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백패킹, 롤러와 시니피에
이번 주말에 시애틀에는 폭우가 고산지대에는 눈 소식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익스트림까지는 아니어도 감당할 체력과 동행할 아내와의 합의점이 맞닿는 데까지 매년 한계를 넘어서는 등산 취미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2박 3일간의 백패킹을 두번이나 해낸 것으로도 감격스럽습니다. 지난 원더랜드 트레일 맛보기도 좋았지만 미국 워싱턴주 올림픽 국립공원의 아름답기로 유명한 트레일인 하이 디바이드-세븐 레익스 루프를 돌고 왔다는 것이 지금도 믿겨지지 않습니다.
https://www.wta.org/go-hiking/hikes/seven-lakes-basin
체력이 좋은 사람들은 예약 같은 것에 개의치 않고 19마일을 하루에 돌고 오기도 합니다. 이 트레일의 백미인 런치 레이크(lunch lake) 캠핑을 예약하고 그 곳에서의 1박을 중심으로 일정을 잡는 것이 중요합니다만 이번에는 그런 행운까지 잡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천우신조로 비와 비 사이 청명한 기간에 다녀왔습니다. 첫날 도중에 만난 등산객이 Long wet day였다고 피곤한 얼굴로 말했는데 천국 같은 그 곳이 날씨 때문에 지옥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부부는 곰도 한 번 못봤다고 볼멘 소리를 하더군요. 연초에 누군가 엄청난 경쟁을 뚫고 맡았었을 예약을 취소한 자리를 잡았다는 것부터 로또 수준의 행운이긴 합니다. 예약 리바운드는 수 많은 데니스 로드맨들과 어깨를 비비며 점프를 대기해야 하는 느낌 같다고 해야 하나요? 우리 같은 등산 새내기 아니어도 전 세계 전문가들이 동경하는 그런 곳이기 때문입니다. 아, 아내가 하니 전 잘 모르겠습니다.
등산이 좋은 것은 독서와 비슷한 경험과 체득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과 나, 곰과 나, 허클베리(고도가 높은 곳일 수록 맛있습니다)와 나, 나와 너, 몸과 체력의 한계, 건강과 생활 등 기본적인 사유부터 한 발 한 발 오르면서 생각도 한 층씩 올라가는 경험과 이전의 관념이 경험을 통해서 벽이 무너지는 느낌, 그것들이 파격이 아니고 내 마음이 좁았었다는 자각 같은 것을 하게 되는 면에서 독서와 비슷하다는 생각에 따로 등산 글을 쓰지 않고 책 게시판 글에 사진 약간과 함께 병합하기로 했습니다. 사진 감상하시고 본문 읽으시겠습니다.
가뭄과 폭염에 대부분의 눈이 녹고 없습니다. 그나마 남은 눈도 녹아내리는 모습이 역력한 올림픽 마운틴 사우스 픽이 한눈에 보이는 능선길을 한참 걸었습니다. 하이 디바이드라는 곳입니다. 내년에 다시 가기로 했습니다.
두번째 밤을 지낸 하트레이크입니다. 모양이 하트같죠. 사진 속 호수의 왼쪽 평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텐트 치고 타프까지 얹었습니다. 앞에 보이는 것은 하트레이크 옆에 있는 조그만 호수입니다. 텐트 너머가 하트레이크입니다.
그라우즈(뇌조)입니다. 알고보니 텐트 친 곳이 대가족의 보금자리였습니다. 사람을 꺼리지 않더군요. 숫놈의 헤게모니가 강력합니다. 조직의 군기가 너무 엄해서 깃털을 뭉텅이로 쪼아대며 아랫 것들을 닥달하더군요.
아침에 텐트를 나와 물끄러미 호수를 바라보다가 쎄한 느낌에 고개를 들어보니 100미터 전방 쯤에 곰이 어슬렁거리더군요. 저 초원이 모두 허클베리/블루베리 밭입니다. 멀면 구경거리이고 가까우면 위협적인데 상관없는 듯하지만 어슬렁거리는 범위가 크고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습니다. 호수에 돌을 던져 풍덩 소리로 쫓기까지 한동안 쫄깃한 기분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흔한 게 호수인 곳입니다. 눈 녹은 물 고인 곳이라 물이 맑고 하늘을 품습니다. 곰도 많고요. ㅎㅎ
이 곳을 다녀온 뒤로 2-3번의 등산이 예정되었었는데 환절기 날씨 변동으로 인해 모두 취소했습니다. 어렵게 구한 캠핑예약이며 몇년째 그리던 곳들이었지만 아마도 지난 백패킹에 올해 등산 행운은 모두 써버렸나봅니다. 폭우는 주말을 점거할 예정이고 씻겨나간 여름을 뒤로 한 단풍유람 계획이나 세워야 할 참입니다. 매진의 아수라장에서 어렵게 구한 버너 연료가 2개나 남았는데요. 보통 여행을 다녀온 뒤와는 사뭇 다른 정신적 경험을 지난 2주간 했습니다. 몸은 단단해지고 마음 또한 비 갠 뒤 굳은 땅 같습니다.
백패킹 다녀 온 뒤로 선선해진 날씨와 착 가라앉은 마음 때문에 책을 끼고 지내게 됐습니다.
호프스태터의 사고의 본질에 푹 빠졌습니다. 저는 이책이 말하고자 하는 큰 줄기 보다 호프스태터의 문체가 좋습니다. 호프스태터의 문체와 책 내용이 일치합니다. 과학자가 쓴 책이 지루한 경우 그것은 문체 때문일 수 있습니다. 아직 읽지 않았지만 빌 브라이슨의 책 보다 사고의 본질이 영어(!)에 대한 이해를 심도있게 하는데 도움된다고 생각이 듭니다.(빌 브라이슨의 문체는 익히 압니다)
- 인지과학 측면의 기대감을 가지고 읽었다가 실망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의 묘미는 다른 데 있습니다. 호프스태터 같은 석학 수준이면 말장난을 이런 저술을 통해 할 수 있겠다는 느낌입니다.
반면에 한글로 번역한 책은 변질된 와인 같을 수 있습니다. 호프스태터는 설명하고자 하는 내용을 자신의 영어원문 문장을 써내려가면서 반영했다는 생각인데 번역문을 통해 뜻은 이해가 된다 해도 MQA와 MP3, 사진과 크로키 정도로 차이가 있지 않나 곱씹어봤습니다.
노먼 데이비스의 유럽사는 서문만 100페이지가 넘습니다. 서문을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게 만드는 매력이 있습니다. 끝까지 읽으면 서문을 다시 읽을 생각입니다. 유럽사 입문을 이 책으로 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입니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18251334
3권 중 두번째를 거진 읽어가고 있는 기행문에서 루마니아 산길을 걷던 영국인이 그 동네 사람을 조우한 가운데 새가 후드득 날아가는 장면을 한국인인 제가 읽었습니다.
Dumbraveanca라고 루마니아 사람은 말하고 영국인은 Roller라고 합니다. 메테를링크의 이야기처럼 날아갔다는 내용이 그 새에 대한 묘사의 전부입니다.
Dumbraveanca는 루마니아 단어입니다. 그에 대응하는 roller라는 단어는 그 새가 희귀한 새가 아니며 대응하는 한국어가 분명히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습니다. 메테를링크를 눈으로 보면서도 Roller와 파랑새를 직역하는 센스를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평소 찾는 핸드폰 영한사전에 roller에 대응하는 새 이름이 없었고 이런 아주 단순하고 간단한 호기심을 충족시키지 못한 사전 때문에 더욱 오기가 발동했습니다.
결국 알아내기는 했는데 상위 항목으로 올라가서 다시 더듬어 내려와야 가능했습니다. Coraciidae 는 파랑새과(rollers)의 학명이고 canary는 파랑새과에 속하는 카나리아를 말합니다. 산을 다니다 보면 가끔 봅니다. 이젠 이름모를 예쁜 새가 아니라 롤러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영어로 롤러라 부르는 이유는 이 새가 하늘을 나는 모습을 따서 붙인 이름이라고 합니다. 공중곡예를 하듯 맴을 도며 날아다닌다고 합니다. 책에 메테를링크의 이야기를 연상했다는 부분 또한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표현한 것입니다.
어처구니 없게도 시간이 흘렀습니다. 파랑새를 찾던 메테를링크의 아이들이나 새이름 찾아 책을 던져놓고 검색질하는 저나 뭐가 다르겠습니까마는 새가 이뻐 기록 남깁니다.
이미지 검색 링크입니다. 예쁩니다.
https://www.google.com/search?sxsrf=AOaemvK4iRbUQO0SJ-zv9aszw9USrjIVjQ:1631556493016&source=univ&tbm=isch&q=Dumbraveanca&sa=X&ved=2ahUKEwi0rsnJxfzyAhWHJDQIHY6HBSEQiR56BAgpEAI&biw=1504&bih=860&dpr=1.5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말이 나옵니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도 그런 경우입니다. 찾아보니 소쉬르가 만든 개념이네요. 살면서 몰라도 되지만 책 읽다가 알게 되는 이러한 개념은 짧은 단어로 치환된 정의를 통해 내 머리 용량의 확장을 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습니다. 같은 내용이 아래 링크의 블로그에 잘 씌여 있네요. 독서란 머리를 지식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고 복잡다난한 인생사를 짧은 부호로 치환 압축해서 뇌용량을 극대화하려는 시도가 아닐까요? 남는 용량이 많아야 버퍼를 만들어 임시파일을 만들고 직박구리 폴더를 만들 수도 있고 시스템을 빠르게 돌릴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가을입니다. 책 읽기 좋은 계절입니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 우리는 언어의 틀 안에서만 세상을 파악할 수 있다" https://littlefoxdiary.tistory.com/m/61?category=843870
검색에 따라 걸린 설명 동영상입니다
https://youtu.be/L74NDBMQW24
위 동영상이 포함된 채널이 괜찮네요. 좌표를 기록해 두고 구독을 눌렀습니다.
https://youtube.com/channel/UCpmAiWIGtd6dgOzKHnuHS4Q
- Krishnamur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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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패킹에 관한 정성스러운 글 감사 합니다~
백만년만에 로그인 했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