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Krishnamurti - The First and Last Freedom (2)
체계없고 족보없는 상상의 향연에 초대합니다. 접니다.
크리슈나무르티의 자기로부터의 혁명 중 Relationship and Isolation의 내용의 가장 넓은 범위의 해석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피력했던 Peace를 말한 것입니다. 제가 읽은 영문판에는 Nationalism, Brotherhood라는 워딩이 정확히 있어서 Security나 conflict를 시오니즘과 이슬람문화의 갈등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한글판에도 그런 암시가 섞인 해석이 있는지는 확인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좁게 해석하면 부부나 친구관계도 됩니다만, 그런 관계를 원자적(!)인 요소까지 분해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스케일에 상관없이 적용하기 쉽습니다. rockid님이 댓글에서 말씀하신 비트겐슈타인과의 묘한 커플링 또한 그래서 가능합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명상을 통한 수행을 했고 따로이 공부를 안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문장은 단촐한 영어단어의 연결입니다. 한글판은 한자어의 연결로 오히려 심오해지고 되려 신비로워 보이지만 영문판은 비트겐슈타인의 명제들처럼 간결하고 명징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어려운 것을 단순하게 축약해 표현했고 그것을 일반화하기 위해 고통스러워 했던 것 같습니다.(공부 중입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단순하게 쉬운 언어로 스키마를 달리 적용해도 그 때마다 의견이 제대로 전달되는 희한한 화술을 씁니다. 그가 통찰해 꿰뚫는 대상이 크든 적든 읽는 사람이 해석하기 나름으로 열어놓았지만 차근차근 설명해 나갑니다.
이러한 비교로 볼때 장무기의 구양신공과 구음진경이 어차피 갈고 닦아 싸우는 기술인 것처럼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체계를 언어의 토대 위에서 세계를 설명하려 했고
(다만, 그는 그 자신이 인식하고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언어의 세계(나중에는 그림?)로 국한해서 정확성과 객관성이라는 시지프스의 형벌을 자초하고 한없이 바깥세상을 갈구하는 인간적인 고뇌에 빠지지 않았을까요?- 그의 평전 읽은 후에 다시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아는 사람 말하게 하려는 제 뻥섞인 대화술입니다. 속아주세요.)
마찬가지로 크리슈나무르티는 최대한 단순한 문장의 연결로 세계를 설명하려 했습니다. 단 크리슈나무르티는 경계를 쌓지 않았습니다. 신비주의라는 오해를 받더라도 그가 할 말을 다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이 갈망한 것은 아직 모르겠고 크리슈나무르티는 삶의 방법론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으로 읽힙니다.
신비주의라기 보다는 실용주의에 가까운 깨우침의 말들이 이 책에는 들어 있습니다. 신비주의는 미국에 건너와 타락한 라즈니쉬나 제가 대딩 때 읽다 때려 치웠던 마하리쉬 정도 되겠습니다. 그들이 진리를 떠들었는지 신비를 팔아 뱃살을 채웠는 지는 다시 곰곰히 읽어보고 그들이 잠시 소유했었던 권위를 재평가해보고 싶지만 제게는 지금 풀 권위의 비트겐슈타인과 크리슈나무르티가 있습니다.
서두에 족보없다 밝힌 이유는 책을 닥치는 대로 읽다 보면 채이는 게 롤랑바트뜨, 푸코, 비트겐슈타인...헤겔, 칸트는 말할 거도 없어요, 전공자가 아니니. 제게는 이들이 신비주의였습니다. 상대적 신비주의, 아마도 많은 분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돌리지 않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제게는 크리슈나무르티의 가르침들이 에크하르트 톨레나 데이빗 호킨스등을 읽다가 역주행해서 건져낸 과거로부터의 선물이기에 독서에 대한 자세를 다시 가다듬게 만들었습니다.
조문도 석사가의 라고 옛 성현의 말이 중학교 한문책에 있었습니다.
저는 깨닫고 싶지 않습니다. 깨달은 자의 책들을 찾아 읽다가 죽고 싶습니다.
명상의 관점에서는 읽고자 하는 욕심도 버려야 해탈한다지만 해탈의 욕심을 버린 자리와 읽고자 하는 욕심을 버린 자리가 같은 위치라면 저는 해탈을 버리겠습니다.
- Krishnamur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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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연하면 메세지가 비슷한 지그문트 바우만은 홀로코스트의 발생과정을 처음부터 Isolation, ignorance, alienation ----> kill them all 로 설명하지 않고 원자적(! 이거 자꾸 써먹으니 내것 같음)으로 파고 들어 하나하나 설명합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Relationship 앞에 누구와 누구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책 전체가 다 이런 식이어서 읽는 사람이 자신의 문제를 대입해서 깨닫게 유도합니다. 다만, 한글 번역판에서는 한국어의 단어 자체가 그 범위가 한정된 경우가 많습니다.
씌여진 단어가 관계의 범위를 국한하게 만드는 강제성이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비교언어학 관련해서 무지하지만... 이걸 분명 느끼신 분 있으실 거라 믿습니다.