해 붙잡혀 있었다.

나는 총성을 들었지만 광장 안을 볼 수 없었다. 약 40분 후, (카메라 맨) 데릭 윌리엄스와 나는 두대의 군용 지프를 타고 광장을 거의 완전히 가로 질러 자금성으로 들어갔다.

막 동이 트고 있었다. 광장에는 수백 명의 병사들이 있었는데, 그 중 상당수는 길게 꼬불꼬불한 대열로 보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고, 일부는 쓰레기를 청소하고 있었다. 몇대의 전차와 병력 수송용 장갑차가 있었다. 그러나 시신, 부상자, 구급차, 의료 인력은 찾을 수 없었다. 즉, "학살"이 그 장소에서 최근 발생했음을 증명하는 것은 물론이고 시사하는 것조차 없었다.

그 후 댄 래더가 뉴욕 CBS 본부에서 진행한 방송에 휴대폰으로 소식을 전하면서 나는 "학살"이라는 낱말을 쓰지 않으려고 애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습격"과 "공격"을 언급했다.

나는 내가 본 것을 보고했다; 나는 시신을 단 한구도 못 보았다고 말했다. 인정하건대, [학살이 일어났다고] 방송 중인 동료에게 반박을 하려고 한 적은 없다; 나는 내 자신의 이야기를 고집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 모두가 "천안문 광장에서 학살"은 없었다는, 중국 정부가 약간의 궤변으로 늘 주장해온 것과 일치하는 것을 두고 불쾌해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날 밤 천안문 광장 주변과 그곳으로 가는 길에서 - 주로 베이징 서부에서 - 많은 사람들이 군대에 의해 살해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중국 정부가 그것 또한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은 일부 사람들에게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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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학살"? 말의 힘 대 침묵하는 증거 (웨이 링 추아)
https://www.amazon.com/Tiananmen-Massacre-Evidence-Disinformation-Humanity/dp/1494326590

책 소개
소위 천안문 광장 "학살"은 미국 정부와 구미 언론매체들이 1989년 이래 매년 중국 정부를 악마화하기 위해 사용해 온 가장 오도되어 온 사건들 중 하나이다. 구미 언론매체들에 의해 생산된 이미지들에는 경제 발전의 다양한 단계들에서 구미에서 일어났던 것들과 비슷한 시위에 직면한 중국 정부가 대단히 자제하고 조심했음을 알려주는 수많은 침묵하는 증거들이 있다. 그렇지만, 구미와 반공주의 세력은 훌륭한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의도로 공중의 분노를 부채질하기 위해 1989년의 그 상황을 이용했다. 그 반대를 시사하는 침묵하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구미 언론매체들이 학살에 관해 거짓말을 한 방식, 그리고 지구 곳곳에서의 정부들의 전복을 정당화하기 위해 한 사회의 경제적 사이클 내에서의 통상적 고통과 불만을 이용하는 구미 열강들의 도덕적 함축이 이 책이 탐구하기 위해 편제되어 있는 이슈들이다.

리뷰 일부
구미 언론인들의 고백이 '천안문 광장 "학살"? 말의 힘 대 침묵하는 증거'라는 제목의 이 새 책에 문서화되어 있다:

1998년, 워싱턴 포스트 언론인 제이 매튜스는 컬럼비아 저널리즘 리뷰에서 "천안문 광장에서 아무도 죽지 않았다"고 그리고 "그 오해에 기여하지 않은 단 한명의 언론인도 찾기 어렵다"고 고백했다. 2004년 크리스천 사이언스모니터는 휴먼 라이츠 워치가 그 이야기의 중국 측을 뒷받침하는 52쪽짜리 자체 보고서를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2009년, BBC 언론인 제임스 마일스가 "잘못된 인상을 전달했다"고 인정했다. CBS 언론인 리처드 로스도 2009년에 댄 래더가 진행한 방송에서 자신이 "학살"이라는 낱말 사용을 피하려고 노력했으며 "방송 중인 동료를 반박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여러분은 어떤 상황에서 이 언론인들이 갑자기 여러 해 동안 "오해"에 기여했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결심했는지 알고 있는가? 여러분은, 로이터 언론인 그레이엄 언쇼를 제외하고는, 그들이 그 후, 이야기를 "베이징 학살"로 바꾸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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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색 정보와 (언론) 매체들의 멍청함: 천안문 광장 학살 신화의 날조 (그레고리 클락)

● 출처: 재팬 타임스 / 2011년 7월 1일
https://www.japantimes.co.jp/opinion/2011/07/01/commentary/black-info-and-media-gullibility-creation-of-the-tiananmen-myth/


최근 나온 위키리크스 북경 미국 대사관 전문 발표는 1989년 6월 3일부터 4일 사이에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일어났다는 학살의 신화를 죽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애당초 그 신화는 어떻게 해서 존재하게 되었을까?

사실, 그 대사관 전문들은, 미국 정부의 후의에 의해, 구글의 천안문 사이트에서 오랫동안 이용 가능했다. 마찬가지로 로이터 특파원과 스페인 TV 특파원을 포함한 당시 광장에 있던 몇몇 공평한 서방 옵서버들은 학살의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고 오랫동안 주장하며 써왔다.

최근 학살 신자들은 ‘학살’이 광장에서는 일어나지 않았을지 몰라도 광장으로 통하는 거리와 골목에서는 분명히 일어났다고 우리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대사관 전문들은 아주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관련된 자세한 사항은 다음과 같다:

* 중국 정부는 시위가 종료됐을 때 남아있는 학생들을 광장으로부터 해산시키기 위해 비무장 군대를 파견했다. 그 군대가 시위하는 군중들에 의해 조소당하고 차단되자, 중국 정부는 서둘러 무장한 군대를 보내기로 결정했는데, 그 군대의 차량들도 차단되었다.

* 그 차량들은 또한 화염 폭탄을 맞아 승무원들이 내부에서 소사했다. (로이터는 육교 아래 매달려 있는 소사한 병사의 사진을 아직 공개하지 않고 있다.)

* 그 후, 주로 통제 불가능한 분대로부터의 임의적 사격이 발생했다. 다른 분대들은 때로는 명령을 받고 (사격을) 억제하려고 했다. 혼돈이 지배했고 광장으로 통하는 거리에 양측 사상자가 많았다.

* 학생들이 진입하려는 병사 한 명을 공격해 죽인 후 광장 입구 근처에서도 소동이 벌어졌다.

* 광장의 나머지 3,000명의 학생들은 6월 4일 이른 아침에 군사령관으로부터 요청을 받았을 때에 평화적으로 떠났다.

그렇다면 천안문 학살 이야기는 어디에서 왔을까?

당시의 한 어처구니없는 BBC 보도가 하나가 중요한 정보원이었다. 그 다음 다른 기자들은, 비록 BBC를 포함해 아무도 실제로는 광장에 없었더라도, 경종을 울려야 한다고 느꼈을지 모른다.

일어났던 것에 대한 최고의 폭로는 컬럼비아 대학교 저널리즘 대학원의 1998년 상세 보고서인 “천안문의 신화와 한 수동적 (간접수신) 언론의 대가”이다. 전 워싱턴 포스트 베이징 지국장 제이 매튜스 Jay Mathews 가 작성한 이 기사는 어떻게 구미 언론매체들의 떼거리 본능이 허위적 학살 이야기를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그 언론매체들로 하여금 그날 밤의 훨씬 더 중요한 이야기를, 즉 체제의 심장부인 베이징 거리에서의 반체제 민중봉기를 간과하게 하는 것으로 이어지기도 했는지를 지적한다. (보고서 요약은 www.alternativeinsight.com/Tiananmen.html 에 있다.)

매튜스는 문제의 대부분이 1989년 소요 직후에 학생 시위자였음을 자처하는 인물의 긴 이야기를 실은 한 홍콩 신문에서 기원했음을 확인한다. 그는 부대들이 수백 명의 학생들을 쓰러뜨리기 위해 기관총들로 무장하고 도착했을 때 광장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 기사는 전 세계에 배포되었고 원래의 BBC의 학살 기사와 다른 학살 기사들이 정확했다는 최종 증거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그 기사의 필자로 자처하는 인물은 특정되지 않았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기사는 거의 확실히 날조되었다 - 오랜 세월에 걸쳐 영국의 첩보 기관에 의해 조직된 많은 흑색 정보 작전들 중 하나였다.

영국의 흑색 정보 공작은 대다수가 인식하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만연해 있다. 그 공작들은 냉전 시대에 외무성 내에 국제 연구 부문이 설립되면서 시작되었다. 그 부문의 업무는 모호한 정보 출처를 이용해 유효한 회색 및 흑색 정보 프로파간다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 토픽에 대한 호주 연구자인 아담 헨리에 따르면, 흑색 프로파간다는 “거짓말들과 거짓 소문들의 전략적 배치”인 반면, 회색 프로파간다는 “편파적인, 그러나 허구적이지는 않은, 출처가 모호한 정보의 생산”이다.

헨리에 따르면, 그것은 전후 아시아에서의 정말로 끔찍한 학살, 즉 1965년 최대 50만명의 좌익 인도네시아인 학살을 정당화하거나 경시하도록 일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것의 포럼인 월드 피쳐스는 사이공 입장에서 본 베트남전을 지지하는 일견 불편부당한 기사들을 날조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영국의 작전은 아시아의 친-서방 체제들에 의한 실제 학살들을 은폐하려고 한 후 중국 체제에 의한 가짜 학살을 발명함으로써 이전보다 잘한 것 같다.

사실은 중국 정부는 혼란과 체제의 체면 상실에도 불구하고 시위 학생들에 의한 그 상징적인 중앙 광장 점령을 7주 동안 용인했다는 것이다. 일부 정부 지도자들은 타협안을 협상하려고까지 했는데, 학생 지도자들 중 일부는 나중에 그 타협안을 거부한 것을 후회했다.

최종적으로 군대가 광장의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파견되었을 때, 시위는 이미 종료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까지 구미 언론매체들은 그들이 얻어낼 수 있는 모든 이야기를 얻어내는 데 정력적으로 열심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1968년 멕시코와 1976년 태국에서 시위하는 학생들의 학살을 거의 눈치채지 못한 구미 언론매체들 (살해는 즉각적이고 잔인했으므로 타협을 협상을 시사하는 것은 전혀 없었다) 은 이번에는 행진해 들어가 수천까지는 아니더라도 수백 명의 시위 학생을 학살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잔인한 중국 체제라는 거짓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엉뚱한 길을 갔다.

이것은 그 체제가 때로 매우 둔감하고 심지어 잔인할 수도 있음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나쁜 예전의 문화대혁명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나 자신이 어느 정도 희생자였다. 아주 중요한 1971년 탁구 외교에 합류하기 위해 호주 탁구팀의 단독 방문을 조직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처음에는 추방 협박을 받았고 다음에는 중국 외교부로부터 그 방문을 다루는 중국어를 못하는 호주 언론인을 도우려 한 죄로 공식적 비난을 받았다.

나는 그때조차도 1989년 베이징 거리에서 비등하게 될 부글부글 끓고 있는 반체제 적의를 느낄 수 있었다. 외교소식통에 따르면, 이전 총리 주은래 총리가 사망한 후에 일어난 1976년의 반체제 시위들에서 시위 학생들의 진짜 학살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당시의 중국 – 체제의 과도함에 대한 상당수의 보도들이 탁구 우정에 대한 분출하는 보도들보다 더 나았을 때의 중국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중에 매체들이 천안문에 대해 선을 넘은 보도를 한 것에 대한 변명이 되지는 않는다.

체제가 1989년 학생 지도자들 몇몇에 대한 계속적인 단속으로 비판을 자초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필립 커닝햄의 책 <천안문의 달: 중국 학생봉기의 내부에서> - 아마존에서의 선전 문구가 아직도 이럭저럭 천안문 광장 학살에 관해 얘기하는 책 - 에 대한 이 신문의 한 4월 17일 리뷰가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 리뷰는 학생 지도자들 중 한 명인 차이 링의, “피바다”를 만드는 것이 체제를 뒤흔드는 유일한 방도일 것이라는 말을 인용한다. 광장을 떠나는 좌절된 학생들이 군대에 화염병 공격을 했다면 (그 전까지 시위 시민들은 화염병을 사용하지 않았다) 체제의 분노는 훨씬 더 이해될만한 것이 된다. 그러나 원래의 가짜 이야기의 책임자들 중 누구 하나라도 그런 세부 사항에 아랑곳 할지는 의심스럽다.

천안문은 구미 언론매체들의 보도 대다수에 있어서의 천박함과 편견 및 그 언론매체들을 관리하고자 하는 정부의 흑색정보 공작의 전형적인 예이다. 중국은 이 난센스의 희생물이 되기에는 너무나 중요하다.

--
그레고리 클락은 중국 전문 전직 호주 외교관이다. 이 기사의 일본어판이 www.gregoryclark.net 에 실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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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21-06-04 15:00:18

흥미로운 자료들이네요.

천안문 탱크 앞에 서있는 학생의 이미지가 워낙 커서 천안문 "학살"이라는 표현이 많이 먹혔나 봅니다. 저는 천안문 "사태"로 기억하는데 구미 몇 언론 및 정부들은 중국에게 "학살자" 이미지를 씌우려고 했었던 것 같군요. 

 

링크해 주신 Richard Roth의 말미 언급처럼 그날 천안문 광장에서 죽음이 일어 나지 않았더라도 해당 시위 사태 때 군에 의해 많은 사람이 죽었던 것은 사실인 듯 하니 그걸 "학살"로 부르냐 아니냐가 큰 의미가 있나 싶습니다. 천안문 사태 이후로 중국의 민주화 싹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거의 확실해 보이니까요. 홍콩에서도 그런 일이 진행 중인 것이고요 (천안문 때 보다는 피를 덜 흘리는 것 같긴 합니다만). 

WR
Updated at 2021-06-04 16:22:33

 링크해 주신 Richard Roth의 말미 언급처럼 그날 천안문 광장에서 죽음이 일어 나지 않았더라도 해당 시위 사태 때 군에 의해 많은 사람이 죽었던 것은 사실인 듯 하니 그걸 "학살"로 부르냐 아니냐가 큰 의미가 있나 싶습니다. 천안문 사태 이후로 중국의 민주화 싹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거의 확실해 보이니까요. 홍콩에서도 그런 일이 진행 중인 것이고요 (천안문 때 보다는 피를 덜 흘리는 것 같긴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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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학살은 페이크 뉴스입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한 교수가 행한 가장 최근 연구는 당시 베이징에서 1,000명 내외가 사망했다고 추정하는데 중국 당국은 800명 조금 넘는다고 발표한 적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천안문 광장에서는 시위대 사망자가 없었거나 거의 없었습니다. 구글 영문 검색하면 당시 미국 대사관이 본국에 보낸 전문 (천안문 광장에서 유혈 사태가 없었다)을 포함해서 그리 판단할 수 있는 많은 근거들이 나옵니다. 그럼 800명에서 1,000명 사이의 사망자는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천안문 광장 인근 거리에서 천안문 광장에 진입하려는 진압군을 막아선, 대다수는 대학생이 아닌 시위대 사이에서 나왔습니다. 이 내용 역시 당시 미국 대사관이 본국에 보낸 전문에 들어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진압군이 발포하게 된 계기는 시위대가 군경을 먼저 살상한 것이라는 내용도 들어 있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중국 발표에 따르면 30명 이상의 병사와 경찰이 시위대의 공격으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일부는 장갑차량이나 트럭에 갖힌 상태에서 화염병 공격을 받아 사망했고 두 명은 산채로 불태워져 죽임당해 육교와 버스 창가에 걸리기도 했습니다. 검색하면 살상당한 군인들의 소속과 이름까지 다 나오고 산채로 불태워져 죽임당해 내걸린 병사 한명과 경찰 한명 사진 나옵니다. 당시 진압군의 일원이었던 여성을 취재한 뉴요커지의 기사에 따르면 진압에 동원된 부대들 상당수가 정부의 발포 명령에 저항했다고 합니다. 제가 읽은 다른 글에서는 단 하나의 부대(unit)만이 발포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 얘기들 (처음에는 해산을 종용했을 뿐인 병사들과 경찰이 시위대로부터 먼저 공격을 받아 여러명이 사망했고 일부는 산채로 불태워져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당시 베이징에서 시위 진압군의 발포로 사망한 이들의 사망을 다짜고짜 학살로 부르는 것은 어느 정도 어폐가 있습니다. 최소한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의 학살과는 다소간 차이가 있습니다. 다만 폭동이 되어 버린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이들도 다수 사망한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당시의 시위를 추동한 것은 (구미식)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공산당 정부의 실정에 대한 염증과 노동자 계층의 생활고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다수가 공산당 통치 엘리트 자녀들인 대학생들은 일부 과격파를 제외하면 (구미식) 민주주의가 아니라 공산당 정부의 개혁을 요구한 것이고 사망자들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공산당 정부의 실정의 가장 직접적인 피해자인 노동자 계층은 그 염증으로 인한 분노가 순식간에 폭발해 시위대에서 폭도로 변신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더 진실에 부합한다면 그 기간 동안의 시위를 두고 '민주화의 씨앗' 운운하는 것은 그 사태에 대한 당시의 구미 주류 언론매체들의 해석을 그대로 받아쓰는 것입니다. 

 

홍콩에서의 시위는 분명 민주주의를 추구해서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시 '민주화의 씨앗' 운운할 만한 것이 전혀 아닙니다. 홍콩의 민주화는 중국 전체의 민주화와 연동될 수밖에 없고 그 연동에서 벗어나서 홍콩만의 독립적인 민주화를 추구하는 움직임은 조금도 현실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날들에 베이징에서 일어났는 안타까운 죽음들이 구미 주류 언론매체들이 보도해온 학살과는 다소간 차이가 있는 것처럼 홍콩에서의 시위 역시 그 시위를 설명하는 다른 시각을 찾아보면서 더 세밀하게 뜯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가장 분명한 것은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보다 시위대가,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시위를 한다는 주장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훨씬 더 폭력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국문 뉴스들 열댓개만 자세히 읽어보아도 알아챌 수 있습니다.     

 

       

2021-06-04 16:10:30

제가 대학교 입학하자마자 사회철학 수업을 들었는데 그 때 교수님이 광주항쟁을 두고 평했던 내용과 굉장히 흡사하네요. 좀 더 우아하게 포장하긴 했지만 결국 그 사람들이 합리주의에 기반한 민주주의가 뭔지는 알았겠냐? 그냥 사회에 쌓인 불만을 폭력적으로 표출했을 뿐이지. 뭐 이런 내용이었지요.

WR
Updated at 2021-06-04 16:19:19

당시의 중국이 광주민주화운동당시의 한국보다 훨씬 더 폐쇄적인 나라였다는 것을, 하루에 2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인구의 95%인 나라였다는 것을, 보통 사람들이 받는 교육이라는 것이 미미하기 짝이 없었던 나라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중국에 대해서는 그 '이런 내용'이 맞을 가능성이 높은 것 같습니다. 

Updated at 2021-06-04 16:01:49

한국에서는 천안문 학살이라는 말은 거의 쓰지 않고 보통 천안문 사태, 천안문 항쟁 정도로 표기하지요. 그래서 천안문 광장 학살이 신화라는 얘기가 뭔 얘긴가 싶었습니다.

 

영어 위키에 이미 나와 있는 내용이네요. 천안문 광장 자체에서 유혈사태가 있었다는 건 오보였다구요. 근데 전체로 보면 중국 당국 집계로만 300명이 사망했다고 하는데 300명은 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게 합리적이 아닌가 싶습니다. 전체로 보면 최소 300명 이상 사망했는데 "천안문 광장" 자체에서는 사망자가 없었다는 게 오보에 대해 비난을 퍼부을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2021-06-04 16:10:23
WR
Updated at 2021-06-04 16:21:21

국문과 영문으로 '천안문 학살'이라고 검색해보세요.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진지가 10년 가까운데도 수두룩하게 나옵니다.  백악관조차 여전히 그 표현을 쓸 뿐만 아니라 특히 미중대결이 이슈가 되는  유튜브 토론 게시판에서는 영문으로든 국문으로든 단골손님으로 나옵니다. 물론  천안문이 아닌 곳에서의 진압군의 발포로 인한 사망을 촉발한 것이  시위대가 먼저 군경을 살상한 사태였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열에 한 둘에 불과합니다.  

 

아, 그리고, 이미 글에서 밝혔듯이, 중국 당국은 사망자수가 800명대라고 발표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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