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천안문 광장 학살'이라는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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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광장 학살"은 없었다 (리처드 노스)
• 출처: CBS 뉴스 / 2009년 6월 4일
https://www.cbsnews.com/news/there-was-no-tiananmen-square-massacre/
지난 몇 년 동안 (천안문 10주년 무렵에는 확실히) 학자들 (그리고 많은 언론인들)은 그것을 주말 학살, 베이징에서의 학살, "베이징 학살", 또는 "천안문에서의 단속"이라고 기술했지 "천안문 광장 학살"이라고 기술하지 않았다.
"천안문 학살"은 지금까지도 통용되는 문구이지만,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주의 깊게 설명하는 경우 지금은 잘 사용되지 않고 있다.
이 배후에 있는 것은 목격자의 증언, 기밀 해제된 구미 정부의 보고서들, 그리고 동트기 직전 부대들이 일제사격으로 장내 방송 설비 대형스피커들을 침묵시키며 강제로 광장에 진입하기 시작했을 때 - 이때쯤에는 광장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 군과 일부 학생 저항파 사이의 단기 협상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역사학자들의 연구의 무게이다. 시위자들의 마지막 그룹은 그후 바로 광장을 나와 남쪽으로 갔다.
그 총격이 발생했을 때 나는 (광장의 경계들 중 하나를 형성하는) 인민대회당 남쪽 주랑 현관에서 중국군 부대에 의해 붙잡혀 있었다.
나는 총성을 들었지만 광장 안을 볼 수 없었다. 약 40분 후, (카메라 맨) 데릭 윌리엄스와 나는 두대의 군용 지프를 타고 광장을 거의 완전히 가로 질러 자금성으로 들어갔다.
막 동이 트고 있었다. 광장에는 수백 명의 병사들이 있었는데, 그 중 상당수는 길게 꼬불꼬불한 대열로 보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고, 일부는 쓰레기를 청소하고 있었다. 몇대의 전차와 병력 수송용 장갑차가 있었다. 그러나 시신, 부상자, 구급차, 의료 인력은 찾을 수 없었다. 즉, "학살"이 그 장소에서 최근 발생했음을 증명하는 것은 물론이고 시사하는 것조차 없었다.
그 후 댄 래더가 뉴욕 CBS 본부에서 진행한 방송에 휴대폰으로 소식을 전하면서 나는 "학살"이라는 낱말을 쓰지 않으려고 애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습격"과 "공격"을 언급했다.
나는 내가 본 것을 보고했다; 나는 시신을 단 한구도 못 보았다고 말했다. 인정하건대, [학살이 일어났다고] 방송 중인 동료에게 반박을 하려고 한 적은 없다; 나는 내 자신의 이야기를 고집했을 뿐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 모두가 "천안문 광장에서 학살"은 없었다는, 중국 정부가 약간의 궤변으로 늘 주장해온 것과 일치하는 것을 두고 불쾌해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날 밤 천안문 광장 주변과 그곳으로 가는 길에서 - 주로 베이징 서부에서 - 많은 사람들이 군대에 의해 살해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중국 정부가 그것 또한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은 일부 사람들에게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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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학살"? 말의 힘 대 침묵하는 증거 (웨이 링 추아)
https://www.amazon.com/Tiananmen-Massacre-Evidence-Disinformation-Humanity/dp/1494326590
책 소개
소위 천안문 광장 "학살"은 미국 정부와 구미 언론매체들이 1989년 이래 매년 중국 정부를 악마화하기 위해 사용해 온 가장 오도되어 온 사건들 중 하나이다. 구미 언론매체들에 의해 생산된 이미지들에는 경제 발전의 다양한 단계들에서 구미에서 일어났던 것들과 비슷한 시위에 직면한 중국 정부가 대단히 자제하고 조심했음을 알려주는 수많은 침묵하는 증거들이 있다. 그렇지만, 구미와 반공주의 세력은 훌륭한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의도로 공중의 분노를 부채질하기 위해 1989년의 그 상황을 이용했다. 그 반대를 시사하는 침묵하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구미 언론매체들이 학살에 관해 거짓말을 한 방식, 그리고 지구 곳곳에서의 정부들의 전복을 정당화하기 위해 한 사회의 경제적 사이클 내에서의 통상적 고통과 불만을 이용하는 구미 열강들의 도덕적 함축이 이 책이 탐구하기 위해 편제되어 있는 이슈들이다.
리뷰 일부
구미 언론인들의 고백이 '천안문 광장 "학살"? 말의 힘 대 침묵하는 증거'라는 제목의 이 새 책에 문서화되어 있다:
1998년, 워싱턴 포스트 언론인 제이 매튜스는 컬럼비아 저널리즘 리뷰에서 "천안문 광장에서 아무도 죽지 않았다"고 그리고 "그 오해에 기여하지 않은 단 한명의 언론인도 찾기 어렵다"고 고백했다. 2004년 크리스천 사이언스모니터는 휴먼 라이츠 워치가 그 이야기의 중국 측을 뒷받침하는 52쪽짜리 자체 보고서를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2009년, BBC 언론인 제임스 마일스가 "잘못된 인상을 전달했다"고 인정했다. CBS 언론인 리처드 로스도 2009년에 댄 래더가 진행한 방송에서 자신이 "학살"이라는 낱말 사용을 피하려고 노력했으며 "방송 중인 동료를 반박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여러분은 어떤 상황에서 이 언론인들이 갑자기 여러 해 동안 "오해"에 기여했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결심했는지 알고 있는가? 여러분은, 로이터 언론인 그레이엄 언쇼를 제외하고는, 그들이 그 후, 이야기를 "베이징 학살"로 바꾸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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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색 정보와 (언론) 매체들의 멍청함: 천안문 광장 학살 신화의 날조 (그레고리 클락)
● 출처: 재팬 타임스 / 2011년 7월 1일
https://www.japantimes.co.jp/opinion/2011/07/01/commentary/black-info-and-media-gullibility-creation-of-the-tiananmen-myth/
최근 나온 위키리크스 북경 미국 대사관 전문 발표는 1989년 6월 3일부터 4일 사이에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일어났다는 학살의 신화를 죽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애당초 그 신화는 어떻게 해서 존재하게 되었을까?
사실, 그 대사관 전문들은, 미국 정부의 후의에 의해, 구글의 천안문 사이트에서 오랫동안 이용 가능했다. 마찬가지로 로이터 특파원과 스페인 TV 특파원을 포함한 당시 광장에 있던 몇몇 공평한 서방 옵서버들은 학살의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고 오랫동안 주장하며 써왔다.
최근 학살 신자들은 ‘학살’이 광장에서는 일어나지 않았을지 몰라도 광장으로 통하는 거리와 골목에서는 분명히 일어났다고 우리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대사관 전문들은 아주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관련된 자세한 사항은 다음과 같다:
* 중국 정부는 시위가 종료됐을 때 남아있는 학생들을 광장으로부터 해산시키기 위해 비무장 군대를 파견했다. 그 군대가 시위하는 군중들에 의해 조소당하고 차단되자, 중국 정부는 서둘러 무장한 군대를 보내기로 결정했는데, 그 군대의 차량들도 차단되었다.
* 그 차량들은 또한 화염 폭탄을 맞아 승무원들이 내부에서 소사했다. (로이터는 육교 아래 매달려 있는 소사한 병사의 사진을 아직 공개하지 않고 있다.)
* 그 후, 주로 통제 불가능한 분대로부터의 임의적 사격이 발생했다. 다른 분대들은 때로는 명령을 받고 (사격을) 억제하려고 했다. 혼돈이 지배했고 광장으로 통하는 거리에 양측 사상자가 많았다.
* 학생들이 진입하려는 병사 한 명을 공격해 죽인 후 광장 입구 근처에서도 소동이 벌어졌다.
* 광장의 나머지 3,000명의 학생들은 6월 4일 이른 아침에 군사령관으로부터 요청을 받았을 때에 평화적으로 떠났다.
그렇다면 천안문 학살 이야기는 어디에서 왔을까?
당시의 한 어처구니없는 BBC 보도가 하나가 중요한 정보원이었다. 그 다음 다른 기자들은, 비록 BBC를 포함해 아무도 실제로는 광장에 없었더라도, 경종을 울려야 한다고 느꼈을지 모른다.
일어났던 것에 대한 최고의 폭로는 컬럼비아 대학교 저널리즘 대학원의 1998년 상세 보고서인 “천안문의 신화와 한 수동적 (간접수신) 언론의 대가”이다. 전 워싱턴 포스트 베이징 지국장 제이 매튜스 Jay Mathews 가 작성한 이 기사는 어떻게 구미 언론매체들의 떼거리 본능이 허위적 학살 이야기를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그 언론매체들로 하여금 그날 밤의 훨씬 더 중요한 이야기를, 즉 체제의 심장부인 베이징 거리에서의 반체제 민중봉기를 간과하게 하는 것으로 이어지기도 했는지를 지적한다. (보고서 요약은 www.alternativeinsight.com/Tiananmen.html 에 있다.)
매튜스는 문제의 대부분이 1989년 소요 직후에 학생 시위자였음을 자처하는 인물의 긴 이야기를 실은 한 홍콩 신문에서 기원했음을 확인한다. 그는 부대들이 수백 명의 학생들을 쓰러뜨리기 위해 기관총들로 무장하고 도착했을 때 광장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 기사는 전 세계에 배포되었고 원래의 BBC의 학살 기사와 다른 학살 기사들이 정확했다는 최종 증거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그 기사의 필자로 자처하는 인물은 특정되지 않았는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기사는 거의 확실히 날조되었다 - 오랜 세월에 걸쳐 영국의 첩보 기관에 의해 조직된 많은 흑색 정보 작전들 중 하나였다.
영국의 흑색 정보 공작은 대다수가 인식하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만연해 있다. 그 공작들은 냉전 시대에 외무성 내에 국제 연구 부문이 설립되면서 시작되었다. 그 부문의 업무는 모호한 정보 출처를 이용해 유효한 회색 및 흑색 정보 프로파간다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 토픽에 대한 호주 연구자인 아담 헨리에 따르면, 흑색 프로파간다는 “거짓말들과 거짓 소문들의 전략적 배치”인 반면, 회색 프로파간다는 “편파적인, 그러나 허구적이지는 않은, 출처가 모호한 정보의 생산”이다.
헨리에 따르면, 그것은 전후 아시아에서의 정말로 끔찍한 학살, 즉 1965년 최대 50만명의 좌익 인도네시아인 학살을 정당화하거나 경시하도록 일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것의 포럼인 월드 피쳐스는 사이공 입장에서 본 베트남전을 지지하는 일견 불편부당한 기사들을 날조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영국의 작전은 아시아의 친-서방 체제들에 의한 실제 학살들을 은폐하려고 한 후 중국 체제에 의한 가짜 학살을 발명함으로써 이전보다 잘한 것 같다.
사실은 중국 정부는 혼란과 체제의 체면 상실에도 불구하고 시위 학생들에 의한 그 상징적인 중앙 광장 점령을 7주 동안 용인했다는 것이다. 일부 정부 지도자들은 타협안을 협상하려고까지 했는데, 학생 지도자들 중 일부는 나중에 그 타협안을 거부한 것을 후회했다.
최종적으로 군대가 광장의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파견되었을 때, 시위는 이미 종료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까지 구미 언론매체들은 그들이 얻어낼 수 있는 모든 이야기를 얻어내는 데 정력적으로 열심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1968년 멕시코와 1976년 태국에서 시위하는 학생들의 학살을 거의 눈치채지 못한 구미 언론매체들 (살해는 즉각적이고 잔인했으므로 타협을 협상을 시사하는 것은 전혀 없었다) 은 이번에는 행진해 들어가 수천까지는 아니더라도 수백 명의 시위 학생을 학살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잔인한 중국 체제라는 거짓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엉뚱한 길을 갔다.
이것은 그 체제가 때로 매우 둔감하고 심지어 잔인할 수도 있음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나쁜 예전의 문화대혁명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나 자신이 어느 정도 희생자였다. 아주 중요한 1971년 탁구 외교에 합류하기 위해 호주 탁구팀의 단독 방문을 조직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처음에는 추방 협박을 받았고 다음에는 중국 외교부로부터 그 방문을 다루는 중국어를 못하는 호주 언론인을 도우려 한 죄로 공식적 비난을 받았다.
나는 그때조차도 1989년 베이징 거리에서 비등하게 될 부글부글 끓고 있는 반체제 적의를 느낄 수 있었다. 외교소식통에 따르면, 이전 총리 주은래 총리가 사망한 후에 일어난 1976년의 반체제 시위들에서 시위 학생들의 진짜 학살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당시의 중국 – 체제의 과도함에 대한 상당수의 보도들이 탁구 우정에 대한 분출하는 보도들보다 더 나았을 때의 중국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중에 매체들이 천안문에 대해 선을 넘은 보도를 한 것에 대한 변명이 되지는 않는다.
체제가 1989년 학생 지도자들 몇몇에 대한 계속적인 단속으로 비판을 자초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필립 커닝햄의 책 <천안문의 달: 중국 학생봉기의 내부에서> - 아마존에서의 선전 문구가 아직도 이럭저럭 천안문 광장 학살에 관해 얘기하는 책 - 에 대한 이 신문의 한 4월 17일 리뷰가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 리뷰는 학생 지도자들 중 한 명인 차이 링의, “피바다”를 만드는 것이 체제를 뒤흔드는 유일한 방도일 것이라는 말을 인용한다. 광장을 떠나는 좌절된 학생들이 군대에 화염병 공격을 했다면 (그 전까지 시위 시민들은 화염병을 사용하지 않았다) 체제의 분노는 훨씬 더 이해될만한 것이 된다. 그러나 원래의 가짜 이야기의 책임자들 중 누구 하나라도 그런 세부 사항에 아랑곳 할지는 의심스럽다.
천안문은 구미 언론매체들의 보도 대다수에 있어서의 천박함과 편견 및 그 언론매체들을 관리하고자 하는 정부의 흑색정보 공작의 전형적인 예이다. 중국은 이 난센스의 희생물이 되기에는 너무나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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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 클락은 중국 전문 전직 호주 외교관이다. 이 기사의 일본어판이 www.gregoryclark.net 에 실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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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자료들이네요.
천안문 탱크 앞에 서있는 학생의 이미지가 워낙 커서 천안문 "학살"이라는 표현이 많이 먹혔나 봅니다. 저는 천안문 "사태"로 기억하는데 구미 몇 언론 및 정부들은 중국에게 "학살자" 이미지를 씌우려고 했었던 것 같군요.
링크해 주신 Richard Roth의 말미 언급처럼 그날 천안문 광장에서 죽음이 일어 나지 않았더라도 해당 시위 사태 때 군에 의해 많은 사람이 죽었던 것은 사실인 듯 하니 그걸 "학살"로 부르냐 아니냐가 큰 의미가 있나 싶습니다. 천안문 사태 이후로 중국의 민주화 싹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거의 확실해 보이니까요. 홍콩에서도 그런 일이 진행 중인 것이고요 (천안문 때 보다는 피를 덜 흘리는 것 같긴 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