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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PE]  해피 투게더 (春光乍洩) OST - Danny Ch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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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2-06-08 18:49:17

 

왕가위 감독의 <해피 투게더> 는 본편 영화가 97년에 동성애 소재와 동성 섹스 장면을 문제 삼은 한국 공윤위 측의 개봉금지 판정으로 OST 앨범만 덩그러니 발매된 험난한 운명을 겪었다. 다음 해에 왕가위 감독이 직접 일부 대목들을 편집해서 한국 개봉을 성사시키긴 했지만, 그전까지 작품을 보려면 B짜 테이프, 레이저디스크를 구하거나 전체 줄거리를 상세히 설명한 글을 읽고 이 앨범을 들으며 상상하는 방법만 있었다. <쇼킹 아시아>를 비롯한 소위 졸작 쇼큐멘터리들은 별다른 문제 없이 극장 개봉하거나 비디오 출시가 가능했으면서 <해피 투게더> 는 상영금지되는 괴이한 시대였다. 마침내 상영될 때도 신문 리뷰에서 기자 시절 이동진이 '아휘를 여성으로 바꾸어보면, 나무랄 데 없이 섬세한 사랑영화가 된다' 따위 문장을 쓰며 이해를 시켜려 했던 시대였으니 21세기에 15세 관람가 판정을 받은 것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해피 투게더> OST는 대만 록 레코드에서 발매되었다. 왕가위 연출작은 지금도 그렇게 즐겨 찾진 않지만 과거에는 더 안 찾아봤는데, 감독의 음악 선곡 실력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게 해준 작품이 이거였다. 이건 전에 내가 들었던 <중경삼림>, <타락천사>, <동사서독> OST가 거의 진훈기와 로엘 A. 가르시아의 스코어 위주로 수록되어 있었는데,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인 이유도 있다. 요컨대 <동사서독> OST의 그 유명한 'Prelude - A Lonely Heart' 같은 곡마저도 유진위 감독의 <서유기: 선리기연>의 후반 장면에 쓰였을 때 훨씬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훗날 요요마 선생이 첼로를 연주하고 음악을 좀 더 돈 들여서 보강했던 <동사서독: 리덕스>를 보고 나서야 좋은 음악이라 생각했으니까.

 

 

반면 <해피 투게더> OST는 참 좋았다. 위에서 언급한 세 작품과 달리 선곡으로 구성되어 있어 호감을 불러 일으킨 점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듣기 좋은 곡을 고른 것이 아니라 대체 어느 맥락에서 이 곡이 삽입됐을지를 궁금하게 만들었다.음악 선곡계의 또다른 고수인 쿠엔틴 타란티노조차 OST 듣다보면 한 번씩 뜬금없게 느껴질 때가 있었는데 왕가위는 그런 부분조차 없다. 프랭크 자파의 'Chunga's Revenge' 에서 'revenge' 라는 단어가 작품에서 어떻게 기능할지 궁금했을 때, 마침내 마주한 본편 영화에서 곡이 사용된 해당 시퀀스를 보고 좀 놀랐다. 왕가위 감독은 'Chunga's Revenge' 를 양조위와 장국영이 연인으로서 서로에게 가지는 애증을 대변하는 용도로서, 제목부터 음악까지 꼼꼼하게 이용하고 있었다. 또다른 곡인 'I Have Been In You' 의 질퍽함은 또 어떤가.

 

 

혹은 왕가위가 비행기에서 처음 듣고 경악하고는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아들을 직접 만나고 설득해서, 제작예산 상당부분을 투입하는 위험까지 감수하고 사용권리를 얻은 'Milonga For Three' 나 'Finale (Tango Apasionado)' 곡들까지 들으면 어떤 이야기를 지닌 작품인지 OST를 통해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원제인 '춘광사설' 이 지닌 '은밀한 부위를 갑자기 드러낸다' 는 의미처럼, 통조림과 곰인형으로 주접떨던 <중경삼림>과 다르게 <해피 투게더>는 연애의 절정과 굳이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이별의 후폭풍을 질척스럽고 적나라하게 드러낸 작품이었다. 결말이 그나마 상쾌했으니 망정이지.

 

 

 

이 OST는 CD로 구하고 싶었다. PC로 재생하면 <해피 투게더> 칸느 영화제 버전 예고편을 감상할 수 있었고, 포함된 엽서 세트가 갖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이 앨범을 처음 찾았을 때는 품절된지 오래였고, 동네 레코드점 구석에 있었던 카세트 테이프 발매본으로 만족한 경우였다. 시간이 지나 카세트 테이프 버전은 한국에서만 발매된 것을 알고 의도치 않게 귀한 것을 소장하게 됐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은 그냥 97년에 발매된 구판 OST 자체가 귀하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제작사인 택동영화사 창립 25주년 기념으로 발매한 리마스터반부터 작년 30주년 기념반에는 구판에 수록됐던 곡인 '3 Amigos' 의 첫번째와 두번째 테이크가 누락됐기 때문이다. 앨범 내부속지를 보면 왕가위 감독 당사자도 해당 곡을 연주한 밴드가 누구인지조차 기억 못했다고 언급했던 만큼 넣든 빼든 별로 중요하지 않은 트랙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불완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관객이나 청자들에게 끊임없이 '완전했을 경우' 의 여지를 남겨두면서 자기 작품을 미완의 걸작처럼 보이게 하는 왕가위의 수작에서 비롯된 누락일지도 모르겠다. 제작되지 않은 <아비정전> 2부를 연상시키는 작품들을 연이어 연출하며 지금도 관객들에게 '만약 2부가 만들어졌다면?' 식으로 환상을 안겨주고, 왕가위 당사자도 팬들의 마음을 인지하지만 속편 만들 의향 없으면서 일부러 그 환상을 깨지 않는 모습만 봐도 뭐.. 이번에 새롭게 작업한 자기 기존 연출작들 복원판도 필름 손상 이유 들면서 꼭 뭐 하나 빠진 채로 만들지를 않나. <해피 투게더> 복원판에서 누락된 장면들도 원본이 손상됐으면 어디 상영용 필름에서라도 가져다 삽입했어도 됐을텐데 말이다. 과거 홍콩 영화인들이 다 그렇긴 하지만 왕가위는 특히 악질같다. 그래서 그의 수작에 놀아나지 않기 위해 <해피 투게더> OST는 리마스터반 사지 않고 그냥 카세트 테이프로 만족 중이다.

 

 

 

 

p.s.

1) 카테고리에 카세트 테이프가 없어서 그냥 CD로 분류합니다. 딱히 카테고리 만들어 달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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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2022-04-18 18:25:03

요즘 레트로 유행시대에 테이프도 멋지네요

이 음반은 저도 피아졸라의 Tango Apasionado 때문에 마르고 닳도록 들었던 기억입니다

왕가위 감독은 즉흥적으로 자기영화에 선곡하는 타란티노 보단 한 수위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일대종사에선 좀 음악이 과잉이란 느낌을 지울순 없지만요

잘 보았습니다..^^

WR
2022-04-26 01:37:16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CD를 좋아했고 어릴 때 카세트 테이프는 거의 경멸하다시피 했는데, 테이프는 좋은 데크 사서 들으면 또 소리가 다르긴 다르더군요. 물론 지금은 여전히 작동되는 카세트 테이프들이 있고, 그래서 워크맨을 듣고 있습니다만.. 그냥저냥 듣고 다니는 걸 보면 저도 좀 변했나 봅니다.

 

확실히 <일대종사>는 말씀하신대로 우메야바시 시게루의 스코어까지 좀 과잉이긴 했었죠. 나름 액션이 부각된 것도 있지만, 중요한 대목에서 모리꼬네 옹의 음악을 선곡한 점도 크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다른 영화에서 모리꼬네 옹 음악을 선곡 삽입하려고 하면 좀 튀는 경우가 많지요. 그만큼 까다로운 음악이고 그의 음악을 자주 애용하는 타란티노가 비교적 잘 맞추는 편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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