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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Krishnamurti - The First and Last Freedom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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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at 2022-01-09 02:25:05

체계없고 족보없는 상상의 향연에 초대합니다. 접니다.

 

크리슈나무르티의 자기로부터의 혁명 중 Relationship and Isolation의 내용의 가장 넓은 범위의 해석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피력했던 Peace를 말한 것입니다. 제가 읽은 영문판에는 Nationalism, Brotherhood라는 워딩이 정확히 있어서 Security나 conflict를 시오니즘과 이슬람문화의 갈등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한글판에도 그런 암시가 섞인 해석이 있는지는 확인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좁게 해석하면 부부나 친구관계도 됩니다만, 그런 관계를 원자적(!)인 요소까지 분해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스케일에 상관없이 적용하기 쉽습니다. rockid님이 댓글에서 말씀하신 비트겐슈타인과의 묘한 커플링 또한 그래서 가능합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명상을 통한 수행을 했고 따로이 공부를 안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문장은 단촐한 영어단어의 연결입니다. 한글판은 한자어의 연결로 오히려 심오해지고 되려 신비로워 보이지만 영문판은 비트겐슈타인의 명제들처럼 간결하고 명징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어려운 것을 단순하게 축약해 표현했고 그것을 일반화하기 위해 고통스러워 했던 것 같습니다.(공부 중입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단순하게 쉬운 언어로 스키마를 달리 적용해도 그 때마다 의견이 제대로 전달되는 희한한 화술을 씁니다. 그가 통찰해 꿰뚫는 대상이 크든 적든 읽는 사람이 해석하기 나름으로 열어놓았지만 차근차근 설명해 나갑니다.

 

이러한 비교로 볼때 장무기의 구양신공과 구음진경이 어차피 갈고 닦아 싸우는 기술인 것처럼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체계를 언어의 토대 위에서 세계를 설명하려 했고

(다만, 그는 그 자신이 인식하고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언어의 세계(나중에는 그림?)로 국한해서 정확성과 객관성이라는 시지프스의 형벌을 자초하고 한없이 바깥세상을 갈구하는 인간적인 고뇌에 빠지지 않았을까요?- 그의 평전 읽은 후에 다시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아는 사람 말하게 하려는 제 뻥섞인 대화술입니다. 속아주세요.)

마찬가지로 크리슈나무르티는 최대한 단순한 문장의 연결로 세계를 설명하려 했습니다. 단 크리슈나무르티는 경계를 쌓지 않았습니다. 신비주의라는 오해를 받더라도 그가 할 말을 다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이 갈망한 것은 아직 모르겠고 크리슈나무르티는 삶의 방법론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으로 읽힙니다.

 

신비주의라기 보다는 실용주의에 가까운 깨우침의 말들이 이 책에는 들어 있습니다. 신비주의는 미국에 건너와 타락한 라즈니쉬나 제가 대딩 때 읽다 때려 치웠던 마하리쉬 정도 되겠습니다. 그들이 진리를 떠들었는지 신비를 팔아 뱃살을 채웠는 지는 다시 곰곰히 읽어보고 그들이 잠시 소유했었던 권위를 재평가해보고 싶지만 제게는 지금 풀 권위의 비트겐슈타인과 크리슈나무르티가 있습니다.

 

서두에 족보없다 밝힌 이유는 책을 닥치는 대로 읽다 보면 채이는 게 롤랑바트뜨, 푸코, 비트겐슈타인...헤겔, 칸트는 말할 거도 없어요, 전공자가 아니니. 제게는 이들이 신비주의였습니다. 상대적 신비주의, 아마도 많은 분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돌리지 않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제게는 크리슈나무르티의 가르침들이 에크하르트 톨레나 데이빗 호킨스등을 읽다가 역주행해서 건져낸 과거로부터의 선물이기에 독서에 대한 자세를 다시 가다듬게 만들었습니다.

 

조문도 석사가의 라고 옛 성현의 말이 중학교 한문책에 있었습니다.

저는 깨닫고 싶지 않습니다. 깨달은 자의 책들을 찾아 읽다가 죽고 싶습니다.

명상의 관점에서는 읽고자 하는 욕심도 버려야 해탈한다지만 해탈의 욕심을 버린 자리와 읽고자 하는 욕심을 버린 자리가 같은 위치라면 저는 해탈을 버리겠습니다.

 

 

 

님의 서명
인생의 한 부분만이 아니라 전체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서를 해야 하고, 하늘을 바라보아야 하며, 노래하고 춤추고 시를 써야 하고, 고통 받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 Krishnamur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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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WR
1
Updated at 2020-12-11 08:08:59

 부연하면 메세지가 비슷한 지그문트 바우만은 홀로코스트의 발생과정을 처음부터 Isolation, ignorance, alienation ----> kill them all 로 설명하지 않고 원자적(! 이거 자꾸 써먹으니 내것 같음)으로 파고 들어 하나하나 설명합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Relationship 앞에 누구와 누구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책 전체가 다 이런 식이어서 읽는 사람이 자신의 문제를 대입해서 깨닫게 유도합니다. 다만, 한글 번역판에서는 한국어의 단어 자체가 그 범위가 한정된 경우가 많습니다.

씌여진 단어가 관계의 범위를 국한하게 만드는 강제성이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비교언어학 관련해서 무지하지만... 이걸 분명 느끼신 분 있으실 거라 믿습니다.

2020-12-11 12:56:07

바우만의 그 책은 꼭 읽어보고 싶습니다. 

1
Updated at 2020-12-11 11:59:21

h ttps://namu.wiki/w/지두 크리슈나무르티

링크가 잘려서 h에 여백을 포함했어요
 

크리슈나무르티 나무위키 요약도 한번 찾아봤습니다

WR
2020-12-11 08:02:41

디피에 한글주소 링크 잘라먹는 버그 있습니다. ㅎㅎ

2020-12-11 08:06:58

어떻게 할수가 없네요.

WR
2020-12-11 08:07:39

저는 전에 그 상위 링크를 따오고 거기서 찾으라고 설명했었어요.

1
2020-12-11 10:08:43

자기로부터의 혁명 2는 읽어보지 못했네요. 개인적으로는 이런 서적들이 후편(?)으로 가면 자기 복제를 하기 시작하는 듯 해서요^^;; 링크를 타고 자기로부터의 혁명 1에 대해 쓰신 글도 보았습니다. 저도 어린 시절에 읽었을텐데 내용은 전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만.. 관계에 대해서는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만약 아무 것도 없는데(no thing) 나만 홀로 있다(?)면 난 내가 존재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데카르트의 코기토 같은 과정일텐데요, 결국 모든 나의 타자(object)들은 나(subject)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닐까 싶더군요. 아인슈타인이 반대했던 명제를 전 그럴 수 있다(probable)고 보고 있죠, 내가 보지 않으면 '달'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 이게 석가모니가 말했던 천상천하유아독존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크리슈나무르티 책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후진 기억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覺者들이 남긴 말씀들은 各者 다들 다르긴 하지만 결국 다 '하나'로 비슷하기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언급하신 비트겐슈타인도 포함해서요. 그 하나가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이겠죠, 결국 그 손가락만 따라가다 나의 세계(you are 독존^^)가 끝이날지 아니면 (여러 선각자들이 말씀하셨던) '그것(!)'을 깨닫게 될지는 모르겠지만요ㅎㅎ 

 

남기신 마지막 단락에서 문득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어차피 인간으로 태어나 땅 위에서 살아야 하니 이거나 먹고 살아라?^^)'의 마지막 단락이 떠올라서 옮겨봅니다. 좋은 주말 되시길 바랍니다!^^

 

 내책을 던져버려라, 너자신의 책을 찾아라. 너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도 할수 있었을 것이라면 하지 말라. 너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도 말할수 있었을 것이라면 말하지 말고- 글로 쓸수 있었을 것이라면 글로 쓰지 말라.너 자신의 내면이외의 그 어느곳에도 있지 않은 것이라고 느껴진는 것에만 집착하고,그리고 초조하게 혹은 참을성을 가지고 너 자신을 아 ! 존재들 중에서도 결코 다른 것으로 대처할수 없는 존재로 창조하라.


WR
2020-12-11 10:18:43

소개글 (2)입니다. 죄송합니다.

2020-12-11 10:32:13

제가 잘못 봤습니다, 죄송합니다^^;; 책이 1, 2, 3으로 되어 있는 걸 얼핏 보고 2편인 줄로 착각했습니다..

WR
1
2020-12-11 10:37:48

지드에 빙의됐었나 봅니다. 책읽는 도중의 작은 법열을 계속 느끼는 것이 니르바나로 끝내는 것보다는 제게 매력적입니다. 그걸 알아주시니 고맙습니다.

2020-12-11 11:04:00

소견으로 니르바나는 결국 모든 苦가 소멸되는 죽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프로이트가 마지막으로 죽음 충동(death drive)을 말한 것도 같고요^^ 살아서 열반에 드는 것은 결국 죽음을 미리 경험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영화 캐릭터로 좋아하는(!) undead가 아니라 pre dead라 하면 좋겠죠. 정진하시다보면 그언젠가 눈을 감으실 때 깨달으실지도 모릅니다, 사는 중(人生)에 이걸 깨닫지 않아서 다행(?)이라고요ㅎㅎ 

WR
1
2020-12-11 11:06:09

미국에 와서 사니 미국병(?) 살짝 든게 여기 똑똑한 사람들 거진 자살했습니다.

그것도 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고려하지 않습니다만.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겠죠. 버지니아 울프, 토니 스코트 등

WR
2020-12-11 11:12:00

얼마 전에 들은 어느 부처의 제자 이야기가 죽을 때가 임했음을 알고 열반에 이르는 수행을 시작했다 하더군요. 그것 참. 그전에 열반할 수도 있는데 미적미적 했다 하더이다.

2020-12-11 11:17:17

대중들을 위해 희화화된 종교는 결국 도그마로 귀결되더군요^^ 어쩌면 열반이란 것도 달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지도 모르겠습니다. 

WR
1
2020-12-11 11:21:23

ㅎㅎ 저간을 아시는군요. 와이프가 위빠사나에 푹 빠져 귓동냥으로 얻어듣고 있습니다. 오디오북 듣듯이. 책 읽고자 애쓰는 저도 손가락에 매달리고 있는 것이고요. 열반의 매뉴얼이라 할 수 있는 티벳 사자의 서를 읽다가 행간의 의미를 알았어요. 다음 생은 그때 생각하자는! 

2020-12-11 12:54:24

 비트겐슈티인의 시도를 시지프스의 형벌이라 하셨는데, 저는 그의 시도에 대해서 충분히 공감하고 열광했습니다. 근본적인 한계를 알고 나면 신기하게도 그 전에 당연하게 생각하며 간직하던 욕망이 스르륵 사라지기도 하죠. 예를 들면 양자역학의 철학적 함의를 알게된 20세기 초의 학자들이 물리학적 결정론의 환상에서 벗어난다거나 괴델이 불완전성의 원리를 발견해낸 다음 힐베르트가 제안한 수학의 야망이 좌절된 것 처럼요. 저는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이 발견하고 설정한 한계 안에서 자족적이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어저면 시지프스도 그 영원한 형벌 속에서 자족적이었을지도 모르죠. 카뮈가 상상한 것 처럼요.  

 

제가 크리슈나무르티를 신비주의로 퉁쳐서 말한 것은 그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신비주의의 옷을 입고 나온 라즈니쉬나 그 때 유행했던 다른 구루들을 한 번 일별하고 도매급으로 넘겨버렸던 제 잘못이죠.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도 크리슈나무르티가 진정한 삶과 관계를 위해 자신을 숭배하고 안락한 삶을 보장하던 별의 교단과 스스로 결별한 점은 높이 샀습니다. 여전히 크리슈나무르티의 삶의 방식이 자산의 말과 일치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심은 거두지 못했지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르침과 일견 모순되어보이는 삶의 모습의 괴리 사이에는 제가 이해못하는 어떤 이유가 있을 수도 있고, 그 괴리가 어쩌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는 가능성은 열어놓고 있습니다. 

 

마지막 말씀에 대해서, 제가 얼마전에 소개한 채널에서 "성철스님과 비트겐슈타인"이란 제목으로 깨닳음의 모순적 성격을 다룬 것이 생각납니다. 깨닳음을 얻기 이한 조건이 욕망을 버려야 하는 것이라면, 깨닳음을 얻고자 하는 욕망은 어째해야 할까요? 말씀하신 읽기에 대한 욕망도 깨닳음에 대한 욕망과 다름 없을 것 같습니다. 링크하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K4MiMUpnxI  

WR
2020-12-12 02:08:07

ㅎㅎㅎ 정말 유쾌합니다. 마약 같은 채널 구독해야겠어요. 그런데 13분여의 방송 안의 내용은 이미 평소 제 생각을 재확인하는 수준이라 (제가 제일 못하는)논쟁을 위한 수사적 표현의 정리에 대한 도움은 되어도 진지한 의미를 던져주지는 못하는 단점이 있습니다. 가볍게 보고 싶을 때 봐야겠어요.

 

크리슈나무르티에게 주목할 점은 제가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판단한 점과 같은데요.

철학책이 아니라 깨달은 자가 보는 세상사라는 것입니다.

소개하신 비디오에 나오는 스님들의 이야기나 세간에서 구할 수 있는 선문답집은 사실 뜬구름 처럼 실생활과 결부되지 않습니다.  

세상에 깨달은 자가 있다고 치고 그 중에 속세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측은지심에 의해 설파했다면 누구일까요? 예수는 제외합니다.(속세를 하부구조로 만들었거든요) 제 생각에 부처는 해당합니다. 하지만 부처의 후예는 저리 뜬구름만 잡고 있죠(건방져서 죄송), 크리슈나무르티가 제 물음에 해당하는 가장 근세의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제 생각입니다. 한국번역판이 철학용어로 번역해 냈다면 안타깝다는 생각입니다. 해적판이라도 좀 보시고 어떤지 이야기 해 주시겠습니까? 오늘 아침도 읽다가 별 상상을 다했습니다. 주말 잘 보내십시오, 지금 외출했다가 좀 있어야 옵니다.

Updated at 2020-12-12 04:50:23

네 이런 분량의 동영상으로 사상의 정수를 파악하는 것은 어림도 없죠. 단순히 아웃라인을 그려주는 역할을 하는 채널일 뿐입니다. 심지어 설명하는 내용 중에는 명백하게 틀린 것들도 있어요. 다만, 김필영 교수가 동영상을 만들고 시청자들과 교류하는 방식은 정말 철학자 답습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 말하고, 모르는 것에서 비롯된 빈틈을 무리하게 메우지 않고 열어두며, 지적을 겸허하게 받아들입니다. 저는 그런 것 때문에 이 채널을 봐요. 

 

저는 선문답이 매우 주관적이고 자의적이며 서로 소통할 만큼 서로에게 정의가 명확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대화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을지언정, 회의적인 사람들에게 동의가 되는 객관성을 품고 있는 형식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실 선문답이나 선 자체에도 큰 관심이 없습니다. 구도라는 것은 대놓고 신비하지 않아도 과학과 회의의 엄격함을 통해서도 충분히 추구할 수 있는 것이고, 저는 그러한 방식들이 훨씬 더 마음에 듭니다. 

크리슈나무르티의 책을 찾아봤는데, 발있다고 생각한 곳에서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예전에 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도서관이 가까이 있으니 오히려 정식 번역판을 빌려 볼 수 있겠죠. 언제라고 말씀은 못드리지만 읽어보겠습니다.   소개를 잘 해 주셔서 관심도 있고 한국어 번역판을 읽을 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눈치가 좀 생겼네요. 

WR
1
Updated at 2020-12-12 08:17:10

보통 그냥 읽어나가는데 오늘은 멈추고 state를 한국 책에 '상태'라고 번역했을까 '상황'이라고 했을까 궁금해지더라구요. 철학 관련한 번역자였다면 상태라고 했을 것 같고 제가 영어로 받아들이는 느낌대로 라면 상황이 더 걸맞는다는 느낌이어서요. 어제 올린 개요 사진에 있는 문장도 제겐 굉장히 볼드고딕체였습니다.  해적판 인문서적이 난무할 때나 80년대 전집류 기억을 해봐도 제가 왜 그 책들만 빼고 다른 방향으로 독서에너지를 쏟았는지 그 번역체에 책임전가를 가끔 하거든요.  그 당시 읽었다면 아마 지금 이해도하곤 상대가 안됐겠지만요. 그래도 인생이 달라졌을 것 같긴 합니다. 혜X님 처럼, 그랬다면 저도 풀소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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