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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어산책" - 발칙한 출판사의 제목달기에 대한 잡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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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4 00:15:43

 미국국적의 논픽션 작가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영어산책' (도서출판 살림)을 뒤늦게 구해 읽어보았습니다. 블로그용으로 작성한 것이라 평어체로 쓰여진 점을 양해해주시기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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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e in America : An Informal History of the English Language in the United States> 

발칙한 영어 산책 - 엉뚱하고 발랄한 미국의 거의 모든 역사

빌 브라이슨 지음 정영옥 옮김  

 

'거의 모든 것의 역사'로 유명한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영어 산책'을 찾아보았다. 일단 책을 받아보면 두가지 측면에서 놀라게된다.  먼저 엄청난 두께. 무려 678페이지에 달하는 두툼한 분량이 일단 위압감을 느끼게 한다. 

그 다음으로는 내용이다. 마치 무슨 영어 교재같은 (번역서) 제목과 표지의 저자 그림에서 연상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내용이 펼쳐진다.

(미국식) 영어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메사추세츠주 플리머스에 도착한 이민자들 뿐 아니라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신대륙의 개척사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역사와 문화를 구석구석 돌아보는 '미국문화사 개론'이라고 분류해야 적합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디언'으로 잘못 이름이 붙여진 북미대륙의 원주민들이 있던 공간을 밀고 들어온 이민자들의 구성, 독립전쟁과 민주주의 정치체제에 대한 형성과정, 여러 나라에서 넘어온 '미국인'의 정체성 찾기, 미국의 경제발전과 이에 도움을 준 다양한 발명의 성패, 광대한 활동공간을 서쪽으로 확장하면서 붙여지게된 수많은 지명들의 유래 등등에 더하여 미국의 여행, 음식, 쇼핑문화, 예절, 광고, 영화, 스포츠, 항공, 우주 산업에 이르기 까지 상세하고도 재미있는 설명이 이어진다.


700페이지에 가까운 부담스러운 분량이라는 점을 쉽게 잊게 만드는 저자 특유의 재미있는 글솜씨에 유인되면서 현대 미국식 영어의 발전과정과 함께 미국문화 전반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미국과 관련한 공부나 업무를 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볼만한 교양서로 충분하다.


재미있는 부분은 맨 뒤에 붙어 있는 역자후기. 첫 문장이 "아 괴로운지고!" 이다.

"여기서 번역가의 비애를 논하는 것이 독자들에게 송구하지만, 이 책은 누구에게라도 하소연하고 싶은 괴로움을 느끼게 한 책이었다.....(후략)"


토착 원주민 인디언 부족이 썼다는 말에 더하여 미국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그 과정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던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 영국의 고어 같은 언어의 연원을 찾아가면서 사회 문화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많은 등장 인물과 함께 두툼한 한권의 분량 내내 설명하는 구성이다보니 (아슈케나지 유태인이 사용했다는 이디시어나 중국어 일본어 체코어 심지어 코리아게이트도 나온다) 번역자 입장에서는 엄청 힘든 작업이었을 것이다.


역자의 심정이 10000% 공감이 간다. 이 책을 처음부터 영어 원서로 볼 생각은 엄두도 안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몇 군데 구석구석 궁금한 포인트가 있긴 한데 이건 향후 원서를 한권 페이퍼백으로 사서 찾아볼 생각이다) 아마 움베르토 에코를 번역하는 이윤기 선생의 고민이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역자께서는 부디 많은 번역료를 받았거나 인세계약을 잘 하셨기를 기원한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국내 번역출판사에서 제목을 '발칙한 영어산책'으로 정한 것은 그야말로 misleading 하는 제목달기가 아닌가 싶다. 작가가 나름 인기를 끌다보니 빌 브라이슨의 작품을 "...의 발칙한 **"이라고 연관되는 시리즈인 것처럼 일관된 제목을 붙여 출간하는 모양인데, 처음 '발칙한'이라고 나온 책이 "발칙한 유럽산책"(2008)인데 원제목은 'Neither Here nor There"


저자의 다른 책들인 발칙한 영국산책 (Notes from a Small Island), 발칙한 미국 횡단기 (The Lost Continent), 발칙한 미국학 (Notes from a Big Country) 역시 그 원래 영어제목을 봐도 '발칙한'은 출판사가 임의로 붙인 표현이다.  애초 발칙하다라는 말이 "하는 짓이나 말이 매우 버릇없고 막되어 괘씸하다"라는 뜻임을 생각해본다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제목이라는 생각이다. (2021. 1. 23.)


영어판 표지가 훨씬 책의 내용을 잘 설명해주는 디자인이다 


사족>

역서에 붙여진 '발칙함'이라는 단어에 끌린 나머지 책 제목에 '발칙'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연원을 추적해보았다. 중앙도서관 장서목록을 찾아보니 아마도 1998년에 나온 연극대본 "발칙한 녀석들" (1천만원 현상공모 창작마을 희곡문학상 당선작)이 제목에 '발칙한'이라는 단어를 처음 쓴 작품으로 보인다. 이후 "발칙한 밀크" (2000), "그대 또...속았다 : 20가지 사랑 이야기로 만든 발칙한 시"(2001)에 이어 스콧 버거슨이 쓴 "발칙한 한국학"(2002), "세상을 뒤집는 발칙한 상상"(2003) 등등 책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후 '발칙한'은 큰 인기를 끌면서 발칙한 영문법, 지리이야기, 경제학, 세계사, 상상영단어, 고고학, 군사학, 건축학, 특목고(?), 요리사, 배낭여행, 중국어, 학원경영 등등 장르를 넘나들며 아무런 한계라도 없는 듯이 마구 조합되어 제목에 사용된다. 2000년대 초반을 계기로 좋은 뉘앙스를 가진 것처럼 변이되기라도 한 것처럼.. 재미있는 현상이다. 이 역시 또 하나의 Made in Korea 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발칙한제목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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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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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1-01-24 01:26:38

자기 전에 질문 글 하나 올리려고 들어왔다가, 좋아하는 이름이 눈에 띄어 끼어들었는데, 좋은 내용이 아니어서 죄송합니다. 

십년 전에 관련 게시물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 [오역/비추] 빌 브라이슨의 어떤 책  |  프라임차한잔 


제 생각으로는, 다른 브라이슨 작품의 번역과 비교해서 이 책의 번역은 참 많이 아쉬웠습니다.

2021-01-24 01:33:59

고생하셨네요. ㅎㅎ

WR
2021-01-24 13:27:37

뒷북님께서 좋은 지적을 해주셨네요.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제가 이책을 보고 좀 덜컹거리는 번역이 있네..라고 생각한 부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주셔서 공감하면서 봤습니다. 문제는 제가 이 책을 출간일에 비해 너무 늦게 읽었다는 것이 아닐까도 싶네요 

그래도 1994년에 처음 미국에서 나온 빌 브라이슨의 책이 2009년에야 번역서가 나왔고, 2010년에 뒷북님께서 써주신 서평을 2021년에 제가 다시 복기할수 있다니.. 일면 대단합니다. (2010년이 벌써 11년전이라는게 더 대단한지도) 

우리나라 출판계, 번역업계의 현실을 조금은 아는지라.. 그래도 번역서가 나온게 어디냐..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가 좀 함량미달의 번역물을 보면 한숨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지요. 

좋은 글과 지적 감사합니다.  말씀대로 이 책 자체는 미국의 문화사와 영어발달사에 대한 책으로는 참 대단한것 같습니다.   

2021-01-24 13:57:13

좋은 게시물에 첫 댓글이 엉망이라 제가 죄송합니다. _ _; 

WR
2021-01-24 22:56:17

무슨 말씀을요. 좋은 정보 많이 얻어갑니다. 

2021-01-25 02:34:41

두 분 게시글 모두 주제가 분명하고 상충되지 않는 읽을거리여서 잘 읽었습니다. 애초에 이 책을 읽으려고 시도했던게 뒷북님 글 읽고서였는데 세월이 참 빠르네요. 사문난적님 글에 자극받아 이번에 재시도 들어갑니다^^

2021-01-24 01:20:18

팔리는 제목이 중요하죠. 번역 제목에 원제도 한 몫한듯 싶어요. 이 책은 원어로 읽어야 할 책이라 생각하고 잡았다가 수년 후에나 다시 보자고 접어 두었었죠. 아무리 어려운 원서도 경향이라는 게 있어서 단어 세트에 대한 감이 잡히면 읽히는데 광역으로 넘나드는 주제와 그에 따른 단어가 등장하면 피로해지죠. 번역본은 아마도 영어 이중 표기와 주석이 많아서 두꺼워졌을 겁니다.

WR
2021-01-24 13:35:09

번역출판사가 잘 팔리는 제목을 달려고 노력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고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발칙한'은 좀 의외의 조합이라고 생각합니다. 어감 자체가 그리 좋아보이지도 않는데 제가 모르게 무슨 힙힙한 변용이 있었나 생각도 들고요. 페이퍼백 판이라도 한번 구해볼 생각은 저도 하고 있습니다. 페이퍼백도 480페이지이군요^^

 

Updated at 2021-01-24 01:37:59

잘 읽었습니다. 사족의 조사와 추측이 아주 인상깊네요. 브라이슨의 유머와 위트가 있는 필력과 깊이 있는 잡학은 그저 부러울 뿐입니다.

WR
2021-01-24 13:35:54

대단한 작가임은 틀림없습니다. 제가 너무 이 책을 늦게 찾아읽었네요^^

2021-01-24 14:35:53

제가 영어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 이 책이 무척 재미있어 보이는군요.

읽어보겠습니다.

WR
2021-01-24 22:57:19

미합중국의 전체적인 문화사를 조망할 수 있어서 좋더군요. 미국식 영어의 발전과정도 같이 찾아볼수 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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