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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PE]  그대 안의 블루 OST - 김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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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2-06-08 18:52:24

 

강수연 배우를 처음 인지했던 시기는 90년대 후반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이름을 들으면 박종원 감독의 <송어> 와 임상수 감독의 <처녀들의 저녁식사>, SBS TV 드라마인 <여인천하> 가 먼저 떠오른다. 미성년자였으니 당연히 <처녀들의 저녁식사>는 개봉 당시 보지 못했고, 어렸을 때도 어떻게 12세 관람가 판정을 받았을까 고뇌하게 만들었던 <송어> 에서는 강수연 배우가 다른 연기자들 사이에서 튀어보였다. <여인천하> 에 이르러서야 여러 매체들이 강수연 이름을 외치는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건 작품의 장르가 '사극' 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게 강수연은 당시 듣자마자 웃음터지게 만들었던 일화의 주인공으로 더 친숙해졌다. 정말인지 루머인지는 모르겠다. 성인이 되고 초기에 TV 드라마에 잠시 출연하고는 20년 넘게 영화에만 집중했던 강수연에게 <여인천하> 출연을 부탁하려고 SBS PD와 고위 관계자들이 자택으로 찾아와 무릎을 꿇고 빌었는데, 그녀는 다리를 꼰 채 소파에 앉아 담배 한 대 피우면서 그들을 내려다 봤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방송국 고위층들의 막강한 권력과 초라하기 그지없는 스태프와 출연배우들의 열악한 여건을 몰랐을 때였다. 그리고 배우로서 강수연의 명성은 어렴풋이 들어본 정도였다. 방송 / 영화계가 발전됐으니 배우로서의 대접이나 개런티 등, 대우받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산업 종사자들의 질적인 면이 총체적으로 향상된다는 그녀의 신념 또한 몰랐다. 알고 있었더라면 루머 속 강수연의 행동도 신념과 연관지어 생각했을 것이다. 모르다 보니 어딘가 비현실적인 방식으로 권력관계를 확립하던 모습이 뭔가 '간지난다' 고만 생각했다. 저 업계에서는 스타가 소년만화나 마피아물 찍는 듯한 방식으로 캐스팅에 응할 수 있구나 싶었던 거지. 배우로서의 성과와 독보적인 스타성을 지녔기에 보여줄 수 있었던 협상 방식으로 느껴졌지만, 동시에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출 필요성 또한 느끼지 않은 듯 하다는 인상도 줬다. 그녀의 명성을 잘 모르는 세대가 보기엔 어쩐지 낡고 독선적인 이미지로 느껴졌달까. 비록 몇 편의 영화와 한 편의 드라마, 루머로 내린 판단이었지만 강수연이라는 배우를 생각했을 때 느꼈던 감정이 두 가지였다. 멋있으면서도 나 같은 세대에게는 고루한 느낌. 그 때는 그랬다.

 

 


훗날 보게 된 이현승 감독의 <그대 안의 블루> 속 강수연은 조금 달라보였다. 성녀나 열녀, 창녀 중 택일하지 않으면 여배우들이 맡을 역할이 없다시피 했던 80년대를 지나 여성으로서 좀 더 다양한 직업군과 자아를 지닌 역할이 선택 가능해진 90년대였기에 나올 수 있던 작품이었다. 당시 강수연은 다양해진 연기 선택지를 누리는 와중에도 여성들이 우러러 볼만한 이미지를 고수했었고 <그대 안의 블루> 도 일단은 그렇게 보인다. 개인적으로 주도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으며, 당시 직업적으로 부각된지 몇 년 되지 않은 디스플레이어를 연기한다는 점에서 그녀다운 느낌이었다. 그러나 원톱으로 돋보일만한 소재였음에도 남주인공인 안성기의 차도남 연기가 만만찮게 부각됐으며 강수연은 의외로 고민하는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었다. 그것도 여성으로서 자아실현과 이를 위해 포기해야 하는 현실 속 문제들에 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때로는 고통까지 호소하는 인물이었다. 강수연이 예술가적 면모와 프로의식이 충만한 직종을 연기한다는 점에서 분명 휘어잡는 스타일의 캐릭터를 기대했을 사람들이 있었으리라. 그들이 극장에서 최종 결과물을 보고 얼마나 실망했을지 대충 이해도 간다. 하지만 그 점이 <그대 안의 블루>가 보여주는 매력이자 강수연과 안성기라는 톱 스타들이 출연을 결정한 이유가 아닐까.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됐던 시대였지만, 진실이 누님이 임성민을 납치해다가 미저리 스타일로 고문 폭행하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같은 작품으로 해당 화두를 논하기에는 좀 무리였다. 당시 페미니스트들은 그런 스타일을 원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대 안의 블루> 에서 강수연과 안성기가 연기하는 캐릭터는 외적으로는 독보적이고 트렌디하지만 엄연히 현실에 존재하는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다. 톱스타 배우로서 두 사람의 자아는 작품 속 스타일리시하고 영화적인 프로덕션 디자인 (요컨대 두 사람의 사무실) 안에서 마음껏 연기하고 뛰노는 모습으로 충족된다. 그러나 나머지 지점에서는 작품이 요구하는 현실적인 디테일에 응하고 있다. 일과 가정생활을 함께 이끌고 갈 순 없는가. 여성이 자신의 꿈을 이루는 과정에 있어 남성은 방해물인가. 더불어 남성은 언제쯤 마초적 허세로부터 벗어나 자기 감정에 솔직할 수 있을까. 

 

 

<그대 안의 블루>는 이 소재들이 예나 지금이나 꾸준히 흥미를 자극하지만 대강 넘길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기에 직장, 혹은 페미니즘 판타지로만 소비하는 오류를 피한다. 그리고 두 주연배우 중 특히 강수연은 당대 관객들이 기대하던 스타 여배우로서의 존재감을 뽐내면서 고민하는 모습도 함께 보여주는 경지에 이른다. 당차게 직장에서 자신의 인장을 남기면서도 남성 중심적이었던 당대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처할 수 밖에 없는 위기나 불리한 상황, 고독 앞에서 힘들어하는 모습 같은. <그대 안의 블루>를 보는 동안 처음으로 하늘 위에 둥 뜨지 않고 현실에 발 딛은 사회인 강수연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작품은 시대적으로 봤을 때 빨리 온 듯한 느낌을 줬지만 결국 그 나름대로 당대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강수연에 대한 느낌도 바뀌었다. 아. 이런 연기도 잘 하는 배우였구나.

 


<그대 안의 블루> OST는 20대 초반의 김현철이 담당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작품을 연출한 이현승 감독은 세번째 장편 <시월애> 를 제외하면 모두 데뷔작의 동어반복이거나 되려 퇴보했다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김현철은 이현승 감독의 초기작 세 편에서 사운드트랙을 담당하며 모두 호의적 반응을 얻어낸 바 있다. 김현철이 듀엣으로 참여했지만 당시 이소라의 데뷔곡으로서도 유명한 '그대 안의 블루' 는 말이 필요 없는 명곡이며, 다양한 종류의 '블루' 를 제목으로 붙여 변주한 메인 테마 모음이 특히 인상적이다. 재즈 풍의 끈적한 '만남 Blue & Puple' 을 기반으로 피아노, 신디 사이저, 일렉 기타 같은 특정 악기 위주로 같은 곡을 연이어 재해석하지만 지루하거나 동어반복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서로를 향한 두 남녀의 심리가 다채롭게 변화하는 모습을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와중에 같은 곡을 변주했다는 점에서 두 주인공이 처음 만났을 때 서로에게 느꼈던 감정은 동일함을 알려준다. 본편을 감상하지 않고 들어도 남녀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니 음악적 스토리텔링으로서도 탁월한 셈이다.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본편에서 강수연이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결혼식장에서 도망나와 차도를 걸어오는 유명한 시퀀스에서 삽입된 장 뤽 폰티의 'Pastoral Harmony' 가 빠져 있다는 것. 남의 곡이긴 하지만 듣고 있으면 어딘가 김현철 스러워서 (아마 김현철이 영향 받았겠지.) 포함되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이 OST는 카세트 테이프로 소장 중이다. 몇 년 전에 CD로 구하고 싶었으나 도통 보이질 않아서 테이프에 만족하게 됐다. 리이슈 되면 좋을텐데 이미 디지털 음원으로 공개되기도 했으니 가망이 없어 보인다. 영화 본편 역시 지금까지 전면적인 복원은 커녕 기본적인 리마스터조차 되지 않았다. 예전 한국영화들이 대부분 그렇듯 자체적으로도 판권이 흩어져서 해결하기 힘들거나, 저작권 개념이 없어 당시 무단으로 사용한 해외 영화나 음악 문제를 해결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가 아닐까. 아직까지도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감상하기 힘들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판권 문제 해결하기 곤란한 시기가 80년대 후반 ~ 90년대 작품들인데, 하필 강수연이 연기로 표현한 가장 흥미로운 모습들이 이 시기에 포진되어 있어서 비극이라 할만하다. <그대 안의 블루>도 그렇다. 김현철과 이소라가 함께 부른 곡 제목, 혹은 앨범으로 기억되면서 그런 영화가 존재했었다는 사실도 잊혀지고 있다. 그래서 OST 앨범이 리마스터 되어 재출시될 때, 본편 영화도 깨끗하게 보고 싶다는 수요가 생기지 않겠냐는 바보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잊혀지지 않으면 좋겠다.

 

 

 


* 마지막 영상은 이천수와 사비 프리에토가 커버한 '그대 안의 블루'. 

과거에 룸메이트였던 이천수가 이 노래를 하도 불러대다가 아예 가르쳐준 덕에 곡을 외운 사비 프리에토.....가 15년동안 안 잊어버리고 있다가 노래를 완창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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