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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정치]  [기억] 1990년, 어느 중소기업에서 생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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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01-26 00:23:38

 

제가 처음 직장생활을 한 것이 1989년 12월부터입니다.
다른 사람의 대타로 어영부영 면접을 본 게 덜컥 합격되어서 가리봉동 수출3공단에 있는 K전자라는 컴퓨터 제조업체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 회사는 원래 실리콘 밸리에 본사가 있는 그 당시 세계 최대의 터미널(전산 단말기) 생산업체였던 T기업의 한국법인이었습니다. 
 
터미널이란 지금처럼 PC와 네트워크가 발달하기 전에 은행 등에서 전산실의 메인프레임에 연결되어 각 창구에서 사용하던 단말기라 보시면 됩니다. 그냥 받침대가 두툼한 모니터처럼 생겼지요.
 

 

회장은 미국국적의 한국사람으로 실리콘밸리의 신화를 이룬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회장이 한국에서 사업을 하려다보니 미국인의 눈으로 볼때 이 구로공단의 노조활동이 매우 극렬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사업을 못해먹겠다면서 결국 한국에서의 사업을 철수하고 회사를 팔아 넘겼습니다. 

 

이 회사를 인수한 곳은 대구에 기반을 둔 방적업체로서 소규모 계열사들을 거느린 K방적이라는 곳이었습니다. 회사이름도 K전자로 바뀌고, 터미널이 점점 사양길로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 부서만 남겨둔 채 주력을 PC(XT, AT 등) 생산으로 전환했습니다.

 

갓 대학을 졸업하고(사실은 졸업하기 전이었지만) 청운의 꿈을 품은채 입사를 한 저는 신입사원 교육때 뭔가 이상한 점을 보게 됩니다. 

교육장에 계약서 등을 들고 들어온 1년 윗기의 선배가 내놓은 서류에는 '노조에 가입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포함된 각서가 있더군요. 그래서 물어 봤습니다.

저 : "선배님, 노조 가입은 각자의 결정에 따라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선배 : "원래는 그런데, 우리 회사는 사무직 직원들은 노조가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 : "뭔가 좀 불합리 합니다. 이런 건 젊은 직원들이 건의해서 좀 바꿔야 하지 않나요?"
그 선배, 잠시 저를 쳐다보더니 고개를 약간 떨구며 말하더군요.
"우리도 그런 의기가 있었지만, 직장생활을 좀 하다보면 하고 싶어도 못하는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더 따져묻고 싶었지만 선배의 힘없는 모습이 좀 안스러워 그냥 아무 생각없이 계약서 등에 사인을 해 버렸습니다. 

그렇게 몇개월을 근무했는데, 사실 사무직, 특히 저처럼 연구소 직원들은 생산 부서와 교류할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뭔가 개발이 끝나서 생산으로 이관할때 생산관리 쪽 사람들에게 관련 서류나 넘겨주는 정도였지요.

 

그런데, 이 회사의 노조는 소위 말하는 어용 노조였습니다.
노조 위원장은 총무부 간부들과 무척 친하게 지냈고, 사내에는 이 위원장이 회사의 지원으로 차를 샀네, 집을 샀네 하는 소문들이 떠돌았습니다. 그런 소문을 증명이라도 하듯, 노조에 가입되어 있는 직원들이 뭔가 회사에 항의할 일이라도 있으면 노조에서 다 무마하고 심지어 폭력도 불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자식이 한 여직원을 로비에 있는 큰 재떨이로 때리려고 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생산직들은 여자들이 많았습니다.)

 

노조원들은 이런 집행부에 강한 불신을 갖게 됐고, 어느 여름날 노조 창립기념일에 있을 총회에서 투표를 통해 새로운 집행부를 선출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노조원들이 새 위원장으로 선출하려는 사람은 조립 라인의 한 여직원이었는데, 이 친구는 평소 얘기를 나눠보면 수줍음도 많고 앞에 나서는 스타일이 전혀 아니었습니다만, 회사에 대해서는 상당한 강성으로 찍혀있는 친구였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회사에서는 이 여직원을 노조원들에게서 분리할 궁리를 만들어 냅니다.

당시 회사는 가리봉동에 있었지만 영업부는 강남쪽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립라인에서 근무하던 이 여직원을 강남의 영업부로 발령을 내 버렸습니다. 노조원들과 아예 접촉을 막아 버리겠다는 꼼수였지요. 

당연히 이 여직원은 그 발령을 거부했고, 정해진 수순으로 회사는 이 여직원을 명령 불이행으로 몇 주 동안 정직을 시켜서 아예 출근을 못하게 했습니다. 

즉, 총회 행사일이 지나서야 출근할 수 있도록 일정을 맞춘 겁니다.
그 여직원은 매일 회사를 나왔지만 정문에서 출입을 제지당한 채 철문 밖에서 회사 안만 들여다 보더군요.

그것도 모자라 회사는 또 한가지 꼼수를 씁니다.
행사 며칠 전, 회사는 사무직 직원들에게 노조가입신청서를 돌렸습니다. 즉, 사무직 직원들이 노조 가입을 해서 총회에서의 투표에서 기존 노조 집행부의 유임에 표를 던지라는 것이었지요. 

처음 입사시 사무직 직원들의 노조가입 봉쇄에 불만을 갖고 있던 저는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이렇게 노조 가입을 시킬 것이었으면 왜 처음에 사무직은 노조가입 안된다고 했냐, 나는 이런 식으로 노조가입을 하기 싫고 처음 들었던 원칙을 지키겠다...
입장이 곤란해 진 팀장이나 사수가 저를 설득하기도 했지만 결국 저는 신청서를 쓰지 않고 돌려보냈습니다.

 

행사 당일, 그 날은 정말 어이없는 일들이 속출한 날이었습니다.

새 위원장으로 추대될 예정이었던 그 여직원은 그 날도 출입을 제지당한 채 철문을 붙들고 정문밖 보도 블럭에 앉아 있었고, 2층에서 근무하던 사무직 직원들은 과장 이상의 관리직급을 제외하고 모두 총회장으로 불려 나갔습니다.


노조 가입을 거부한 저는 혼자 사무실에 앉아 있었는데, 총무부 이사가 남은 놈 있나 체크하고 다니다가 혼자 사무실에 남아있는 저를 보고 저희 팀장에게 한 소리를 했나 봅니다. 팀장이 와서 저에게 좀 뭐라 하더군요. 제 태도가 하도 완강하니까 심하게는 못하고 차라리 밖에 외근이라도 나가지 그랬냐는 겁니다. 저도 차라리 그럴 걸 하고 후회 했습니다.

 

나중에 동기들에게 들었더니, 총회장에서는 가관도 아니었답니다. 

평소 어용 위원장의 똘마니들이 길다란 장대, 각목 등을 들고 다니며 누가 구 노조에 불리한 말이라도 할라치면 마구 욕을 하면서 직원들 머리 위로 그 장대 등을 휘두르더라는 겁니다. 

그 살벌한 분위기에 투표가 제대로 진행될 수도 없었고, 결국 투표는 구 노조의 유임으로 끝났습니다.


총회가 끝나자 직원들을 모두 회사 앞마당으로 나오라고 하더니 그때부터 밴드가 연주를 하고 술과 고기 등 질펀한 먹자판을 벌이더군요.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정말 속에서 천불이 올라오면서 오만정이 다 떨어졌습니다.

 

회사의 교활한 꼼수도 열받았지만, 자기들이 선출하려고 했던 그 여직원이 밖으로 내몰린 채 마치 동물원 원숭이처럼 철문의 창살을 붙잡고 안타깝게 자기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술과 유흥에 취해 그녀를 외면하고 흥청망창대는 이 직원들을 보자니, "이 병신들아, 너희들은 천년만년 회사에 착취당해도 할 말이 없는 족속들이다..."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신입사원 교육때 총무부 선배가 힘없이 했던 말이 떠오르더군요.

더 이상 이 회사에 남아 있다가는 저 자신이 진창에 빠져 더러워질 것 같다고 생각한 저는 사수에게 그만 두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수 선배가 일을 이상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원래 디자인을 하기 위해 들어간 제가 디자인 할 일거리는 없고 맨날 설계에 부품 개발이나 하고 있으니 불만이 쌓여 회사를 그만 두려고 하니, 제가 하던 일을 맡아서 할 직원을 하나 뽑고 저에게는 디자인 개발 업무를 주자고 팀장에게 얘기를 해서 며칠만에 후다닥 결재까지 마쳐 버렸더군요.

기가 막혀서 사수에게 얘기했습니다.

저 : "선배님, 제 말이 그게 아닌거 아시잖아요!"
사수 : "너 지금 그만두면 어디 갈데는 정해 놨냐?"
저 : "갈 데 없어도 전 그만 두겠습니다"
사수 : "고집 피우지 말고 이렇게 됐으니 새 직원에게 인수인계라도 하면서 몇달 동안 갈데나 만들어 봐."


이 선배는 진심으로 저를 걱정해서 하는 얘기였기 때문에 더 이상 우기지를 못하고 한 3개월을 인수인계 하면서 더 버텼습니다.

나중에 끝내 사표를 던지자 연구소 실장이 어느날 점심을 사겠다고 팀장과 같이 나가자더군요. 

이유를 짐작했지만 차라리 잘됐다 하고 따라 나갔습니다. 

밥을 먹고 저를 회유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저런 말로 설득하다가 

실장 : "너, 만약에 회사가 갑자기 너를 나가라고 하면 아무 말 없이 나갈거냐? 너도 회사에 어느 정도 말미는 줘야 하는거 아니냐?"

그 말을 듣자 총회 행사날 정문밖에서 회사를 들여다보고 있던 그 여직원이 떠오르더군요.

저 : "회사는 지금껏 그래 오지 않았습니까? 지난번 ***씨도 그렇게 쫓아내지 않았나요? 회사가 쫓아내면 저처럼 힘없는 일개 직원은 나가야지 별 수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저도 제 의지대로 회사를 그만 두려는 겁니다."


결국 실장이 화를 벌컥 내더군요. 좋게 얘기하는데 그런 식으로 성질 건드린다고...

 

벌써 18년이 된 얘기이지만 첫 직장에서 본 현실이 너무 뼈아파서 지금도 그 일이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물론 그때는 혈기방자한 총각때였으니 앞뒤 안가리고 회사를 때려치울수도 있었겠죠.
지금 그런 상황이라면 저도 그냥 그들과 똑같이 눈막고 귀막고 연명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종업원 340명짜리 일개 중소기업에서 제가 목격한 이런 모습은 그 규모만 다를 뿐 지금도 이 사회에서 여전히 목격하고 있습니다.

요아래 서비님이 올리신 보수신문 중견기자의 고백 글을 보고 답글을 달다보니 그 기억이 떠오르는군요.

 

 

 

 

 

 

님의 서명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서명 안만들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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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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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11 18:45:52

그저 질러야할 뿐입니다...

2008-06-12 11:19:20

레드옥토보님은 동감을 표시하는 리플을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2008-06-11 21:40:40

6월항쟁이후에 소위 민주노조가 대거 만들어지기 이전까진

그런 형편없는 회사나 어용노조가 사실은 대부분이었죠

그래도 그때에 비하면 노동자의 권리가 많이 보장된것은 사실이지만..

가이버님의 말씀대로

소규모사업장의 열악한 노동조건과 대규모사업장의 부패한 노조는

여전히 한국 노동운동의 질곡으로 남아있는것 같습니다.

현대자동차노조가 '일용직 식당아주머니' 를 팔아먹은 사건이 상징적인 사건이죠..

제목은 잘 기억안나는데..그 사건을 소재로 한 유명한 다큐영화도 있었죠..

2008-06-11 21:51:14

글 잘 보았습니다.
마치 제가 그 현장에 있는 것 처럼 생생하네요..
작은 사회나 큰사회나 .. 별 반 차이가 없네요.. -_-;; 이거, 초큼 무섭군요.. ㅎㄷㄷ;

2008-06-11 22:37:13

갑을... 이죠. 아직도 있나요? 그 컴퓨터 생산하는 기업은 없어진거 같은데..

예나 지금이나 변한게 별로 없는데 사람들은 변해가는 거 같습니다. 흐름이겠죠.

2008-06-11 22:41:55

슬픈 현실이죠. 추천하고 갑니다.

2008-06-11 23:54:32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추천....

2008-06-12 08:50:47

갑을이 컴터도 만들었군요.갑을이 섬유계통에선 그래도 규모가 있는 곳이 그 지경이었으면 다른 곳은 안 봐도 블루레이네요.이번 소고기파동을 겪으면서 우리 사회가 외형적으로는 많은 발전을 이루어냈지만 그 속을 들여다 보면 아직도 갈길이 먼것 같습니다.

2008-06-12 10:17:57

아직도 중소기업에는 노조 결성도 어렵고 노조를 결성해 파업이라도 할라치면 회사가 대화에는 응하지 않고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한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이런걸 보호해야할 노동부 장관이란 작자는 파업 요건은 더욱 엄격하게 하고 사측의 불법행위는 최대한 벌금형을 선고할거라고 하니 글과 같은 상황은 앞으로도 계속되겠죠...

2008-06-12 11:52:47

k전자면 혹시 갑X전자였나 하는 회사 아닌가요?

예전에 제 친구놈도 거기 다닌적 있던데 지금은 추억으로 이야기 하지만 그 당시는 참 힘들었겠죠...

친구놈은 생산파트쪽에 있었나 봅니다..

2008-06-13 09:06:00

2008년인 지금도 한국의 기업들은 아직도 이러고 있거나, 언제든지 이럴 준비가 되어 있다는 현실이 가슴 아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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