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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한잔]  이용수 할머니와 어느 미국 여성인권운동가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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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0-12-28 23:45:16

최근 윤미향 당선인과 이용수 할머니를 둘러싼 뉴스가 화제입니다. 이용수 할머니가 왜 저러시는지, 본인이 평생 쌓아올린 모든 것을 뒤집어 엎어버리는 행동을 하는지,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기도 합니다.

 

한국의 논란을 보고, 한 미국 여성인권운동가의 생애가 생각이 나서 두서없이 적어봅니다. 제 글이 다 그렇듯이 내용이 좀 길어서 10줄 요약합니다. 재미없으면 요약만 읽고 스킵하셔도 됩니다.

(05/23/2020 추가: 이 글의 사례와 이용수 할머니의 사례를 11로 비교하지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미국선 이런 일이 있었다 정도만 생각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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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50-60년대 미국에서 낙태는 불법이었음. 낙태 수술을 하면 의사 뿐만 아니라 수술받은 여성까지 살인죄로 처벌받았음.

 

2. 콘돔도 불법, 피임약도 불법, 결혼하지 않은 연인들이 피임기구 사용하는 것도 불법이었음. 당연히 피임하는 법을 모르니 원치않는 임신이 많았음.

 

3. 원치않는 임신을 한 여성들은 낙태수술을 받으러 외국으로 가거나, 그렇지 않으면 야매 의사에게 몰래 불법수술을 받거나, 낙태하려고 옷걸이 등으로 자해하려다 죽거나 다치는 경우가 많았음.

 

4. 노마 맥코비란 21세 여성이 합법적으로 낙태수술을 받아볼까 하고 변호사를 상담하다가, “낙태를 합법화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함. 신분을 숨기기 위해 제인 로라는 가명을 사용.

 

5. 3년간의 법정 투쟁 끝에 낙태는 합법이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옴. 이 판결을 계기로 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피임약 합법화, 성교육 활성화 등이 이어지면서 여성인권의 커다란 진보가 이뤄짐.

 

6. 제인 로는 21년간 낙태 옹호와 여성인권운동을 벌임. 같은 여성과 동성결혼까지 하면서 진보적 여성 인권의 상징이 됨.

 

7. 21년 후, 제인 로는 동성 파트너와 헤어진 후 갑자기 크리스찬이 되어 낙태 반대 운동을 벌임. TV생중계로 목사에게 세례를 받으며 갑자기 낙태는 살인을 외치며 보수 기독교의 스타가 됨.

 

8. 제인 로는 나는 변호사들의 장기말에 불과했다며 함께한 여성 변호사를 공개 비난함. 자기에게 내려진 판결을 뒤집어 달리고 법원에 소송까지 냈지만 기각됨.

 

9. 제인 로는 22년간 낙태 반대 운동을 벌이다가 2016년 병으로 사망함. 죽기 직전 낙태 반대 교회에게 돈을 받고 시키는 대로 말했을 뿐이라고 고백함.

 

10. 현재 역사는 제인 로를 영원한 여성인권운동의 상징으로 기억하지, 22년간 낙태반대 전도사로 기억하지 않음. 타임지는 올해 35일 제인 로를 위대한 여성 100중 하나로 선정. “역사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주인공으로 있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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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불과 50년 전 미국에서는 타인종간 결혼도 불법, 피임약도 불법, 콘돔도 불법, 결혼하지 않은 연인의 피임기구 사용도 불법이었습니다. 당연히 학교에 성교육도 없었습니다.

 

혈기왕성한 청소년들이 성교육도 못받고 피임기구도 사용하지 않으니, 당연히 원치않는 임신이 많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원치않는 아기가 생기면 남자는 도망가고 여자 혼자 모든 짐을 지는 경우가 많았죠. 이런 여성에게 두가지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1. 몰래 애를 낳고 몰래 입양보내고, 과거를 숨기고 평범하게 산다.

2. 불법 낙태를 한다.

 

교회에서 몰래 출산

1950-1960년대 미국에서 몰래 출산은 굉장히 흔했습니다. 당시 성교육 상담소 같은 게 없었으니, 혼전임신한 여성은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상담하곤 했죠. 가톨릭과 기독교 교회는 비밀 출산시설을 운영했습니다. 혼전임신한 여성은 몇 개월간 비밀 출산시설에서 머물다 출산하고, 아기 얼굴도 못본채 입양을 맡긴 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부모에게 돌아가 연애하고 결혼하고 평범한 삶을 사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1945년부터 1973년까지 400만명의 부모가 입양보냈고, 특히 1960년대에만 200만명의 부모가 아이를 입양보냈습니다. 미국에서는 이 시대를 아기 갖다버리기 시대’(baby scoop era)라고 부릅니다. 몇십년간 과거를 숨기고 살다가 갑자기 떠나보낸 아이가 보고 싶어서 유전자 검사로 입양보는 아이를 찾는 부모는 지금도 꽤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미국이 한국보고 고아 수출국이라고 부를 자격이 있냐고 생각했지만이건 다른 기회에 다뤄보죠.)

 

불법 낙태

1821년 코네티컷 주가 낙태를 범죄로 규정한 후, 미국에서 낙태는 불법이었습니다. 그냥 불법이 아니고 낙태 수술을 집도한 의사, 낙태 수술을 받은 여성 모두가 살인죄로 처벌받을 수 있었죠. 이런 상황에서 낙태를 결심한 여성에게는 두가지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스웨덴으로 낙태수술을 받기 위해 출국하는 셰리 체슨 부부의 모습

 

재정적으로 여유있는 여성은 푸에르토 리코나 멕시코, 유럽 등 낙태가 합법인 국가로 가서 수술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1961년 셰리 체슨(Sherri Chessen)은 미국판 ‘TV유치원같은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유명해진 연예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셰리는 임신중 인줄 모르고 약을 잘못먹어 팔다리가 없는 기형아를 낳게 될 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미국 병원에서 낙태 수술을 받으려 했지만 이 여성의 사례가 언론에 크게 보도되자 병원은 수술을 거절합니다. 결국 이 여성은 큰 돈을 들여 스웨덴까지 가서 낙태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불법 낙태 시대를 상징하는 '옷걸이'를 들고 시위를 벌이는 낙태찬성론자들의 모습.

 

하지만 외국에 갈 돈이 없는 가난한 여성들은 어떻게든 자력구제를 해야 했습니다. 임신을 꽁꽁 숨긴 여성들은 독한 약을 대량으로 먹고 낙태를 시도하거나, 구부린 옷걸이 따위를 자궁에 넣어 낙태하려다 크게 다치거나 심지어 죽기도 했죠. 또다른 방법은 돌팔이 의사에게 야매 수술을 받는 것이었는데, 이것 역시 큰 부상이나 죽음까지 각오해야 할 일이었죠.

 

로 대 웨이드 사건

196921세의 노마 맥코비(Norma McCorvey)라는 여성이 텍사스 주의 한 변호사 사무실을 찾았습니다. 그는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세번째 임신을 했고, 경제적으로 아이를 도저히 키울 길이 없다고 생각하고 낙태나 입양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두 여성 변호사는 낙태 합법화 소송을 준비하고 있었고, 노마 맥코비를 원고로 삼아 1970년 소송을 제기합니다. 그 유명한 로 대 웨이드 판례(Roe v. Wade)의 시작이었죠.

 

복잡한 법률적 쟁점은 일단 제쳐놓고, 3년의 법정 투쟁 끝에 1973년 연방 대법원은 마침내 미국내 여성은 정부의 과도한 간섭 없이 낙태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판결합니다.

 

이 판결의 파장은 엄청났습니다. 무엇보다도 1970년대 여성인권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낙태가 합법화되면서 여성 임신에 대해 좀더 공개적으로 토론하게 되었고, 성교육도 활성화됐습니다. 또 사전, 사후 피임약의 판매 및 사용방법 홍보가 활발해졌습니다. 1960년대 임신이나 낙태, 출산 중에 죽는 여성은 흔하게 있었지만, 오늘날 이같은 사례를 거의 볼수 없는 것도 이 판결의 영향이라 할 수 있겠죠

(이 판결의 파장과 현재 영향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넷플릭스에 제인 로 케이스 뒤집기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시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여성인권운동가 활동

노마 맥코비는 원래 여성운동 따위는 별로 관심없는 결손가정 출신 여성이었습니다. 본인도 이 판결의 엄청난 파장에 대해 나는 그냥 깨끗한 병원에서 낙태 수술을 받고 싶었을 뿐이라고 얼떨떨해 하기도 했죠. 실제로 판결 후 11년 동안 노마 맥코비는 제인 로라는 가명만 쓰며 숨어살았습니다.

 

대법원 앞에서 자신의 정체를 밝힌 '제인 로' 노마 맥코비가 자신의 변호사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하지만 대법원 판결 11년 후인 1984년 맥코비는 변호사들과 함께 내가 제인 로라고 정체를 밝힙니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여성인권운동에 나섭니다. 텍사스의 낙태 병원에서 일하면서, “제인 로 재단을 만들어 성교육과 낙태를 옹호하는 활동을 벌였습니다.

 

총이 합법화된 미국이니만큼, 맥코비 역시 엄청난 살해협박을 받았습니다. 보수파 남성들은 맥코비의 집에 총까지 쏘았고, 맥코비는 결국 자신의 집 문과 창문에 방탄판을 붙여야 할 정도였습니다.

 

맥코비는 또 1980년대 여성을 파트너로 삼아 동거하는 파격적 모습을 보입니다. 오늘날 동성결혼이라 불리는 행위를 40년 전부터 실시한 셈이었죠. 그는 10년간 미국 여성인권운동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보수 근본주의 기독교인으로 변신

그런데 1994년 맥코비는 동성 파트너와 헤어진 후 급격한 심경변화를 보입니다. 기독교에 귀의하고 TV생중계로 세례를 받은 후, 자신이 일하던 낙태 전문병원 일을 그만둡니다. 그러고는 나의 모든 행동을 반성하며, 낙태는 불법이고 살인이라고 외칩니다.

'로 대 웨이드' 판결문을 찢어버리고 불태우는 노마 맥코비와 기독교 근본주의자, 낙태 반대론자들의 모습.

 

예를 들어 맥코비는 본인이 일하던 낙태 병원 주차장에서 로 대 웨이드판결문을 갈갈이 찢은 후, 낙태 반대론자들의 박수를 받으며 불을 붙였습니다. 아이들을 꼭 끌어안으면서 너희들은 정말 아름답구나. 내가 못할 짓을 했다고 말했죠. 맥코비는 자신의 동성애 과거까지 부인하고, 동성애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을 불태우기고 했습니다.

 

재판 중 자기를 도와줬던 여성 변호사에 대해서는 나를 체스판의 말 정도로 생각했다며 격렬하게 비난합니다. 그를 변호한 여성변호사 두명 중 1명은 나중에 주하원의원까지 됐는데, 맥코비는 변호사가 정치적 욕심으로 자신을 이용했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맥코비는 1998년 연방 하원 청문회에 출석해 증언한 자리에서, 자신의 모든 과거를 부정하고 자기를 도와준 변호사들을 비난합니다.

 

 

연방 의회에 출석해 자신을 도와준 변호사들을 비난하는 '제인 로' 노마 맥코비.

 

여성 변호사들이 나보고 소장에 서명하라고 하면서, 내 사건이 20년 후에 낙태를 5, 6번씩 하는데 이용될 거라고 설명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임신으로 목숨이 위험한 여성을 구하는데 관심이 있었지, 재미로 낙태하는데 찬성한 적이 없어요.”

 

심지어 맥코비는 2004년 자신의 판례인 로 대 웨이드판결을 뒤집어 달라며 본인을 원고로 삼아 새로운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물론 대세는 거스를수 없었고 소송은 1심에서 기각됩니다. 맥코비는 22년 동안 낙태 반대 운동을 벌이고 자신의 변호사들을 비난하다가, 2017년 심장병으로 69세에 사망합니다.

 

나는 돈을 받고 시키는 대로 말했다

2020522일 미국 케이블채널 FX에서는 ‘AKA Jane Roe’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가 방송됐습니다. 이 방송이 미국 전역에서 화제가 된 이유는 맥코비가 죽기 직전의 충격적 인터뷰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인이 된 채 코에 산소호흡기를 낀 맥코비는 인터뷰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죽기 직전에 인터뷰하는 '제인 로' 노마 맥코비

 

이건 내가 죽기전에 남기는 고백입니다. 나는 돈을 받고, 그들은 나를 카메라 앞에 세워서 시키는 대로 말하게 했어요.”

그게 다 연기였다는 겁니까?”

내가 연기를 아주 잘했죠? 나는 훌륭한 배우였어요. , 물론 지금 말하는 건 연기가 아니에요.”

 낙태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니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만약 젊은 여성이 낙태를 하고 싶다면, 좋아요. 나랑 상관없는 일이에요. 그걸 선택이라고들 하더군요. 당신이 선택하면 됩니다.”

 맥코비에게 돈을 주었던 기독교 근본주의 목사는 다큐멘터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에게 돈을 주었던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비윤리적인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돈을 주고 인터뷰를 하면서 이렇게 생각하게 되더군요. 사실은 우리가 이 여자에게 조종당하는 것은 아닐까?”

 

타임지 위대한 여성 100

맥코비가 죽은 후 모든 언론은 부고기사에서 그를 제인 로라고 불렀습니다. 22년간의 낙태반대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아니라, 영원한 여성운동가로 기억했죠. 왜냐하면 로 대 웨이드는 앞으로 50년간 여성 인권운동의 미래를 결정했고, 맥코비 본인이 나중에 입장을 뒤집었어도 역사의 대세를 바꿀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타임지 202035일자는 ‘100년간 가장 위대한 여성 100중 하나로 제인 로를 선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로 대 웨이드는 수십년간 계속된 여성 인권 운동의 출발이며, 나중에 동성애 합법화의 법적 근거까지 마련한 사건이다.”

 

뉴욕타임스는 ‘AKA 제인로다큐멘터리에 대해, 맥코비의 전기 작가의 말을 빌어 다음과 같이 평합니다.

 

노마 맥코비는 낙태 찬성도, 생명 존중도 아니었고, 그냥 본인을 존중해주길 원할 뿐이었다. 그녀가 일생 동안 겪은 고통은 다른 누군가도 겪고 있는 것이었다. 맥코비는 평생을 연기자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가장 결정적인 역사의 한 순간에서, 그녀는 주인공이었다.세상일은 반드시 흑백으로 가를수 없는 것이다.”

 

맥코비의 죽기 직전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이용수 할머니를 생각해봅니다. 맥코비의 사례와 이용수 할머니의 사례를 11로 비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이용수 할머니가 마음이 변하셨거나 누군가에게 조종을 당했는지는 알수 없습니다. 어쩌면 이 모든 사태가 이용수 할머니가 정말로 원하고 자발적으로 바란 것일지도 모릅니다. 맥코비나 이용수 할머니나 모두 평범한 우리 주변의 사람이고, 주변의 압박과 영향에 초연한 초인일수는 없는 것처럼요.

 

하지만 친일언론들이 아무리 이용수 할머니의 말을 이용해 위안부 여성 운동을 비하하더라도, 그것이 결코 여성인권 발전이라는 커다란 역사적 물줄기를 바꿀수 없다고 봅니다. 노마 맥코비가 22년간 낙태반대 운동을 했어도, 본인이 일으킨 커다란 역사적 물줄기를 바꿀수 없었던 것처럼요.

 

저는 그보다 이용수 할머니가 30년 전 결정적 순간에 용감하게 나서서 역사적 증언을 했다는 단 한가지 사실만 기억하고 감사했으면 합니다.  노마 맥코비가 아무리 오락가락 갈팡질팡한 삶을 살았어도, 적어도 1969년 소장에 제인 로라고 이름을 올린 그 순간엔 역사의 주인공이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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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글을 딴지일보 게시판에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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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2020-05-23 14:03:04

대한민국 시민으로써 일본 에게 사죄 받고. 그동안 숨겨 왔던 전쟁의 만행을 전세계에 알리고 용서 할때 까지

지속적으로 피해 보상과 함께 독일보다 좀 더 진전성 있는 반성을 보여 주는 일본이 되었으면 합니다.

계속 국민들도 피해 할머님에게 관심 더 챙기고요.

17
2020-05-23 14:05:16

내용은 좋으나 이용수 할머니를 대입하면서는 너무 튑니다. 대상으로 윤미향을 넣으면 어떻습니까. 이용수 할머니는 회계에 의혹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던 일을 그대로 하고 있을 뿐인데, 윤미향은 온갖 의혹에 쌓여 있지 않습니까. 윤미향이 제때 사퇴하고 역사의 뒷장으로 사라지면 정대협 활동은 나름대로 인정 받을 수 있겠지요.

13
2020-05-23 14:23:58

글쓴이는 이용수 할머니도 적폐세력으로부터 돈을 받고 저런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는 듯... 

12
2020-05-23 14:07:00

등치하기 어려운 사례라고 봅니다.
이용수 할머니는 지금도 올바른 일을 하고 계십니다.

3
2020-05-23 14:20:16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모든 행동과 성품이 완벽하여 존경할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나서야할때 용기있게 나서는것도
쉬운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어쩌다보니 주인공이 되었다는것도 본인의 복이겠죠

3
2020-05-23 14:30:20

동감합니다.
이용수할머님에 대해서도, 저에게 남겨진 기억을 끝까지 지켜고 싶습니다.

17
Updated at 2020-05-23 14:33:44

이용수 할머니를 슬쩍 욕하는 글이네요.
정말 잔인하십니다.
윤미향 하나 살리겠다고
이용수 할머니가 변절한 거 아니냐는 식으로 글을 쓰시면 어떡합니까.
그것도 잘은 모르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식으로
빠져나갈 구멍 다 마련해 놓고요.
할머니께 그러시면 안 되는 겁니다.

9
2020-05-23 14:48:42

본문에 저도 동감합니다.
추천합니다.

7
2020-05-23 14:52:22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추천 올립니다.

4
2020-05-23 14:52:33

위안부 문제는 이미 개인의 영역에서 끝내고 자시고 할 게 아니죠. 나라 대 나라의 문제입니다.

개인 한 두명의 일탈이 있더라도 끝까지 가게 될 겁니다. 

1
2020-05-23 14:55:30

어릴적에 읽었던 소설 닥터스에서 여주인공 로라 카스텔라노가 임신한걸로 착각하고 불법낙태시술 받으러 가려고했던 장면이 기억나는데(시기는 1950년대말)이런 속사정이 있었군요.몰랐던 미국역사에 대해 알고갑니다.

Updated at 2022-05-10 10:55:11
6
2020-05-23 16:42:56

공부까지 되는 매우 좋은 글이군요.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

3
2020-05-23 17:02:19

진실과 지식과 감동을 주는 글!

2020-05-23 17:22:02

싼마이식으로 해석해보면 

이쪽이든 저쪽이든 결국 돈이군요...



9
2020-05-23 17:23:49

할머니는 완전무결한 성인의 반열에 들어간 사람일까요? 아니면 그래야만 하는걸까요?

나이들고 기억력 떨어지고 변덕도 생기고 생각이 바뀌고... 이게 나쁜걸까요?

오히려 인간적이지 않나요?

30년을 시민운동 해온 운동가는 흑화되어 나쁜 짓을 할 수 있어도 할머니는 그렇지 않을거라 믿어요?

할머니가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할머니도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걸 인정했으면 좋겠습니다.

착각을 할 수도 있고 오판을 할 수도 있고 욕심이 생길 수도 있고 서운해서 토라질수도 있습니다.

이게 나쁜거면 참 많은 부모님들도 다 나쁜 사람이 될텐데요.

평생 변치 않고 일관성 있는 삶을 사시는 분들 존경받아 마땅합니다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비난받아야 한다는건

절대 아닐겁니다.

6
2020-05-23 19:13:18

윤미향은 완전무결한 성인의 반열에 들어간 사람일까요? 아니면 그래야만 하는걸까요?

할머니와 윤미향 두 분 중 누구의 말을 믿을 것이냐의 문제죠.
사실 전 이용수 할머니는 잘 알고 전적으로 믿고 있지만
윤미향 씨는
모르겠습니다.
나쁜 소문도 너무 많고요.

4
2020-05-23 19:51:37

윤미향이 완전무결하게다고 이야기한 적도 없고, 둘 중 누구를 선택해서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3
Updated at 2020-05-23 20:45:43

폴길버트처럼 님이

할머니께서
나이들고 기억력 떨어지고 변덕도 생기고 생각이 바뀔 수도 있고
흑화되어 나쁜 짓을 할 수 있고
한 사람의 인간이고
착각을 할 수도 있고 오판을 할 수도 있고 욕심이 생길 수도 있고 서운해서 토라질수도 있고
변치 않고 일관성 있는 삶을 사시지 못하는 사람일 수 있다고
쓰셨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다분하고
그런 것 같다고 읽히는 글입니다.

4
Updated at 2020-05-23 22:10:53

이용수할머님이 원하시는 게 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왜 지금 저런 행동을 하시는지도 잘 모르겠구요.
근데 정말 존경할만한 분이시라면 보다 신중히 처신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적어도 일본극우와 토착왜구가 이 사태를 악용하는 일은 없도록 원하시는 바에 대해 정확한 워딩을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나중에 내 본뜻은 그게 아니었다라는 말씀 안하게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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