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오] 케이블 논쟁과 하늘을 날 수 있는 사람 이야기
어느 게시판에서 이런 주제로 논쟁이 벌어졌다고 가정해 보죠.
"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날 수 없다는 이야긴 비행기나 패러글라이딩 같은 기구를 이용하지 않고, 맨몸으로 날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이야깁니다.
사람들은 당연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이겠죠.
그런데 누군가 이런 반론을 제기합니다.
A : 날 수 있는 인간이 없다는 얘기는 전제부터 잘못됐어.
B : 전제가 잘못됐다니?
A : '날다'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공중에 떠서 어떤 위치에서 다른 위치로 움직이다]란 거야.
멀리뛰기 선수는 도움닫기 후 공중에 떠서 착지점까지 움직이지.
그럼 멀리뛰기 선수는 '날아간 것' 맞잖아?
B : 아니, 그건 도움닫기한 힘으로 관성을 이용해 몇 미터쯤 이동했을 뿐 그걸 날았다고 할 순 없지.
A : 그래도 공중에 떠서 다른 위치로 움직인 건 맞는데?
B : 그렇지만 인간이 날 수 없다는 이야기는 새처럼 자유롭게 하늘을 이동할 순 없다는 얘길 함축해서 말한 거라고.
A : 하늘? 어디서부터가 하늘인데? 내가 지면을 딛고 있는 발을 1cm만 들어도 그 위치에서 하늘이 시작되는 거야.
B :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진 알겠는데 그건 너무 억지잖아.
우린 지금 기구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이 새처럼 날 수 있는지 이야기하는 거야.
사람은 걷거나 뛸 순 있지만 날 수는 없는 게 맞다고.
A : 사람이 달릴 땐 양쪽 발 어느 쪽도 지면에 닿지 않는 순간이 있어.
그 순간은 말 그대로 공중에 떠서 이동하고 있는 거지.
이게 인간이 날고 있는 게 아니면 뭐겠어?
B : ....그러니까 넌 100미터 달리기할 때 사실은 뛰고 있는 게 아니라 날아가고 있다는 거야?
A : 바로 그거야. 인간은 날아다니는 생물인 거라고.
......토론이나 논쟁이 있을 때 A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 A의 말이 틀린 건 아니죠.
하지만 '날 수 있는 인간이 있는가'라는 주제의 논쟁에서 달리는 것을 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지 따지는 것은 본질과 동떨어진 이야기입니다.
평범한 상식과 문해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인간은 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고, 육상 100미터 달리기를 100미터 날기 대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케이블마다 음질 차이가 있느냐 라는 주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껏 저는 케이블에 따른 음질 차이가 없다고 주장해왔습니다.
그리고 '음질'이라는 단어는 음악을 듣는 인간의 감각과 직결된 단어죠.
따라서 평범한 상식과 문해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케이블마다 음질 차이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인간이 음악을 들을 때 케이블의 차이를 느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이해하는 데에 전혀 무리가 없습니다.
또한 오디오 평론가들은 케이블을 교체하면 하모닉스와 다이내믹 레인지에 변화가 생긴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정말 하모닉스에 변화가 생긴다면 그건 간단하게 측정 장비와 사운드 편집 프로그램으로 확인 가능하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하지만 측정 장비와 사운드 편집 프로그램으로도 하모닉스와 다이내믹 레인지의 변화는 확인되지 않죠.
그래서 전 기계가 측정할 수 없는 변화를 인간이 느끼고 구분할 수 있다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말해온 것입니다.
이것을 꼬투리잡아 케이블들 간에 어떠한 측정값의 차이도 없다는 것이냐고 태클을 거는 건 한참 번지수가 잘못된 겁니다.
당연히 케이블마다 임피던스가 다르고 제가 며칠 전 쓴 글에선 심지어 일부러 코일과 커패시터를 장착해서 주파수 응답특성을 왜곡시킨 1억 원짜리 케이블까지 있다는 걸 제가 먼저 소개해 드렸을 정도죠.
또한 제가 작년에 쓴 글에선 디지털 케이블에 음질 차이가 있다는 분들의 주장을 소개하면서 지터(Jitter)에 대해 설명했고 지터가 아날로그 파형에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 언급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제가 모든 케이블들의 측정값은 똑같다고 주장한 걸까요?
지터로 인한 케이블의 측정값 차이를 실험으로 보여준다고 하면 얼핏 대단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음악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의 파형과는 전혀 다른 구형파(사각파)에 지터 노이즈를 얹어서 -120dB ~ -130dB 영역에서 일어나는 차이를 보여주는 실험은 실제 인간이 구분해 들을 수 있는 영역에서 아득하게 벗어나 있습니다.
그 실험을 다루고 있는 시리즈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구체적인 반론을 쓰진 않았지만 일반 애호가분들이 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운 전문적인 내용이라 제가 이런 이야기를 드렸었죠.
"......주제넘게 한 가지 힌트를 드리자면 OOO님의 실험 결과에 첨부된 그래프에서 세로축(dB)을 주의깊게 보시길 바란다는 겁니다.
지터로 인한 변화(?)가 세로축의 어느 영역대에서 일어나는지, 그리고 제가 테스트를 제안한 -6dB의 하모닉스 감쇠가 어느 정도의 변화인지 두 가지를 연관해서 생각해 보시면 좋을 겁니다."
그리고 그 실험을 시리즈로 올리셨던 분께선 최근 본인의 글에 사람들이 관심이 없다면서 후속글을 올리지 않을 것처럼 말씀하시더군요.
원래는 그분의 시리즈가 끝나면 저도 관련 글을 쓰려고 했는데 이 글에서 조금만 해당 내용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데시벨이란 단위에 익숙하지 않으신 분들은 쉽게 와닿지 않으실 텐데, 100dB는 100억배(10^10) 차이입니다.
활주로에서 제트기가 이륙하는 소리를 바로 앞에서 들을 때의 음압이 120dB SPL 정도죠.
그리고 아주 조용한 방에서 손목에 찬 아날로그 손목 시계의 초침 소리가 겨우 들릴 때의 음압이 20dB SPL 정도고요.
그러니까 100dB 차이가 나는 소리를 구분해서 듣는다는 사람이 있으면 제트기가 눈앞에서 이륙하는 굉음을 듣는 와중에 자기 손목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지 멈췄는지 소리만 듣고 구분할 수 있다는 얘깁니다.
케이블마다 음질 차이가 있는지를 주제로 논쟁하고 있을 때 지터 테스트 실험을 반론?처럼 제시하는 게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인지 이해가 되시려나요?
이렇게 설명드려도 지터 테스트 실험을 근거로 케이블마다 다른 음질 차이를 사람이 구분해 들을 수 있다고 믿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제안한 청음회의 테스트 음원 샘플에서 기음과 5배수 하모닉스의 차이가 고작(?) 28dB에 불과했다는 것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기음과 고작 -28dB 차이가 나는 하모닉스 소리를 구분하는 테스트조차 '불가능한 것을 증명하라고 한다'고 비난하셨던 분들이 -100dB보다도 작은 영역에서 일어나는 지터의 차이를 듣고 케이블의 음질 차이를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건 정말 모순된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제가 '케이블 간에 차이는 없다'는 이야기를 할 때 매번 위의 내용들을 다 설명한 뒤 '케이블 간에 차이는 없다'고 쓰진 않았습니다.
그렇잖아도 글이 길어서 욕 먹고 있는 제가 매번 저 긴 내용을 반복해서 설명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그간 제가 써온 글들을 보신 분들이라면, 그리고 평범한 상식과 문해력을 가진 분이라면 제가 말한 '케이블 간에 차이는 없다'는 말이 어떤 함축적인 의미로 쓰는 것인지 충분히 이해하실 것이라 믿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략되고 함축된 의미를 꼬투리 잡고 논점을 흐리는 글로 저를 비난하는 분이 계신 것도 사실이죠.
지터 테스트가 학문적인 영역에서 무의미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케이블마다 다른 음질 차이를 사람이 구분해 들을 수 있느냐는 논쟁과는 상관이 없는 영역의 실험입니다.
그런 실험을 소개하며 '하늘을 날 수 있는 인간'의 예인양 논쟁의 본질을 흐리는 것은 이 논쟁에서 지양해야 할 일입니다.
사족1. 저 한 사람에 대한 비난과 비아냥은 참고 있었지만 최근 DP 회원들 모두를 싸잡아서 비아냥거리는 그분의 댓글을 보고 이제 공개적으로 태세를 전환합니다.
저는 케이블마다 음질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일반 애호가들의 경험을 존중하며 그런 경험을 조롱할 생각이 결코 없습니다.
하지만 업계 관계자나 경력자가 그런 자료를 제시하며 마치 케이블마다 음질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처럼 논점을 흐리는 것에 대해선 존중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 글들은 관련 지식이 많지 않은 평범한 애호가들을 현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족2. 또한 케이블마다 음질이 다르다는 걸 사람들이 구분해냈다는 논문도 소개되고 있는데 그분의 시리즈가 끝나면 제가 그 논문을 신뢰할 수 없는 이유를 따로 글로 써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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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술술 읽히도록 글을 잘 쓰시는 욜로님이네요
말씀하신 분은 제 댓글에도 서두에 말씀하신 내용으로 딴지를 거신 분인 것 같습니다만
시리즈 처음에는 관심이 가서 구독까지 했었는데 볼수록 뭔가 다른 의도가 느껴지는 것 같아서 구독취소 했습니다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