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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영문판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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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1-12-06 06:34:31

어찌어찌하다가 채식주의자를 영문판으로 읽었습니다. 이전까지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그의 최고 작품이라 생각했었습니다. 단 한권만 읽고 그런 판단을 한것은 정말 오만한 생각이었습니다. 다시 생각하면 제가 소설의 형태로 겪은 어떤 518보다 더 가슴에 와 닿았던 작품이기에 한강 작품 중 최고(일것이)라 생각했던 것은 소년이 온다에 대한 저평가이기도 하고 한강 작가의 작가적 역량에 대한 어떤 오해 - 나이, 성별, 경력 등 - 에서 비롯된 성급한 판단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채식주의자를 읽고 그 판단을 바꿨습니다. 그리고 다음 작품을 읽으면 또 바뀔 것 같다는 기대감이 생겼습니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불꽃 3편의 연작이 '채식주의자'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채식주의자 한편만을 본다면 전체 풍경(서사구조)에서 잘 오려낸 미니멀리즘 사진을 보는 듯합니다. 채식주의자만 읽었을 때 몽고반점까지 읽었을 때, 나무불꽃까지 마저 읽었을 때 마다 각각 다른 고도의 밴티지 포인트로 한강 작가의 의도를 보게 됐습니다. 3연작을 모두 읽고 하나씩 뜯어볼 때 비로소 각각 단편의 독립성이 더 뚜렷해집니다.

 

영혜의 이야기, 영혜 형부(인혜 남편)의 이야기, 인혜의 이야기로 볼 수 있는 채식주의자 3연작은 현재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유리현상을 여성입장(작가)에서 관찰하고 다양한 입장 차이(인혜, 영혜)와 관계 속에서의 한계(부모, 남편, 자식)를 보여주는 객관적 시각을 확보하려 했다는 점에서 한강 작가의 탁월함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 느꼈습니다. 

이는 82년생 김지영 같은 직설화법이 아님에도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꿈, 채식, 관계에서의 비롯된 폭력, 여성 소외, 극단적인 사회회피(거식) 등의 은유를 통해 현상과 갈등의 원인인 현재 여성이 봉착하고 있는 현실을 줄거리에서 배제하고 있음에도 인물들의 행로를 통해 질문과 해법을 동시에 던집니다.

 

무엇이 영혜로 하여금 사회 통념을 거부하게 만들었는가? - 작가는 꿈이라고 하지만 독자는 꿈 말고 다른 것을 현실에서 찾아야 합니다.

 

인혜는 영혜나 지우나 남편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영혜 같았을 것이라고 자각합니다. 그리고 영혜에게 꿈에서 깨라고 속삭입니다. 작가의 속삭임입니다. 외치기 보다는 조심스레 완곡하게 한강 작가는 접근했다고 생각합니다.

 

자매의 부모나 남편들 등 주변인물들은 보수적 사회통념, 모순 등의 의인화라고 봤습니다. 

 

나무불꽃의 결말은 암울하지만 열린 결말입니다. 갈등이 최고조일 때 우리는 전환을 맞을 수 있기도 합니다. 혹은 영혜와 인혜의 수용의 입장 차이가 그냥 한국 여성의 현재 위치를 대변하고 있기도 합니다. 

 

소년이 온다 작품 전체가 작가가 사자들을 위한 진혼가를 부르는 느낌이라면 채식주의자를 쓰면서 한강 작가는 악몽에서 깬 아이를 위해 다독이며 자장가 부르듯 참담한 현실을 우화로 바꿔서 들려주는 듯합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잠을 깨라고 속삭이죠. 

 

4.3사건을 주제로 한 작품도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그 작품에서는 어떻게 상처를 드러내고 드레싱하고 밴드를 붙여주는지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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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21-12-06 07:22:07

전 몽고반점을 단편선 모음집을 통해 읽었는데 지금은 내용도 기억이 나질 않지만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참 잘 쓴 단편이구나 싶었죠. 그 뒤에 작가가 상을 받았다던 채식주의자를 읽었는데 전 오히려 단편 몽고반점으로 남았더라면 하고 아쉬위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마 잘 짜여진 단편을 좋아하는 제 성향 때문인지도 모르겠네요.^^;; 늘 정성스럽게 남겨주시는 글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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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1-12-06 07:50:51

몽고반점 하나로도 구성이 훌륭했죠. 다만 기레기들 헤드라인(소주제) 뽑듯 3연작의 내러티브(대주제)를 통한 메세지는 몽고반점 바깥에 있으므로 그럴 듯한 크롭(cropped)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2021-12-06 08:23:13

개인적으로는 영혜와 인혜의 상황을 대비되게 구성한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모든 걸 벗어버리는 영혜와 브래지어, 아이들의 배냇저고리 같은 보라색 면티셔츠를 벗어버리지 못 하는 인혜의 구도가 계속 눈에 밟히더군요.

WR
2021-12-06 08:35:00

몽고반점을 빼고도 이야기는 성립합니다. 전체 서사 중 여백 처리한 일부를 몽고반점으로 넣었죠.
굿리즈 리뷰 중에서도 작가는 천재라는 평이 있을 정도입니다. 좋은 영역에 힘입었다기 보다는 작품이 워낙 훌륭했죠. 작가의 대승적 고민이 절절하면서도 절제되어 표현한 곳 들 중의 하나가 말씀하신 부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2021-12-06 11:04:39

이 책 좋죠. 저도 너무 좋아하는 책이라 여러번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저는 채식주의자가 제일 인상적이었어요.

(동명의 영화도 있어서 찾아봤던 기억나네요. 채민서 씨와 태인호 씨가 나오는 걸로 기억해요)

말씀하신 4.3사건 책은 소년이 온다처럼 너무 힘들 것 같아서 사기만 하고 읽지는 못하고 있어요.

그래도 곧 읽어야겠지요. 

WR
Updated at 2021-12-06 11:14:31

실상황을 글로 재현하면 그대로 옮기기 어려운 게 보통이죠. 반대로 문학작품을 영화로 옮겨도 함량 미달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상반된 것이 아니라 똑같이 '바이탈'한 요소가 매체를 옮기면서 누락되기(의도치않게, 불가항력으로)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한강 작가는 대화보다 지문에 정보를 흘리는 경우가 많은 것을 채식주의자에서 읽었기 때문에 짐작컨대 영화는 안타깝지만 아마도 굉장히 사건 중심이었을 것 같습니다. 82년생 김지영은 어차피 직설이니 거기서 거기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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